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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러 온 그리스 사람들(2)
밀알의 영광
요 12:20-25 / 조동천 목사
우체부 집배원인 요한은 수십 년간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매일 50마일의 거리를 매일 오가며 우편물을 배달해 왔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모래먼지가 뿌옇게 이는 마을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을 수십 년 간을 오갔는데, 앞으로도 나는 계속 이 먼지 이는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야만 하는가? ‘정말 따분한 인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풀, 꽃 한송이 피어 있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걸어가는 요한의 걸음걸이는 더욱 힘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깊은 시름 속에서 길을 걷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다시 가벼운 걸음걸이로 우편물을 배달했습니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것이 매일 반복된다고 해서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그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내 일을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다음날부터 요한은 들꽃 씨앗을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편배달을 하는 짬짬이 그는 주머니 속의 꽃씨들을 거리에 뿌렸습니다. 50여마일의 거리를 오가는 동안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씨를 뿌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자 요한이 다니는 마을의 길 양쪽에는 노랑, 빨강, 초록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습니다. 이른 봄에는 봄꽃들이, 여름에는 여름 꽃들이, 가을이면 가을꽃들이 철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50마일의 거리는 더 이상 황막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기쁨의 거리였습니다. 휘파람 불며 우편물을 배달하는 요한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하게 아름다웠습니다.(www.2man.com의 '감동이 있는 이야기' 참조)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서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 있고, 만들어 갈 수 있는데 있습니다. 완전한 세상이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 갈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기에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왜 밀알을 보시며 감격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밀알이 다이아몬드로 변하기 때문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실 날이 가까운 절박한 상황인데, 다행히 헬라인들이 추종하고, 유대인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왕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밀알을 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중요한 시점에서 밀알 속에 있는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큰 것, 잘되는 것, 높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밀알 하나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십니다. 밀알 하나 이것은 가치로 따진다면 정말 미약한 것입니다. 헤롯의 영광, 가이사의 권좌에 비하면 얼마나 미미한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밀알이 주는 영적인 원리 때문에 가치를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쓸모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계시와 삶의 원리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과 마귀들이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차이가 많습니다. 떡, 영예, 세상의 영광 등 이런 것들보다는 사람들이 소홀히 하는 말씀, 십자가, 예배 등이 예수님께는 소중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누룩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 밀가루 속에 형체도 보이지 않는 누룩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세상을 움직이시는 원리를 발견하십니다. 어부들의 그물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을 봅니다. 겨자씨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적인 원칙들을 발견하실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손에 쥐는 물질적인 차원에서 가치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영적인 차원의 원리에서 기쁨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인 원리들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기뻐하십니다. 아마 잔치하거나 파종하다가 떨어진 밀알을 하나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시면서 발견하는 진리들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얻었거나 잃었거나 황당한 사건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원리와 사랑을 발견하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섭리와 손길을 느낀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잃고 얻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24절을 보십시오.
1. 생명의 영광
먼저 “한 알의 밀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작을 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밀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십니다. 작을지라도 죽어 땅에 심겨지면 30, 60, 100여개의 알이 생기지 않습니까? 또 이것들을 심으면 또 무수한 알갱이들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은 아주 미약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예수님 한 분이 이 땅에 떨어져 죽으시면 그 예수님의 생명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곧 닥칠 죽음의 고통보다도 더 다이나믹한 생명을,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영광을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나라는 한 사람은 얼마나 미약한가!’ 하고 절망할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 속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사실 생명이 없는 것은 헛것입니다. 황금으로 뒤덮였던 솔로몬의 성전도 무너집니다. 헤롯의 궁전도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만들어진 작은 밀알 하나는 지금 전세계 인구의 몇 퍼센트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 속에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잃은 양을 구하고 기뻐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쁨은 단순하고 본질적인 기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 구원을 얻었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얻는 기쁨은 비교가 안됩니다. 이 생명의 능력을 알고 있다면 자살하거나 자신을 학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능력을 행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하러 갔다가 귀신들도 예수의 이름에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돌아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그들의 기쁨의 방향을 바꾸어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 10:19-20). 하나님께 얻은 생명 자체가 이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소중합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생명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능력의 문제로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소유의 유무와 다소로 생명을 낭비하고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세계 치고의 갑부들 중에 70대와 85세의 노인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 그분들에게 당신의 전 재산을 다 주고 젊음을 되찾는다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하면 당장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미 내게 있는 생명 자체로 우리는 세계 최고의 갑부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생의 생명을 주셨고, 독생자를 통해서 영생을 주셨음을 잊지 말고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2. 낮아짐의 영광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땅이 없으면 생명을 살리는 일이 없습니다. 거름더미가 생명을 살리는 모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떨어짐, 낮아짐, 하강의 인생곡선에 생명의 확장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신자의 낮아짐이 신앙의 상승"을 이룬다는 진리를 염소들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 위를 걷다 좁은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를 보았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또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길이라 두 마리가 다 오르고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서로 팽팽히 맞선다 싶은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올라가려던 염소가 길가에 누웠고 그 위를 밟고 위에서 염소가 내려왔습니다. 그런 다음 누웠던 염소가 일어나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폭삭 엎드리는 사람이 은총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떨어뜨린 후에 높이셔서 사용하십니다. 아니 떨어진 그 상태만으로도 위대합니다. 사람은 자신에 절망해 보아야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강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일 안하고 하나님 일만 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애굽의 왕자였다가 목동으로 남의 양이나 치는 낮아짐을 경험하고 이스라엘의 목자가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목동으로 막내로 그리고 도망자의 신세로 비참하게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으로 사용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색동옷의 귀공자를 타국의 노예로 죄수로 땅 바닥까지 떨어뜨리고 사용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최악의 그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는 땅에 내려오는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강하는 인생, 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거기에 능력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물이 떨어질 때 에너지가 생기고,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공기가 이동할 때 바람의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고, 세상을 살리고 운행하는 법칙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내려오는 순간, 내가 새롭게 빚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인생이 이렇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만하기에 낮아짐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그 길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난이 없으면 새롭게 빚어지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높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죽을 자리에 가고 병이 들고, 자식이 힘들어해야 사업이 망해가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내몰리는 것은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호출입니다. 떨어지는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원칙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자만이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 영적인 법칙을 예수님은 아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관 대신 십자가의 가시관을 쓰는 자리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손이 십자가의 거친 대못이 박히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 자리에 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것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낮아짐을 영광의 길로 아셨습니다. 하강의 길, 내리막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철저히 희망이 없는 사람인지 깨달은 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정말 인생의 진실을 알고 실력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낮아짐을 기뻐합니다. 낮아짐을 여유롭게 이길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속이 은혜 안에서 알차고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별 볼일 없는 형편이 되었는데 흉보면 못 견딥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모욕과 수치로 낮아질 때 얼마나 견디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삐지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와 밀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똑같은 가을 들녘에 가라지는 곳곳이 서있고, 밀알은 숙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신데 자기를 비유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낮아짐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여러분을 섬기고, 주차 관리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면 감동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인정받으려고 고개를 치켜세우면 너무나 닭살이 돋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 자신에게는 이것을 적용하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지금 너무나 기쁜 것은 밀알을 보면서 이런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헬라 사람들의 몇 명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헬레니즘 문명권에 세계적 위상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헬라 문명이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철학과 예술과 건축과 정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문명을 자랑합니다. 종교와 윤리의 최고점을 드러내는 헤브라이즘 문명에서도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앞 구절들에서 보았겠지만, 이미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헤브라이즘 문명권에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거대한 두 세계 문명의 주목 앞에서, 그들의 숭배 앞에서도, 그것들을 피하고 밀알의 낮아짐 떨어짐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물 중 지극히 작은 것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자신을 높이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한 알의 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수 있었느냐는 점입니다. 세계적인 꿈을 가지고 온 세상을 구원할 그 중차대한 사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것에 주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위대함은 낮아짐에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밀 한 톨에 감격하고 거기서 영광을 보고 거기에 위대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헬라의 철학이나 문화 보다 유대인의 종교적 엄숙함이나 경건성보다 밀알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밀알에 있었습니다.
