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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일강 김철(一江 金澈)의 생애와 독립운동
윤 선 자(전남대학교 교수)
1. 출생과 성장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咸平郡 新光面 咸井里 九峯)에서 김동진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산(英山), 호는 일강(一江)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영탁(永鐸)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영광군 묘량(靈光郡 畝良)의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8년 9월 22세의 나이로 영광 광흥학교(光興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조찬승(曺燦承)․편용무(片容武) 등 영광인들이 뜻을 모아 관 서당․노인당․향교서당 등의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된 자금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설립한 것이었다. 1년간의 속성과정으로 제1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하였는데 경술국치 이후 ‘한일합방’ 반대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 2년만에 폐교 당하였다.
광흥학교를 졸업한 후 김철은 1909년 경성의 법부(法部) 법관양성소[1909년 11월 학부(學部) 법학교(法學校)로 변경]에 입학, 1912년 3월 졸업하였다. 그런데 김철이 처음 입학한 학교는 법관양성소가 아니라 1908년부터 교육기간 1년, 입학 대상 17세 이상 23세 이하 남자, 전형은 독서(한문․국한문)와 작문(국한문)으로 100명을 선발하였던 ‘예과’(豫科)였던 것 같다. 김철이 입학할 당시 법관양성소의 입학자격은, 17세 이상 35세 이하의 남자로 관립일어학교나 관립고등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동등 이상의 학력 소지자였으므로 소학교 졸업의 학력이었던 김철은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철은 처음 법관양성소 예과에 진학하였고, 예과를 마친 후 법학교에 진학하여 법률공부를 계속하였다고 여겨진다.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수학하고 귀국하여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김철에게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1917년 김철은 조국의 독립에 투신하기 위해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던 상해(上海)를 향해 고향을 떠났다.
상해에 도착한 김철은 1918년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한진교(韓鎭敎)․선우혁(鮮于赫) 등과 발기인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초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보냈고,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국내외로 당원들을 파견하였다. 김철은 서병호(徐丙浩)․선우혁과 국내로,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잠입한 김철은 영광으로 가서 광흥학교 동창 조병모(曺秉模) 집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승려를 가장하여 돌아다니며 지방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고향 함평에 들러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만드는 한편 당시 천도교 교주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3․1운동을 협의하고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기산도(奇山度) 등과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어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 건물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2. 임정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1919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각 지방 대표 29명이 모여 초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29명 중 전남대표는 김철 뿐이었는데, 기호지역이라는 특정의 지역기반과 ‘의회 우위’의 운동노선을 가진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들의 지역대표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을 다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법 규정에 따라 1919년 4월 30일 새로이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전라도’는 김철과 나용균(羅容均)․한남수(韓南洙)․장병준(張柄俊) 등 4명이었다. 1919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서 김철은 임정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재무위원은 최재형(崔才亨)이 총장이었고, 손두환(孫斗煥)․송세호(宋世浩)․이규서(李奎瑞)․임재호(任在鎬)․최완(崔浣)․한남수(韓南洙) 등이 위원이었다. 이때 김철은 법무부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김철은 임정특파원으로서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특파원을 임명한 사령서,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13도 대표자 고유문(告諭文) 등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와 기산도와 함께 먼저 전남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 김종탁을 방문하여 그를 13도 대표의 일원으로 선임하고,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박은용을 의무금 요구특파원으로 선임하였다. 또한 6월 23일에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김요선(金堯璿)을 방문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그로부터 160원의 의무금을 받아서 그중 60원을 기산도에게 주고, 목포와 해남 지방 유세를 위해 6월 26일 김요선의 집을 출발하였다.
1919년 8월 5일 임정은 위원제를 폐지하고 차장제를 시행하였다. 이때 김철은 초대 교통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28일 김철은 내무국장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상해를 방문한 교통총장 내정자 문창범(文昌範)을 만나 일본군대를 이용하여 동족을 파멸시키려 하는 러시아 내부의 상황 등을 듣고, 한민족의 독립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교통국은 국내와의 연락, 정보 수집, 국내동포와 일제의 동향을 파악․보고함으로써 임정의 활동방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내외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전개해야 하였으므로 임정은 국내외 한인사회와의 연락업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제1차 의정원회의에서 조각된 정부 6개 부처에 교통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임정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1919년 7월 말 최초의 임시교통국인 교통부 안동(安東)지부가 설치되고, 그 소속 대원들이 국내 각지에 파견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8월 20일 ‘임시지방교통사무국장정’이 반포되고 지방교통국의 설치와 조직이 확정되었다. 김철과 관련하여 교통부의 국내 거점이 마련되었음을 1921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경북 안동에 사는 안상길은 “상해로 건너가 교통총장(대리) 김철을 만나보고 조선 내지 연락과 독립운동 방법의 전달과 동 자금 모집을 하기 위하여 조선 내지에 교통부를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때 안상길이 김철을 가리켜 교통총장이라 한 것은, 1919년 11월 26일 러시아에 체재 중인 문참범이 교통총장 취임을 거절하였기에 임시헌법에 의하여 교통총장을 맡고 있던 김철에게 교통총장대리의 직무가 주어진 때문이었다.
