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와 안개 사이
이 수 영
비가 오는지 안개가 낀 것인지 그 어름쯤 되는 날씨가 변덕스럽다. 금세 오던 비가 멈추자 이번에는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리고 비가 그쳤나 싶어 우의를 벗으면 비가 오는지 안개가 끼었는지 구분이 안 되는 는개가 이어진다.
갈까 말까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미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고 버스도 예약되어 있다. 등산 가방을 메고 나섰다.
버스는 28인승 대형버스, 이렇게 좋은 버스로 등산길을 나서기는 처음이다. 안내자가 그 사연을 길게 설명하지만 그건 내가 특별히 좋아하거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달리는 차창에 부딪는 빗방울은 그 기세가 대단하다.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를 내리치듯 아니면 사군자를 치는 붓끝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쭉쭉 뻗어나는 대나무의 잎처럼 그냥 순하게 부딪는 법이 없다.
도로에는 뿌연 안무가 모깃불 연기처럼 자욱하게 가라앉으면서 가벼운 바람에도 일렁인다. 앞서 달려가는 차바퀴에서 만들어진 안무가 길에 가라앉으면 고속도로는 거대한 안개의 바다가 된다. 그리고 차창에는 군자 중의 군자인 대나무가 달밤에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의를 입고 스패츠로 등산화와 바지 끝을 무장하고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몸이 젖어든다. 우의의 틈새로 스며든 빗물에 젖고 바람이 단절된 우의 안쪽은 땀으로 젖었다. 그러니 안팎으로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 셈이다. 이미 계획된 산행이고 젊은 산 꾼들을 따라 나선길이라 가다가 되돌아 갈 수도 없다. 타고 온 버스는 이미 산의 저쪽 목적지에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걸을 수밖에 없다.
한참을 걷다보면 밖에서 온비와 내 몸에서 난 땀으로 내 몸에 걸친 모든 것은 젖어버린다. 무겁고 걸리적거리는 우의를 벗어버리고 온 몸에 비를 맞으며 걷는다. 이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비 맞는 것을 즐겨야 한다.
비 오는 날의 산길은 함정이 많다.
가파른 경사로는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더 힘들고 위험하다. 지반이 약해지면서 돌들이 흔들리고 토사에 미끄러지기 일쑤다. 내가 미끄러지면 나 혼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누군가에게도 위험하다.
기온이 섭씨 25도를 넘나드는 늦은 봄 날씨지만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금세 한기가 돌고 오슬오슬 추워진다. 그래서 목적지까지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등산 가방에 넣어온 뽀송뽀송한 속옷 한 벌을 갈아입는 즐거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빗발은 온 산을 춤추게 한다.
낮은 곳의 짙은 초록은 산을 오를수록 옅은 연둣빛으로 바뀌고 간간이 흐드러진 산벚꽃이 화려하다. 산의 능선을 걷노라면 잡목들 사이사이에 아직도 지지 않고 남은 진달래가 애처롭고 철쭉은 이제야 연분홍 꽃망울들을 소담스럽게 내밀고 있다. 가슴이 찡하도록 아름답다.
내 몰골은 후줄근히 비에 젖어 볼품없지만 마음은 여전히 산을 뒤덮고 있는 는개와 안개사이를 오가며 온몸에서 훈훈한 열기를 내뿜고 있다. 정상을 밟았다. 표지석이 1084미터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 아래는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산을 오른 것인지 그냥 산책길을 걸은 것인지 차이가 없다. 오늘은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의 행운은 없다.
는개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고 도시락을 펴 놓고 앉을 자리가 마땅찮다. 쪼그리고 앉아 가지고 온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내려오는 길, 세상 모두가 몽롱한 꿈을 꾸는 듯 움직이는 그림이 되어 펼쳐진다. 나는 그 산길을 벗어난 종점 근처에서 뽀송뽀송한 속옷을 갈아입었다. 그제야 비도 안개도 걷히고 있다.
미처 먹지 못한 김밥 한 줄에 하산주 몇 잔, 나는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 5월 초, 산행 후 귀가 길 버스 안에서 수첩에 메모한 글을 정리했습니다.
2018. 6
첫댓글 비 오는 날의 산행, 저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저는 비오는 날의 외출 자체를 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비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좋아해서 찻잔을 들고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는 일은 잘합니다. 빗발이 온 산을 춤추게 한다는 표현에 공감하며, 비에 젖어 더욱 깨끗하고 선명해진 녹색산을 눈 앞에 떠 올려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신선이 산행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는개와 안개는 또다른 상상과 즐거움을 주는 자연현상인 것 같습니다. 힘든 산행을 하셨지만 좋은 글을 한편 얻으셨으니 뜻깊은 산행이 되신 것 같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글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비오는 산행 저도 몇 번해봤지만 선생님과 같은 산행의 운치를 즐기지 못했는 것 같습니다. 비오는 산정에서 마셨던 한잔의 커피 너무 운치가 있어서 아직도 생각납니다. 글을 읽은 사람에게 산에 다녀온 느낌이 들만큼 섬세하신 필력이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름철 "는개와 안개' 사이 산행 글,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는개와 안개의 차이를 잘 알았습니다. 등산을 즐기는 진정한 산악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빗속의 산행은 위험성도 있지만 안개와 는개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가이 환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군시절 경기도 포천 해룡산에서 내려다 보던 풍광이 눈에 선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는게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 해변 가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정황이 얼른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비오는 날의 산행 모습을 짐작하게 합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날씨와 상관 없는 것 같습니다. 산행 후의 후련 함이 곧 즐거운인 모양. 잘 읽었습니다.
산행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대실산(모암봉)으로 한 번씩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시거든
전화 주세요. 제가 다사에 있으면 돼지 국밥에 막걸리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010-5595-1149 서영화 드림
는개라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글을 읽고 알듯말듯하여 검색해보니 비와 안개 사이에 날씨를 는개 라고 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우리 국어 낱말도 이렇게 다양한 뜻이 있으니 참 훌륭한 글이라 느꼈습니다. 선생님 저는 돈 주고 하라고 해도 엄두도 못낼 산행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내력의 한개를 이겨온 승리자분이십니다. 찬사를 보냅니다. 건강하신 모습 다 산행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