워싱턴의 어머니인 메리 보울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인 마운트 버넌을 방문했을 때 평소와 다름없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문 앞까지 나가 아들을 맞았습니다. “죠지 정말 잘 왔다. 나는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단다. 반갑게 아들을 맞이한 메리 보울은 빵가루 투성이의 손을 닦으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워싱턴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더 없이 기쁜 듯 주의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머니가 과자를 만들어 주신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만든 과자를 즐겨 먹었습니다. 자, 사양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어머니가 만든 과자를 다함께 먹읍시다! 잠시 후 워싱턴은 조용히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이제 집안 일은 직접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려운 일은 하인들을 시키시고 그저 감독만 하십시오. 그러자 메리 보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내가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 수입을 늘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생각이란다. 만일 대통령인 네가 끝내 내게 일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리라고 한다면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 따위는 언제라도 그만 둘란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신앙인 어머니가 만든 자식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꺼이 낮아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높은 사람입니다.
보올이라는 여인은 대통령의 영광보다도 하인들의 마음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큰 자리보다 밀가루 빵에 주목하고 살았던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늘 이렇게 작은 것에 주목하셨습니다. 겨자씨 하나를 보여주면서 그 미래적 영광과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생명의 위대함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고대 큰 문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겨자씨에 능력과 영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인들이 와도 거기에 흔들리거나 들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광스런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만 위대한 생애가 될 것으로 착각하십니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무력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밀알 같이 낮은 사람들에게 위대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밀알의 떨어짐 속에서 위대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3. 죽음으로 사는 영광
예수님은 죽음의 영광을 아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25절을 보시면 이것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망가뜨리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본성적인 이기심을 포기한 사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자기의 이기심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광스런 죽음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1년 1월 26일, 도쿄의 한 지하철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가 철로로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금새 대중 스타만큼이나 유명해졌습니다. 그의 희생어린 행동은 일본의 어떤 스타들보다도 많이 보도 되었고, 특집 방송을 한 TV도 여럿 되었습니다.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 ·관계 인사들이 조문을 했는가 하면, 그를 기념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모금과 추모비 건립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의 영웅적 행동은 스타를 추종하는 팬들의 모방 행위처럼 곧 전염되었습니다. 며칠 뒤 철길에 누워 자살하려는 고등학생을 사람들이 뛰어들어 해냈는가 하면, 지하철에 떨어진 임산부를 살려내는 미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거창하고 화려하게 성공한 사람이 되어 큰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작지만 헌신적인 행동이 큰 영향력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수현이라는 한 사람의 값진 희생이 일본과 한국 전역에 남을 위한 희생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하나의 모범적 행동의 영향이 실로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오고 있습니다(새벽나라. 2001년 4월호). 죽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처럼 소중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자기부인, 십자가의 길, 자기를 미워하는 길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이 스승으로 모시러 찾아오고, 유대인들이 왕으로 모시려고 하지만, 고통스런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함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태어나신 유일한 분입니다.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습니다(엡 5:2). 그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위대함으로 승화되고 구원의 통로가 되는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식의 전환, 희망을 가져오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이룩한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께 보답하십니다.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실제 우리의 삶의 행복이 영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같은 시간을 죽이고 희생합니다. 육체의 고난을 감수하며 고생을 자취하는 사람이 있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린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들의 순교적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를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알프스에 사는 특이한 개미가 있습니다. 개미 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놓으면 개미는 몸으로 불을 끄는 데 전력을 다합니다. 개미의 몸이 불타면 ‘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미의 희생정신이 개미를 곤충의 왕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희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요,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입니다. 부모님의 희생의 삶은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케 합니다. 순국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가져온 것도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종들의 희생적인 삶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3. 1절의 정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일제시대 제암리 교회의 만행은 아리다 도시오라는 일본군 중위가 저지른 것으로, 이때 30여 명의 교인이 불에 타죽었다. 3.1운동 비사에 아래와 같은 여신도의 간증이 있어 일제의 만행을 알린다.
"나는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여 그 다음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들은 여러 죄수 가운데 우리들을 불러 세우고 먼저 기독교인만을 골라냈다. 우리 중에는 14명의 여신도와 3명의 여전도사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옷을 다 벗기고 채찍으로 내리쳤으며, 벌거숭이의 몸으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우리들의 몸을 돌려가면서 구타했고 담뱃불로 지졌으며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었다. 특별히 여전도사들의 수족을 묶었으며 성경을 다 빼앗고 기도는 고사하고 말조차 못하게 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욕과 조롱을 받았다."
총독부 통계에 보면 일제시대에 85개의 교회가 파괴되었고, 3,642명의 교인이 체포되었는데, 이 중 목사와 장로가 134명이 포함되었으며 또한 47명이 순교당했다.