1920년 5월 28일 김철은 임정에서 설립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1월 18일에는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상해에 설립된 이 학교는 1920년 5월 8일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고, 1920년 12월 4일 제2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던 청년 중에서 일반학교와 중국의 군관학교에 갈 수 없었던 사람으로 무관이 되려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다.
1921년 3월 임시의정원 제8회 정기 의회가 개최되었다. 개회 당시 의원은 모두 43명이었는데, 김철은 교통차장을 사임하고 김인전(金仁全)․나용균․정광호(鄭光好)와 함께 전라도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6월 임시의정원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자 이동녕을 임시대통령 직무대리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의 결정이 불법이라며 힐책하는 등 노골적인 불만과 인신공격을 가하자 1925년 3월 13일 대통령탄핵안을 상정하였다. 이유는 헌법 제14조 선서, 제11조의 대통령의 국가대표 정무총람 법률공포 등의 위반, 제39조 법률 및 명령의 국무원부서 등의 위반, 대통령을 선출한 임시의원정의 노골적인 부인이었다. 이어 3월 23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직무지를 떠나 임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임정과 임시의정원을 부인하였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안을 결의․통과시킴과 동시에 박은식을 새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3월 30일 국무령 지도체제인 내각책임제 제2차 개헌안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하여 4월 7일 공포됨으로써 임정은 국무령제로 지도체제가 변경되었다.
이후 이상룡(李相龍),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에 이어 1926년 7월 7일 홍진(洪震)이 국무령으로 선출되었다. 홍진은 지역적 안배를 통해 각파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방침으로 김철을 전라도 대표로 천거하였는데 기호파에서 반대하였다. 1926년 12월 14일 홍진에 이어 김구(金九)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는데, 김철은 김갑(金甲)․오영선(吳永善)․윤기섭(尹琦燮)․이규홍(李圭洪)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김구는 국무령제 지도체제하의 내각 구성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임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헌법개정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2월 23일 김철․윤기섭․이규홍․정원(鄭遠)을 헌법개정기안위원으로 임명하였고, 개정 작업을 거쳐 1927년 3월 5일 임시약헌을 공포하였다. 임시약헌은 대통령․국무령 등의 정부수반을 없애고 완전히 회의체의 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로 개편한 것이었다. 국무위원회제는 임시의정원에서 선출된 국무위원 5인 이상 11인 이하로 구성된 국무회의를 결정기구로 삼았다.
임시약헌이 공포됨으로써 소멸되었던 김구 국무령제하의 내각은, 1927년 8월 19일 국무위원회제하의 내각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동녕(주석 겸 법무)․김갑(재무)․김구(내무)․오영선(외무), 그리고 김철이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즈음 김철은 전남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 중이던 최혜순(崔惠淳)과 상해에서 결혼하였다. 1929년 큰 딸 미경(美卿 : 현재 미국 거주), 1931년 둘째 딸 혜경(惠卿 : 현재 경기도 안산 거주)이 태어났다.
1930년 11월 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 임기만료에 따른 2차 개각이 단행되었다. 그리하여 주석 겸 법무장에 이동녕, 재무장에 김구, 내무장에 조완구, 외무장에 조소앙, 그리고 군무장(軍務長)에 김철이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김구․김철․이동녕․조소앙·조완구 등은 임정 국무위원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남경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국민회의에 임정과 한국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선언서>는 옛 한국영토에 민주독립국가를 확립하는 것과, 그 땅에 균등제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임정은 한국독립당을 근간으로 삼았고, 한국독립당은 민국 전체를 기초로 하여 균등사회를 추구해 나갈 것이 정부의 주의이며 정책이라 밝혔다. 또한 일제의 만몽(滿蒙)정책을 폭로하고 만주지역 한인문제를 거론하면서 장차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절실한 연락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무장이었던 김철은 임정의 무장활동을 관장하면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지원하였다. 김철은 국무위원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을 사전에 승인하여 실행케 하였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그해 4월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상해주둔군사령관 등을 폭살시키는 의거를 실행하였다. 침체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었다.
