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의상(古風衣裳)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 3호, 1939.4)
[어휘풀이]
-부연 : 처마를 뒤쪽으로 올라가세 하여 멋을 내도록 쓰는 짧은 서까래
-풍경 :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주렴 :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든 발.
-호장 : 회장(回裝). 여자 저고리의 깃, 끝동. 결마기, 고름 따위에 대어 꾸미는
색깔 있는 헝겊
-동정 : 한복의 저고리 깃 위에 조붓하게 덧대어 꾸미는 하얀 헝겊 오리.
-운혜 : 울이 깊고 작은 가주신으로 앞 코네 구름 무늬를 수놓음.
-당혜 : 예전에 사용하던 울이 깊고 앞 코가 작은 가죽신. 흔히 앞 코와 뒤꿈치 부분에
꼬부라진 눈을 붙이고 그 위에 덩굴무늬를 새긴 것으로, 남녀가 다 신었다.
-호접 : 나비
-아미 : 누에나방의 눈썹이라는 뜻으로, 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을 이르는 말
[작품해설]
조지훈은 시인을 “미의 사제(司祭)요, 미의 건축사”라고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전통적 시관(詩觀)을 지킨 시인임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 시는 그러한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옛 여딘의 옷과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예스런 어투와 가락으로 조화 있게 표현하고 있다. 「승무」와 함께 이 시는 고전적 소재와 전통 무용에 대한 시적 탐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승무」가 춤을 소재로 하면서도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표현하고 있다면,「고풍의상」은 한복의 우아함과 이를 통해 표현되는 춤사위의 그윽함을 보여 줌으로써 한 폭의 미인도(美人圖)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풍스러운 의상과 춤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살리기 위해 시인은 부드럽고 우아한 가락과 ‘호장저고리’·‘치마’·‘운혜’·‘당혜’·‘호접’·‘아미’와 같은 옛 정취가 넘치는 시어들을 사용한다. 또한 ‘밝도소이다’·‘보리니’·‘흔들어지이다’와 같은 의고적(擬古的) 종결어미를 구사하여 한층 더 예스런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18행의 단연시이지만 의미상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3행의 첫째 단락은 어는 깊어가는 봄밤, ‘하늘로 날을 듯’한 날렵한 처마의 기와집을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고적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부연 끝’이나 ‘반월’ 등은 모두 한국적인 선(線)의 미를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7행의 둘째 단락은 저고리의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화려한 빛깔의 무늬가 돋보이는 호장저고리를 노래하면서도, 그 화려함보다는 ‘곱다’는 측면을 ‘곱아라 고아라’로 반복, 변주하며 강조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한편 그 고운 것을 은은한 달빛에 비유하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와 같이 표현함으로써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미적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8~10행의 셋째 단락은 치마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8·9행은 치마 선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10행은 치마 선의 미를 ‘사르르 물결을 친다’라느 역동적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11~14ᅟᅫᆼ의 넷째 단락은 한복을 입은 여인의 맵시와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앞서 제시한 한복의 이미지에 어울리게 사뿐히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이 한 마리 나비에 비유되어 있다. 15~18행의 다섯째 단락은 고풍 의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화자의 도취감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이 밤에 옛날에 사’는 고전적 일체감을 느낀 화자는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겠다고 한다.
이처럼 이 시는 고전 시대의 풍물에서 민족 고유의 우아하고 섬세한 미를 찾아내 세련된 서정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전통을 중시하는 시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특히 창작 시기가 일제 말기인 점을 생각하면, 우리 것을 점차 상실해 가던 당시에 우리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작품 내면에 투영시킴으로써 민족 정서를 환기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심오한 전통 문화의 정신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외적 묘사에만 머물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작가소개]
조지훈(趙芝薰)
본명 : 조동탁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 전문 강원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조직
1947년 고려대학교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196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