순교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의 장례식에서 감사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한 아들이 순교자가 되는 것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순교자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칙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그 이름들이 하늘에 별처럼 빛나며 세세토록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병으로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늙어 죽든지 죽음의 고통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누군가를 구원하기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죽는 순간에도 열매를 얻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죽는 순간에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길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에 친척들이 다 구원을 받는 열매를 맺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죽는 시간이 영적 대사건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죽음을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에 최고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가장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기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마감하는 것이겠습니까?
저스틴 마터(103-165)라는 유명한 철학자이었습니다. 변증가로서 철학자로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려 여러 철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철학을 섭렵했지만 만족할만한 진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32살 되던 해 어느 날 조용한 해변을 거닐다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였으나 헛되고 헛된 인생이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나 격이 없이 대화를 나누던 중 그 노인은 저스틴의 플라톤 철학사상을 논박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저스틴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 되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믿을 수 있고 가치 있는 유일한 철학임을 알았다"고 그는 후일에 고백했습니다. 회심한 저스틴은 기독교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해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후 30여 년간 온 힘을 다해 기독교에 헌신할 뿐 아니라 널리 전파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러다 퀴니크스 학파(Cynic)의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다 모함을 받아 다른 그리스도인 6명과 함께 로마의 장군 루스티쿠스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루스티쿠스가 말합니다.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 이때 저스틴은 대답합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불신앙을 위하여 신앙을 포기할 사람은 없다" 루스티쿠스가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네가 내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너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저스틴은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문을 받고 그분의 것이 되는 것은 내가 지극히 열망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요 구원자이신 주님이 행하실 더욱 무서운 우주적 심판의 때에 확실한 신임과 구원을 얻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정죄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 목이 잘렸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기독교 진리와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 설 때 구원과 기쁨을 주는 것은 바로 이 고난임을 알기 때문이다”그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요 12:20-25 / 백장흠 목사
예수님은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식한 교리를 전달하거나 지성인들이 좋아하는 그런 말씀이 아닌,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들에서는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농촌에 가서는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바닷가에서는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대상에 맞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청중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같은 내용이라도 전하는 방법은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쉬운 말로 설교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쉬운 내용도 어렵게 표현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내용을 아주 쉽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1장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이는 굉장한 사건입니다. 어떤이가 예수님을 뵙고자 한다는 게 전해졌을 때 교훈하신 게 밀알의 교훈이었습니다. 즉,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교훈을 통하여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상관관계의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습니다. 거두려면 심어야 합니다. 투자해야 생산이 있습니다. 사랑해야 사랑을 받습니다. 어느분이 말씀하기를 “저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하신다면 먼저 그 분을 사랑해 보세요. 사랑이 내게도 돌아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공짜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57년 전에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우연히 이 기쁨을 맞보게 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많은 열매를 위하여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주역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희생만을 강요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근본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1. 생명 있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근본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죽었는데 무슨 열매입니까? 씨라고 다 싹이 납니까? 생명없는 씨앗은 아무리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생명은 신비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지내고 태어난 어린생명을 보세요. 신비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닮았다는 점입니다. 틀림없이 엄마나 아빠를 닮습니다. 눈매며 코와 입이 닮습니다. 아기를 보러 가신 분이 칭찬 들으려면 엄마 한 테는 “아니 어쩌면 애기가 엄마를 닮았네요.” 그러면 엄마가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빠 한테는 “아니 어쩌면 아빠 복사판이네요.” 그러면 괜히 좋아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반대로 말합니다. 잘못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명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예수를 닮은 데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태어났는데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를 닮았습니까?
생명은 힘이 있습니다. 봄에 솟아나는 풀을 보세요. 그렇게 단단한 땅을 적은 씨앗의 생명으로 뚫고 나옵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바 대로 적은 물고기가 살아있으면 물 갈을 타고 반대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생명을 잃은 물고기는 몸이 크다고 해도 탁류에 밀려 내려갑니다. 이게 생명의 힘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입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영적인 사람인가? 살아있다는 게 무어냐 물었더니 그 분의 말인 즉, “아직 숨쉬고 있는 거다” 그럽니다. 숨이 즉, 호흡이 멈추면 죽은 것이고 숨쉬는 순간에는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의가 숨쉬고 사랑이 숨쉬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기도가 숨쉬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숨쉬는 게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는 호흡이 힘들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 인들은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게 어렵다는 분은 죽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이 호흡을 되찾으면 다시 살게 됩니다. 살아있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살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죽었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산사람은 움직입니다. 행동합니다. 살아 있는데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봉사하게 됩니다. 전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생활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행동하여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합니다.
생명은 언제부터 있게 됩니까? 태어날 때부터 생명입니다. 영적생명은 영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있게 됩니다. 영적인 출생을 우리는 “거듭났다.” 혹은 “중생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대전도자 무디는 생일을 묻는 이에게 대답하기를 항상 나 자신에게는 생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하나는 어머니 태로부터 태어난 육신적인 생일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거듭남이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생일이 있을 겁니다. 생일은 잊지 아니하고 기념하는데 영적인 생일은 있는지요?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아노델’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1) ‘처음부터’의 뜻입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2) ‘다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아닌 다시 한다는 말입니다.
3) ‘위로부터’의 뜻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땅에서 났습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낫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것은 형이하학 적이라 이해하기 쉽지만 거듭남은 영적인 것이기에 체험적이어야 하지, 말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아니할 겁니다. 생명이 신비한 것 같이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고 귀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을 해보려고 몸부림 쳐 왔습니다. 석가는 해탈을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았고 공자는 ‘인’을, 소크라데스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를 추구하였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 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신앙인들은 인간이 무엇인가 선하게 살면 된다는 무의식적인 사고가 마음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바르게 살면 무엇이 되겠지. 오래오래 예수 믿으면 나도 구원을 받겠지?’ 그런 막역한 계산을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실제는 죽은 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죽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시체를 썩지 않게 미이라를 만들어 보관하면서 약을 발라 놓는다고 해도 영생하지 못합니다. 거듭나야 생명이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나왔다고 거듭난 게 아닙니다. 전통적인 율법을 지켰다고 중생한 게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되어야 중생입니다. 생명이 바뀌어지는 게 중생입니다. 이는 형식만 바꿔지는 것 보다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내 안에 예수의 생명으로 바뀌어져 있으면 생명 있는 그리스도 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해서 아들 딸 잘 낳는 게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여자가 생산하게 됩니다.