윤봉길 의거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은 김구ㆍ김철․안공근ㆍ엄항섭은 상해의 프랑스조계 환룡로(環龍路) 119호에 잠시 피해 있다가 교통대학 신국권(申國權)의 알선으로 ‘Foreign YMCA' 간사인 미국인 피치(S. A. Fitch) 박사의 집에 은거하다가 김구는 가흥(嘉興)으로, 김철은 항주(抗州)로 빠져나갔다. 김철은 항주에서 청태(淸泰) 제2여사(旅社) 32호실에 머물렀다.
1932년 5월 항주로 이동한 임정 간부들은 임정 변공서(辨公署)를 개설하고 5명의 국무위원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를 개최하였다. 21일 회의에서 임정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약헌에 의거하여 재무장에 김철, 군무장에 김구로 부무(部務) 변경을 결정하여 공포하였다. 변경 이전 재무장은 김구가, 군무장은 김철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측에서 임정으로 유입된 5천불을 착복하였다느니, 상해시상회(上海市商會)에서 윤봉길 유족의 조위금 7천불을 횡령하였다느니 하는 문제로 김구와 김철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구는 군무장을 사퇴하고 이동녕과 함께 가흥으로 떠났는데, 김철의 조카 김석((金晳, 1911-1983)이 『시사신보』(時事申報)에 “안창호는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투고하였다. 이에 김구 등은 남경에 있던 박찬익(朴贊翊)을 통해 이유필 등과 함께 5월 하순 박창세(朴昌世)․이동우(李東宇)․안공근․문일민을 항주로 보내 김철․조소앙․김석을 면박, 힐난, 구타하고 그 소지금을 몰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5월 30일 외무장 조소앙, 6월 2일에는 나머지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김석은 영광보통학교 4학년 때인 1923년 숙부 김철의 부름을 받아 종제 김덕근과 함께 상해로 건너갔다. 이어 1928년 상해 영국중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나주군 문평면사무소 금고를 털어 도주하다 잡혀 개성소년형무소에서 2년간 수감 당하였다. 풀려난 후 상해로 건너가 1930년 상해 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고, 재학생으로서 김구와 김철이 조직한 의용단에 가입, 간부로 활약하였다. 또한 1932년 1월에는 한인애국단의 청년단체인 상해 한인청년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직을 맡았다. 김철과는 숙부와 조카로, 김구와 의용단 및 한인애국단과의 관계로 매우 밀접한 사이였던 김석의 사건은 김철과 김구는 물론 임정의 모든 국무위원으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하는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상순 가흥에서 국무위원회를 개최한 결과 ‘항주사건’을 한국독립당 이사회를 열어 다루기로 결정하였다. 6월 하순 김구ㆍ김철․송병조ㆍ이동녕ㆍ이유필 등 16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한국독립당 이사회는 김석의 투고문제와 관련된 구타사건 - 일명 ‘항주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논의를 거듭하였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정과 한국독립당은 송병조ㆍ이유필계, 김철ㆍ조소앙계, 김구계로 분리되었다. 한편 그해 12월 30일 밤 9시경 프랑스조계에 숨어 있던 김철은 일본영사관 정찰대에 체포당하였는데, 프랑스영사가 국제법 위반을 이유를 항의서를 제출하여 10일만에 풀려났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임시의정원 임시회의에서 국무위원 김철․조소앙․조완구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김철은 박진(朴震)․김정식(金靖植)․최혜순(崔惠淳)과 함께 의정원 전라도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김철은 임시의정원 의원에 다시 선임되어, 의원자격 심사위원으로 신도(新到)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1934년 1월 2일 임시의정원은 제3차 정기 개각을 단행하였는데 김철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국무위원은 김철․송병조․양기탁․조성환․조소앙(이상 한국독립당), 김규식(한국광복동지회), 최동오(조선혁명당), 윤기섭(신한독립당) 등이었다. 이어 1월 20일 개선된 첫 국무회의에서 김철은 무임소 위원이 되었는데 주석 양기탁, 내무장 조소앙, 외무장 김규식, 군무장 윤기섭, 법무장 최동오, 재무장 송병조, 무임소 김철․조성환․성주식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임정은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공식적으로 약헌에 규정된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을 결성하기 위한 방침을 재천명하였다.