2.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리 생명 있는 씨앗이라도 땅에 떨어져 흙에 묻혀야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있는데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후에는 그 생명조차도 죽어갑니다. 우리 주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한 알의 밀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땅에 떨어져’ 이 말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높이고 자기 자신을 낮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단어는 Humility 입니다. 라틴어는 Humilis 인데 ‘땅바닥에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HUMUS에서 왔습니다. 안토니 불륨은 겸손은 땅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땅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땅 위에서 삽니다. 땅은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닙니다. 밟히고 밟혀도 아무 표현이 없습니다.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쓰레기도 받아들이고 오물도 조용이 받아들입니다. 햇빛도 받고 비를 맞습니다. 이런 겸손의 땅의 마음에 씨를 뿌리면 100배 60배의 결심을 맺게 합니다. 생명 있는 씨앗이 겸손하게 땅에 묻혀야 열매를 맺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1) 무엇이 겸손입니까?
(1)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겁니다.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습니다. 그가 어느날에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잡은 게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물을 깊은대로 가서 던져라 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자기 자신이 부족함을 즉시 깨닫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로 부름을 받고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약점 중에 하나는 자기를 모르고 있는 점입니다. 소경이 개천을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고 모든 게 다른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결점이 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 결점을 모르고 있다면 더 큰 불행입니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고 더 노력하는 이가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실수와 착각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실수는 고기를 먹다가 자기가 자기 혀를 씹는 것이요, 착각은 자기 혀를 고기인 줄 알고 씹는 경우’라고 합니다. 근자에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착각 속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게 교만입니다.
(2)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실한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된 것 중에 하나가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인사할 때에는 “차린 게 너무 없습니다. 많이 잡수세요” 그럽니다. 얼마나 모순된 인사입니까? 차린 게 그 만큼 되었으면 많이 차렸는데도 차린 게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모순은 차린 게 없는데 어떻게 많이 잡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전통적으로 겸손을 가장한 위선이었습니다.
(3)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게 겸손입니다. 교만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대하여 철저하게 간섭합니다. 행복하게 살고있는 부부가 어느날 이런 대화를 하게 됩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하는 말, “여보, 당신 요즈음 왜 그러세요? 당신 많이 변하는 것 아니에요?” 그때 남자가 뭐라 하느냐 하면, “다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너 때문에 내가 나빠졌다는 식, 이런 게 교만입니다. 자기는 일하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이 게으르다고 탓을 합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어느 하사관이 부대 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무거운 대들보를 올려놓기 위하여 수하의 병사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는데 지나가던 남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고함은 치는데 왜 병사들을 돕지 않는가?” 그가 왕 같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하는 말, “나는 병장입니다” 남자는 “그래요? 병장이시군요, 몰라뵈서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합니다. “병장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도우면 안되겠는지요.” 그러면서 병사들과 함께 들보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병장님, 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사람이 부족하거든 사령관을 부르시요. 제가 두 번째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게 워싱톤 사령관이었답니다. 겸손은 자기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4)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를 높일 줄 아는 게 겸손입니다.
이런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좋아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덕이 있던가요?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아니합니다. 자기는 낮춥니다. 미덕입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알바니아의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배운게 많지 못했습니다. 그는 항상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I am nothing’ 이라고 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존경합니다. 겸손히 땅에 떨어져 봅시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의 신앙자세를 가져 보세요. 모든 게 아름다워 집니다. 행복해 집니다.
2) 겸손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15:33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십니다. 이름있고 명성이 있는 분이 교회에서 주차관리를 하시는데 어떤 이는 “어이, 이 차좀 잘 대줘요.” 그럽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는 일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 본 뒤에는 그렇게 존경하더랍니다. 잠22:4절에는 겸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 하였습니다. 시10:17에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기도응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기도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2) 멸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 자기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래도 달게 받아 들입니다. 인내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3)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배우는 자세를 갖다 보면 겸손해 집니다. 배우는 사람은 잘 듣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잘 합니다. 그대로 실행하려고 애씁니다. 겸손이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3. 땅에 떨어졌으면 죽어야 합니다.
그 때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이 있고 겸손이 땅에 떨어졌다면 이제는 죽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희생이요, 우리가 잘 사용하는 헌신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런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 어떻게 하면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 토인비 박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인류역사를 연구해보면 시대마다 역사를 빛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삶에 공통점은 그 사람이 살고있는 그 시대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희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구든 그 시대의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려라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열매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누구인가? 우리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앞서가는 교회라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어떤 교회, 어느 신자가 고차원의 신앙인입니까? 여러분, 우리나라는 선진국입니까? 후진국입니까?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경제로 나눕니다. 국민소득 즉G.N.P가 만불 이상인 나라는 선진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선진국은 사회봉사하는 지수가 높습니다. 얼마나 헌신적이며 봉사하는 나라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수준있는 교회는 헌신적인 신자가 많은 교회입니다. 수준있는 교회를 보세요. 세상에서 존경받고 대우받는 사람들이 안내도 하고 식당봉사도 합니다. 수준 낮은 교회는 자기는 봉사하지 아니하면서 불평을 하고 원망을 많이 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중에 우리 성도님들에게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전 성도가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일주일을 살면서 하루를 주께 드리면서 사는 분도 계시고 매일 교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주에 한 시간 봉사해 봅시다. 그래서 교회에 오시면 한 시간 먼저 나오던지 한 시간 뒤에 가시도록 하자는 겁니다. 한 시간 앞에 나온 분들은 안내하는 일을 하던지 중보기도 하는 일을 하시고 한 시간을 예배 후에 드린다면 전도폭발도 하시고 교회 나오지 못한 이들을 심방하는 일을 한다면 대단한 결과가 생기리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됩시다. 죽는 밀알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 이기주의를 초월하여야 합니다. 내가 조금 더 편 하려고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얀마에 선교사로 눈부신 활동을 한 저드슨은 신학교를 졸업할 때에 큰 교회 부교역자로 청빙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과 기대를 갖고 그를 봅니다. 그런데 져드슨은 해외 선교의 비젼을 갖고 청빙을 거절하면서 불교의 나라 미얀마로 갑니다. 많은 이들이 주변에서 충고하고 만류했으나 그는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선교의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한 명의 세례교인을 얻기 위하여 6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열정에 불태웠습니다. 그 결과 버마에 6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생겨나고 전 세계 많은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비젼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2) 포기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교훈대로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마클레이라고 하는 젊은 설교사가 선교하다가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갑니다. 그러면서 손에 들려진 영국제 원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는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면 자신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는 영원히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끝내 맞아 죽었습니다. 원주민들이 이후에 그 총을 발견했습니다. 총알이 10발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 마을이 복음화 되었답니다. 이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입니다.
3)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랑의 대상이 내가 아니어야 합니다.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다 같은 철저한 크리스챤입니다. (2)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로 잡을 수 있는 지도력입니다. (3) 열렬한 음악광이었습니다. (4) 뛰어난 지성을 가졌습니다. (5) 인생의 황금기를 적도에서 보냈습니다. 누구 이야기 입니까? 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람바레네 병원의 알버트 슈바이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이비교주로 불리 우는 가이아나의 짐 죤스입니다.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누가 사랑을 실천하였느냐 이게 다른점입니다. 슈바이쳐는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희생을 감수하였기에 20세기 성자로 부르고있습니다. 짐죤스는 하나님을 철저히 이용하고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누가 되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이기를 우리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1)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2) 자신이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겸손하여야 합니다.
3) 죽어야 합니다.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 헌신의 사람, 봉사의 사람이 됩시다. 그럼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창조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 귀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역설적 진리
임영수 목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예외없이 물이 된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의도는 그러한 통속적인 대답이 아닌 좀 더 창의적인 답변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적인 답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기대했던 정답은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입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굳게 얼어붙었던 대지가 서서히 녹으면서 새 생명의 싹들이 돋아납니다. 봄은 생명을 일깨우는 계절입니다. 봄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봄에는 생명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땅속에서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봄은 역설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이란 말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일종의 진리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모두 내놓으셨습니다.
그는 어느것 하나도 소유할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해 온전히 내놓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설 가운데서도 역설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에 가장 큰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역설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이 역설의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되는 과정에 하나의 역설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는 사람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현실을 넘어선 저 영원한 지평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의 삶에서 감취어진 하나님의 희망의 미래가 현실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언제나 역설이라는 이성에 모순이 되는 문턱을 뛰어넘는 바보와 같은 사람의 삶에서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유월절이면 유대나라 각 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예수께서도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이방인 그리스 사람 몇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 신앙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 유대인들과 함께 성전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와서 예수님에 대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을 채찍으로 몰아내고 성전을 깨끗케 하였다는 혁명적인 소식이였습니다.
그들이 그 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소식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본래 그리스인들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민족이였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말하고 가르치는 스승을 존경하며 찾아다녔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그리스 사람들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무엇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공동체로 모시고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뵐 수 있을까? 많은 궁리를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비교적 그리스어에 능통 할 뿐만 아니라 희랍적인 이름을 가진 빌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빌립에게 가서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싶다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그들의 요청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가깝게 지내는 안드레에게 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의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습니다.
두 제자의 말을 전해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거절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광의 때란 예수께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 의해 메시아로 추대 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그리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오신 목적에 대한 답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은 골고다로 가시는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있는 그들의 공동체에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스승의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이 더 안정되고 평안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그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그리스 사람들의 공동체에 안주하면서 그의 생을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여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막강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림으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믿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구도자적 삶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터득해 보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시대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치욕, 수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 달린 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과 입가에는 비웃음과 조롱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소수의 여인들만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연민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치욕과 수치, 형벌, 절망, 흑암의 시간과 장소인 십자가에서 희망의 새 아침을 보았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역설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비유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차가운 땅에 던져지고 그것이 흙으로 덮힙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새 싹이 돋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마침내 부활의 새 아침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 역사의 장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새 생명으로 시작되는 이 현실에 참여해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되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에 새 소명의 길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야망, 욕망을 버려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밀폐된 자아의 공간에 보존해갈 때 생명력은 자꾸 약화되고 죽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내놓을 때 더욱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영원히 보존해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의 특성은 자신만을 위해 보존하고 지키려 할 때에는 죽게 됩니다.
인간이 터득한 생명 보존법은 오히려 생명을 고갈시키고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 보존법은 자기중심이란 밀폐된 공간에 생명을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빛 가운데 내놓는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졌을 때 토양이 길가와 같은 곳일 때 씨앗은 발아하지 못하고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그곳이 옥토일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자기 중심이란 밀폐된 공간은 씨앗이 발아될 수 없는 길가와 같은 곳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밀알 하나의 생명은 껍질 속에 있는 생명력 입니다. 그것이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지 못할 때 그 생명력은 죽게됩니다. 그러나 껍질을 깨뜨리고 나올 때 그 생명력은 놀랍게 자라 열매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본래의 성향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서 생명을 실현시켜 가는 일입니다. 이 생명의 흐름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것이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은 씨앗이 썩어 발아될 수 없게 만드는 독소와 같습니다. 이것들은 왜곡된 자아, 병든 자아를 만듭니다. 병든 자아는 생명의 흐름을 차단합니다. 빛을 싫어하고 대신 어둠을 좋아하고 사랑의 나눔과 교제를 모릅니다. 신뢰의 대상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흐름을 차단시키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십자가에서 종막을 고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을 자라게 하고 풍성케 하는 참된 빛을 받아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형성된 자아가 죽는 과정에는 상당한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아픔과 고통은 야망, 욕심, 허영심, 자존심이 죽는 과정에서 오는 진통입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과정은 참된 자기가 살아나는 과정입니다. 참된 자기가 살아나서 빛 가운데 머물게 될 때 그 때부터 의미있는 열매를 맺어갑니다. 그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1207 봄 어느날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돈은 홀로 말을 타고 아름다운 움브리안 시골길을 지나가면서 매력적이고도 도전적인 공상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됩니다.
"프란체스코, 네가 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네가 육신적으로 사랑하고 원했던 모든 것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것이 네 의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하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과거에 혐오하던 모든 것이 굉장히 달콤하고 더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느라 사색에 빠져있던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의 말이 깜짝 놀라서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깨어난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병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와 나병인에게 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자선금을 쥐어 준 다음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감정에 북받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전기 작가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프란체스코 자신이 말했듯이 주님이 그를 이기고 최고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나 스스로 원정을 떠나는 신앙의 기사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거꾸로 변화되었으며, 하나님의 어릿광대, 하나님의 재주꾼, 하나님의 바보가 되었습니다.