3. 각종 독립운동단체와 한인단체 결성
임정 국무위원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김철은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와 한인단체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해 장빈로 애인리 39호에서 대한적십자회가 조직되었다. 목적은 전시 및 천재지변에서의 상병자를 구호하는 것이었다. 회장은 이희경이었는데 김철은 상의원(常議員) 20명 중 1인으로 임명되었다. 회원수는 720명이었는데 그 중 상해 회원수는 152명이었다.
1920년 1월 김철은 김구․김립․김순애․손정도․윤현진 등과 의용단을 조직,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경찰의 국내 의용단 관련 자료에 평양․황해도․부산 등의 활동지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상해에서 결성되었지만 의용단은 임정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한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의용단 취지서>를 보면 임정을 중심으로 합심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임정 요인들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 작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있었고 4월 10일 임시정부가 성립되어 그 국면에 당하고 있는 제공은 고심참담하여 만반의 시설과 준비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행시키고 있으나 아직 국토는 적의 유린 밑에서 능욕을 겪고 있고, 동포는 적의 철장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 지금에 이르러 우리들의 갖은 좋은 방책과 가장 큰 급무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다만 죽거나 살거나, 모두가 합하여 하나로 될 뿐 아니라 정연한 조직과 견고한 단결 밑에서 정부의 뜻을 체득하고 명을 받들어 모든 배포와 거동과 질서와 맥로가 있게 하여 일단 선전포고가 내리는 날에는 일거에 일어나 군사로서 조국에 순(殉)하는 대한의 국민된 자에게 우리가 채찍질을 하고 하늘의 명명 역시 이에 있나니 본단의 조직된 소이이다. …”
의용단이 하던 일은 열 가지였다. 첫째, 포고문 살포와 선전으로 국민에게 적개심을 격발케 한다. 둘째, 정부를 도와 재정업무를 지원한다. 셋째, 국민에게 개병․개납주의를 고취한다. 넷째, 왜(倭) 총독부에 소속된 관리를 퇴진시킨다. 다섯째, 적의 관청에 납세를 거절케 한다. 여섯째, 일본의 화폐 사용을 억제한다. 일곱째, 군사상의 실제 방법을 획책한다. 여덟째, 임정의 공보와 기관지를 전달케 한다. 아홉째, 본 단(團)과 주의가 같은 다른 단체를 상호 협화(協和) 원조한다. 열째, 정부의 명령이나 지휘가 있을 때와 광복운동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따라온다.
1920년 3월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김철은 안창호를 도와 손두환(孫斗煥)․이유필․정인과(鄭仁果) 등과 같이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국내독립운동단체와 긴밀한 연계를 이루며 발달했던 연통제는 1919년 말부터 조직이 탄로 나면서 수난을 겪었다. 동년 12월 함북독판부가 발각된 데 이어 연통제 역할을 대행하던 국내의 비밀결사들이 이 무렵 대부분 파괴당하며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활동의 새로운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지방선전부였다. 임정은 1920년 1월 19일 국무회의에서 안창호를 선전위원장으로 선임하여 선전기관 조직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위임했다. 선전기관의 명칭은 ‘지방선전부’로 결정되었고, 동년 3월 10일 국무원령 제3호 ‘지방선전부규정’ ‘선전대 설치규정’ ‘선전대 복무규정’ 등이 공포되면서 지방선전부는 정식 발족하였다. 지방선전부는 총판을 책임자로, 부총판, 이사, 선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김철은 부총판을 맡았다.