후에 프렌체스코는 "이런 방식으로 주님은 나의 회심이 시작되도록 승낙하셨다"고 썼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프란체스코의 새로운 소명은 시작되였습니다. 그 당시 프란체스코의 소명은 무너진 교회의 재건이였습니다. 그후 그에 의해 '작은 형제들'이란 수도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되어야 역설적 진리를 믿고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업적이 아니며 열매입니다. 열매는 자신이 죽을 때 나타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야망에서 생명력이 없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날 때 새 소명의 사람이 됨과 함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된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 소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김양인 목사
오늘 저는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본문은 유월절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시려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셔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맨 마지막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던 바로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자 완전히 항복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일러준 대로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란, 아빕월 십일에 어린 양 곧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을 준비해 두었다가 십사 일 해질녘에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칠한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가셨으나 애굽인들의 집은 넘어가지 않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아래로 여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애굽인의 장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유월이란 히브리어로 페사흐인데 “재앙이 넘어간다”는 뜻이고, 우리성경에는 넘을 유(踰)자에, 넘을 월(越)자를 써서 유월(踰越)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온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장자가 죽는 재앙에서 건짐 받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면하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아침 9시 십자가에 달려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며, 그 날 해질녘부터 유월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셨기에 수많은 사람이 그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맺으신 생명의 열매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한 무리의 헬라인이 있습니다. 이들을 단순한 여행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그토록 갈망한 것을 보면 필경 예수님께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백성의 열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제자 빌립을 찾아와 ‘예수님을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하고, 두 제자가 함께 예수님께 가서 헬라인들의 요구사항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주님을 따르던 자들은 귀가 번쩍 뜨였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메시아의 왕국을 세우신다는 선언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 같이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구약성경에 그 같이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보면,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인자”(人子)는 다니엘서 7장에 처음 나오는데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오는 신적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예언하기를 “13)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다니엘서에 언급한 인자(人子)는 실은 신적 존재입니다.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며,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세상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 인자가 와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유대나라의 국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기대로 한껏 부풀러 올라 숨을 죽이고 그 다음의 말씀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위대한 능력으로 로마 제국을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아 세계만국을 통치하실 때가 도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와 동일시하셨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는 말이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정치적,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유대나라를 회복하고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었으나 정작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의 생각이 너무도 다름을 봅니다. 그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과 같은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실한 신앙인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은 세속적인 승리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무속적 기복신앙과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복과 화를 내리신다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내용이 나오는데, 엿새 동안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신 후에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모든 환경을 조성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맨 먼저 하신 일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위대하고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서두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짧은 말씀 속에 “복”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복을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로써 복을 구하고 받아 누리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 비방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기복과 무속적 기복은 무엇이 다를까요?
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선이고 복은 하나님께서 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복을 받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받는 핍박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지만, 무속적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환난과 핍박을 감내할 생각이 아예 없을 뿐 아니라 오직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므로, 신앙 문제로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내부에는 소위 번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무속적 기복신앙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은 세속적인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빌리면 번영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 다른 복음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복을 버리고 세속적인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그릇된 신앙관을 갖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광은 한 알의 밀처럼 죽으므로써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보람과 영광은 유대나라의 왕이 되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희생을 통해 멸망 받을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따르려면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 시민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천국 시민의 가치관입니까? 예수님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은 물질만능의 가치관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돈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돈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돈이 넉넉하면 기뻐하지만 돈이 없으면 우울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가 죽는 편을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자기 생명을 안전하게 부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밀알은 언제까지나 한 알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차갑고 축축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집안이 화평하려면 자기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서로 제 권리를 주장하고 먼저 대접 받기만 요구한다면 가정의 화목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평화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려면 목회자를 비롯해서 제직들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먼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죽는 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죽는 편을 택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까닭은 자기만 죽고, 자기만 손해 보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무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천년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교회가 생명을 지켜 올 수 있었고, 그들의 순교의 피로 인해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겨우 열 두 척 남은 전함을 가지고 330척의 왜적을 맞이하여 싸우기에 앞서 부하 장수들을 격려하기를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 명언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며 한번 죽기 마련입니다. 백 살을 살지라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명에 애착심을 갖고 오로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데 급급한 사람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핍박을 무릅쓰고 주님을 섬기지 못하므로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 보다 주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로 영원히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르기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고 했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위해 순교를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는 진리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또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색이 기독교인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영적 축복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축복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성공하고 부하게 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시험의 바람이 불어오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최근 어느 목회 연구소가 가나안 교인 3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보았더니, 교회생활을 한 기간이 5년〜15년 사이가 43.2%로 가장 많았고, 교회를 떠난 시기는 30대가 25%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가지 않은 기간이 10년 미만인 사람이 52.6%였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 떠났다는 사람이 30.3%였습니다. 또한 언젠가는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이 53.3%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원인으로는 목회자나 신자들의 모습에 실망한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목회자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실이지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결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신자들 앞에 모범을 보여야 하나 그럴만한 실력이 없을 때 위선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선은 도금한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치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진실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신자들이 목회자를 위해 기도로 돕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허물과 실수가 있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교회를 떠난 그 사람들도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결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멸망 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성도가 되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족하고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때문에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본받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부단히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시험에 들더라도 교회 안에서 머물러서 시험을 이겨내야지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모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가출하는 자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고달픈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결단을 해야지, 교회를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지녀야 하지만, 혹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목회자를 비롯해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손색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라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신 후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는 주님을 섬기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여기 주님에게서 거부당한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 받기를 좋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존경 받고 대접 받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큰일을 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등잔은 주위를 밝힐 때 존재 의미가 있고, 소금은 짠맛을 낼 때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빛은 어디를 가든지 빛이고 소금은 어디를 가든지 소금이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곧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라면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온산에 서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든지 혹 환난의 길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처럼 되는 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 자기를 희생하고 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손해 보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생명의 원칙은 씨앗이 딸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심으로써 그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열매 맺기를 원하시므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처럼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죽을 때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히 맺을 것이요, 드디어는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이필재 목사
요한복음 12장 정도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온 나라 안에 가득차 우리말로 쉽게 말해서 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한번 만나고 싶어 하고 어떻게 해야 예수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납골당에 썩어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현장에 가셔서 그 시체가 일어나 멀쩡하게 살려내는 기적이 베다니 동네에서 일어나니 지금 나라 전체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볼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참 즐거운 비명으로 식사하실 겨를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도 아주 신이 나서 무언가는 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을 보면 헬라 왕국에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헬라 사람 몇 명이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와서 보니까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데 외국 사람으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금 헬라 왕국의 특명을 받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겁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나와 있지 않습니까? 헬라 사람 몇 명이 와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라고 시작됩니다.
왜 보려고 한 건가? 이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가? 헬라 왕국 가운데 ‘에뎃사’라는 자그마한 왕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국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왕위를 계승해야 되는 첫 번째 왕자가 문둥병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데 헬라 왕국까지 “그 갈릴리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문둥병을 그렇게 잘 고쳐준다더라.” 이렇게 소문이 난 겁니다. 그래서 왕국에서 사람을 특별히 파송한 겁니다. “가서 봐라!” 와서 보니까 사실입니다. 문둥병을 예수님이 현장 치료하면서 금방 그 자리에서 나으라고 하면 다 나으니까 지금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나라 에뎃사 왕국으로 한번 모시고 갈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만 에뎃사 왕국으로 모시고 가면 간단히 일이 끝나고 자기 사명을 완전히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어야지, 사람들이 하도 예수님 곁에 많으니까 도저히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온 국민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머리를 쓴 겁니다. “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헬라파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 빌립입니다. 빌립이라는 이름 자체가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파니까 빌립을 통하면 다소 성공할 수 있겠다.” 그래서 빌립을 만난 겁니다. “우리는 이래서 온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니까 당신이 노력해서 만나만 주면 거기에 대한 대가는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왕국에서 왔다.” 호기심이 생긴 빌립도 “와! 그런가요?” 그래서 이것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습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된 안드레한테 찾아간 겁니다. “헬라 사람들이 이래서 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줍시다.” 안드레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렇게 하자.” 그래서 빌립과 안드레가 다른 제자와 함께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고 “헬라에서 사람들이 와있는데 이런 일로 예수님을 보자고 합니다. 만나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생긴 겁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예수님이 하시는 설교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고 에뎃사 왕국을 안 갔는가? 왕자의 문둥병을 고쳐주시면 복음 전하기도 편하실 테고 대우도 잘 받으실 것 같고 제자들도 괜찮았을 것 같고, 그런데 왜 안가시고 이렇게 정반대의 설교를 하셨는가? “나 더러 오라 하지 말고 그가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너희들 왜 이렇게 흥분해서 나더러 에뎃사 왕국을 심방하러 가라고 그러느냐?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헬라 왕국의 협조를 얻어서 물리적인 파워와 후원을 받아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의 길이다. 나는 땅에 떨어져 죽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파생하는 한 생태의 원리가 이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런 요청을 하는 제자들에게 설교하시게 된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원리의 지식이란 죽어야 삽니다.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그 죽음 때문에 살아나는 겁니다. 우리 주변의 산에 나무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있던 나무들이 아닙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죽어야 합니다. 죽고 없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도록 세상의 모든 생명의 원리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세요.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반드시 죽어줘야 합니다. 그의 먹이가 되어줘야 살아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계속 죽습니다. 그 죽음 때문에 한쪽에서는 계속 삽니다. 우리가 굼벵이라든가 장구벌레라든가 보기 흉한 곤충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살려면 일단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통과한 다음에 변화되어 나오는 삶이 잠자리도 되고 매미도 되어서 하늘을 나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삶과 죽음의 생태학적 진리의 기초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설교의 특징은 바로 패러독스라는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살고자 하느냐? 죽으라! 죽으면 살리라.” 말이 일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삽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예수님은 설교를 그렇게 하십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리라.” 전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 신학에서 뭐라고 합니까?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무언가는 죽어야만 다른 한쪽에서 영광스러운 생명이 피어나는 삶의 기초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나는 반대의 길을 갈 텐데 어떡하지? 죽으러 가는 거야. 하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진리! 나는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인데 에뎃사 왕국에 가서 왕의 후원을 받으면서 왕자의 문둥병 고쳐주고 영광을 받을 것이 아닌데 어떡하면 좋겠느냐? 그래서 땅에 떨어져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이 다 죽어야 됩니까?” “그렇다.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너희도 그렇게 되고 에뎃사 왕국의 왕자도 나를 그리로 오라 하지 말고 이리 와서 나를 따르거라. 그리고 내가 주는 이 진리대로 살면 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더러 오라고 하지 말라. 나를 따르라. 내가 가는 길을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 부분이었습니다. 진리는 진리인데 따라가자니 고난스럽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핍박 부분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는 율법상으로 죽을 죄인이라고 재판에 회부해 빌라도 법정이라든가 가야바 법정처럼 시비 거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오늘 아침 교회 나오는데 나쁜 놈들이라고 소리치며 돌멩이 던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를 순교시키겠다고 끌고 가서 죽이겠다고 핍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날마다 우리 맡은 자기 사역에 충실하고 돈을 벌어서 가정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고 재미있는 일을 위해 성도들이 만나고 일상적인 그런 일을 그냥 해 나갈 뿐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문화권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내가 순교자적으로 사는 것인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진리로 내가 사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다 주어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반드시 어떤 희생을 지불해야만 되는, 그래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일들이 우리 생애에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것을 거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바로 땅에 떨어져 희생되는 밀알과 같은 자세로 신앙생활 했을 때 거기에서 파생되는 한 생명의 원리가 세상을 밝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저는 일본에 일 년에 두 번 정도 세미나를 가는데 일본은 기독교가 참 약하다고 평가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비하면 100분의 1이 될까 말까 하는 신자를 가지고 있고 발전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언젠가는 일본이 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한 알의 밀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줄만큼 숨어있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사실 한국 보다 일본이 순교자는 더 많이 냈습니다. ‘언젠가는 쓰임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일본 선교사들이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가나자와라고 하는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불교 마을입니다. 그런데 나가오마끼라고 하는 목사가 그 동네에 기독교 복음을 처음으로 들고 전도를 하러 갔습니다. 개척교회를 열었는데 조그마한 집 하나를 빌려 열심히 동네 사람들을 전도하는데 교인이 안 생깁니다. 5년 동안 똑같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일했는데도 교인은 자기 부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가오마끼 목사는 그쯤 해봤으면 집어치워야 되는데 ‘아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보내신 뜻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 부인 한명을 놓고 매주 설교를 합니다. 