1921년 8월 김철은 한중호조총사(韓中互助總社)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중 양국민이 호조의 정신 아래 행복 추구를 목적으로 중국 각처에 조직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연합한 것이었다. 중국측은 교사들이 많이 가담하였고, 한국측은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사람이었다. 상해에 본부를 두고 한국과 중국측이 10명씩의 평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는데 김철은 한국측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19일 상해거류민단 임원 개선 개표 결과 김철은 여운형․이탁(李鐸)․한진교(韓鎭敎) 등 본구(本區) 대표 15명 중 1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2년 3월 상해 대한교민단 단장에 당선되어 취임하였는데, 같은 해 8월에는 여운형이 단장직을 맡았다. 대한교민단은 1915년 교민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실상은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서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전후의 조직을 보면 김철은 정무위원으로 재무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8월 30일자로 정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1922년 7월 임정 및 독립운동단체의 주도적 인물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를 포함한 몇 가지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해에서 시사책진회을 조직하였는데 김철은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상호간 노선 차이가 크고,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이 심각했을 뿐 아니라 도중에 임시의정원 의원과 이승만 옹호파들이 전원 탈퇴함으로써 1922년 8월 11일 시사책진회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1930년 1월 25일 임정 핵심세력과 안창호에 의해 프랑스조계 마랑로 보경리(馬浪路 普慶里) 제4호 임정 사무소에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1926년경부터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는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를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었고, 북경․상해․남경․무한․광동 등 중국 본토에서는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 3월 21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김갑․김철․오영선․이동녕 등 25명이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집행위원 25명은, “본회는 한국의 유일한 대독립당 성립을 촉성함. 본회는 한국 독립의 필요한 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의 총집중을 노력함”이라는 강령을 포함한 유일독립당의 조직을 목적으로 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성립은, 민족유일독립당이라는 민족운동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시도된 중국관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정당 활동이라는 점에서 한국독립운동사상 큰 의의를 지닌다. 한국독립당은 청년단체로서 상해한인청년단, 부인단체로 상해한인애국부인회와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소년단체로 상해한인소년동맹을 두었다. 김철은 재무부주임을 맡았다.
독립운동을 목표로 하였지만 힘이 분산되어 있는 민족의 현실 앞에 김철은 무척이나 고심하였던 것 같다. 언론매체 『삼천리』의 창간 3주년 기념호에 ‘소회(所懷)와 기망(企望)’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김철의 글은 독립운동자는 많으나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서로 간에 협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운동(朝鮮運動)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성의를 다하고 있는 이들의 수는 해내해외(海內海外)를 통하여 그리 적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오늘날까지 통일된 의사(意思)와 집중된 이론을 표시 교환하는 기관 출판물이 없으므로 항상 해내(海內)는 해내대로 해외는 해외대로의 각자 일면적 관찰로써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치 못하는 결함이 있는 것은 해외에 오래 있어 조선의 실정에 직접 부딪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특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물론 이러한 일은 현하(現下)의 조선정세 하에서는 실현키 곤란한 일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최소한도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도 이것을 민족적 이익의 전체 목표에 적합하도록 운용할 수만 있다 하면 조선 내지(內地)에 있는 현명한 민중의 지도자 또는 출판에 관계있는 식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해득실을 권형(權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근간에 민족운동자와 계급운동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극히 간단히 해결된 것과 같이 계급운동자들은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나는 생각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도 어느 쪽이나 역시 각자의 주관적 인식에만 지배되어 냉정한 객관적 견해에 의한 조선운동의 대계(大計)를 기도하는 정당한 인식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한 것과 같으므로 기계적으로 어떠한 선진국가의 영향에만 지배되지 말고 진실로 우리 민족의 현실과 각자 운동의 최선 진로를 규범키 위하여 견해 상이한 각계의 인물이 널리 의사를 교환 표시할 필요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으므로 이 또한 편파치 않고 양심 있고 현명한 언론기관의 존재를 필요케 하는 것이다. …”
1931년 9월 김철은 박창세․이웅․왕웅(김홍일)과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군인회간장(軍人會簡章)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안창호 등과 함께 교민단 심판(審判)이 되어 상해 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또한 11월에는 중국인들과의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중한항일대동맹’을 조직하고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伍澄千)․서천방(徐天放)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협의체적 조직의 비효율성을 단일당 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각 단체대표 12명이 남경에서 제2차 대표회의 및 한국혁명 각 단체대표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김철은 김두봉․송병조와 함께 한국독립당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4일 급성 폐렴으로 쓰러져 항주 소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입원 치료하였으나 1934년 6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송병조․양기탁․이시영․조완구․양기탁 등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항주 악비묘(岳飛墓)의 뒷산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이곳은 아파트단지로 변해 김철의 묘소 위치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김철이 사망한 후 1937년경 최혜순은 두 딸을 데리고 인천으로 귀국하였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였다. 인천유치장에 상당 기간 감금되어 있다가 풀려났지만 해방이 되기까지 최혜순은 고등계 형사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김철의 독립에 대한 열의는 『독립신문』1921년 1월 1일자에 ‘경축 독립신문’(敬祝 獨立新聞)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다음 글귀로 요약된다. “神斧鬼誅春秋大義 日昇月恆河山重整”(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춘추의 대의고,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철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1975년 8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워 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1984년 6월 서거 50주기를 맞이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9년부터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번지 일원에 사당․동상․기념관․수양관․관리사 등을 건립하여 2003년 6월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