저도 이런 개척교회를 해봤습니다.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생겨야 그들을 상대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한명도 교인이 없는 겁니다. 주일 예배는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해야 되니 아내 한명 앉혀놓고 설교하는 내용은 참 힘듭니다. “회개하라!” 이러면 안 될 거 같고 그래서 우리는 개척교회를 할 때마다 서로 안보는 예배를 참 많이 드렸습니다. 저는 항상 허공만 바라보고 설교하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만 바라보고 예배를 드립니다. 목사가 되어 이런 일을 만나면 참 낙심이 됩니다. ‘어쩌면 이렇게 교인이 안 생길까?’ 나가오마끼는 5년 동안 했는데 교인이 한명도 안 늘었습니다. 5년 되었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그 동네 공기가 좋기 때문에 폐결핵 환자가 요양을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이 동네에 나가오마끼라는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다.” “그곳이 어디 있는가?” 가보니까 정말 목사님 한 분이 자기 부인을 한명 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잘 됐다. 내가 이곳에서 건강 회복을 하는 동안 이 교회를 나오면 되겠다.’ 그래서 그 교회를 나갔더니 나가오마끼 목사는 “이것 봐라! 5년 만에 100퍼센트 증가!” 너무너무 좋아서 신이 나서 목회를 하시는데 건강 요양을 위해 마을을 찾아왔던 신학생은 나가오마끼 목회에 너무나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이 자기 부인 빼놓고 한명이니까 아침에 자기 한명을 위해서 한 시간씩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신학생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십시오. 그리고 일본에 빛을 삼아 이 땅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자기 한명만을 놓고 한 시간을 기도하는 겁니다. 매일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인 외에 자기 한명을 놓고 설교를 하는데 마치 수만 명이 모인 듯이 온갖 열정을 다해서 열변을 토하는 설교를 매주일 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 나도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에 저렇게 열정적 목회를 해야 되겠다.’ 그러는 동안 건강해졌습니다. “목사님! 내가 여기 와있는 동안 육신 몸도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서 건강해졌지만 내 영혼도 살아났습니다. 내가 일평생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목사님이 나한테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목사님과 같이 나도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리고 헤어져서 약속대로 목사 안수를 받고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 때는 일본과 중국이 전쟁할 때입니다. 일본 사람으로서 소문에 들으니까 일본 군인들이 중국 남경에서 무차별로 부녀자, 어린 아이, 죄 없는 비전투원들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가서 보니까 사실입니다. “이게 뭐냐?” 그래서 그는 일본 사람으로서 그때부터 중국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일본이여, 회개하라! 아무 죄가 없는 부녀자들을 왜 이렇게 학살하느냐?” 그리고 일본의 죄를 온 세상에 퍼뜨리면서 “나는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지은 죄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중국을 위해서 내가 일하겠다.” 그래서 그 열정을 가지고 중국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소문이 나서 장개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약속을 합니다. 그가 누구냐? 여러분, 일본 크리스천들에게 물어보세요. “일본 크리스천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입니다. 폐결핵 환자였던 그 청년입니다. 일본 기독교가 자랑하는 인물입니다. 마침내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국 안에 살고 있는 200만 명의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의 학살을 당해야 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하지! 우리 동포를 너희가 죽였잖아? 너희들이 죽을 차례야!” 그 당시에 중국에 와있는 200만 명의 일본인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 나선 겁니다. 이때 장개석이 선포했습니다. “가가와 목사는 아시아의 빛이다. 그러므로 가가와 목사의 중국을 위한 헌신적 사역을 보라. 누구든지 중국 땅에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 그래서 장개석의 명령으로 200만 명의 일본인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다음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패전 당시 소련이 제기되었던 일본 영토 분할론! 여러분, 우리나라가 왜 남북으로 갈라졌습니까? 강대국들이 갈라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도 똑같이 소련이 “3등분해서 나눠야 한다. 홋카이도와 도오호꾸 지역은 소련이 담당하고, 시고꾸와 큐우슈우 지역은 중국이, 그 밖의 영토는 미국이 관할한다.” 소련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 그것이 결정되었으면 우리나라가 두 나라가 된 것처럼 일본도 세 나라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장개석입니다. 왜 반대했는가? 가가와 목사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는 악순환이다. 그렇게 하지 말자.” 그래서 장개석의 노력으로 일본 영토의 3등분 분할론이 무산된 겁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가와 목사의 중국을 위한 기도와 그의 노력을 아시아 평화의 빛으로 보았다.” 그렇게 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5년 동안 교인 한명도 오지 않는 그런 지역에 가서 ‘주님이 나를 보내신 뜻이 있을 거야.’ 웬만한 사명 가지고는 못 견딥니다. 한 사람의 폐결핵 환자 신자가 생기니 “이것 봐라! 여기에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한명을 위하여 하루에 1시간씩 그를 위해 기도해준 것이 그에게 그대로 나타나 일본 기독교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로 계산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영웅 심리로 남이 바라보는 큰일만을 하고 싶어 하고 많은 사람에게 환호성과 박수를 받는 일은 좋아하지만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스스로 없어지는 일은 안합니다. “그래, 우리 지금 에뎃사 왕국으로 심방가자! 왕자여, 나오라! 문둥병이냐? 깨끗해져라!” 그래서 왕자가 깨끗해져서 헬라 왕국의 넉넉한 후원을 받으면서 한번 멋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반대다. 그가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라. 안가겠다.” “그러면 뭐해야 되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아무도 못 보게 없어지자. 그러면 거기서 피어나는 생명력의 빛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던 분이 마지막에 가서는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칭찬하는 소리는 그 시간에 성경에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다 머리를 흔들며 욕하더라.” 제자들마저도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로가 아무것도 없어졌습니다. “그래, 보이지도 않고 흙 속에 묻힐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골고다 언덕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땅 속으로, 무덤으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리는 살아서 죽으면 다시 사는 예수님 말씀의 진리에 의해 복음의 빛은 살아나서 마침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다! 이 길로 우리가 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알겠느냐? 헬라에서 온 사람들을 가라고 해라! 그 왕자가 정녕 나를 만나고 싶다면 오라고 해라. 나를 따르라고 해라. 나는 헬라 왕국 에뎃사 왕에 관심 없다. 이 길을 갈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어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사는 진리! 이 한 알을 위해서 내가 일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말씀하신 다시 사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를 선택하셨는가? 왜 제자들이 원하는 사역에 가담하지 아니하셨는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사순절의 오늘이 모두 다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한 알의 밀의 신비
곽선희 목사
지난 2월 28일 어느 신문에 깜짝 놀랄 그런 기사가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친일파 70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이 친일파 계보를 보면서 저는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교육계와 나라를 위해서도 크게 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그 유명인사 가운데에도 친일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이 유명인사들이 우리가 지목하는, 지금 기억하고 있는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전쟁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은 마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그 당시에 나온 신문에 그대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독려해서 무서운 다시 못 돌아오는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이 일로 인하여 친일파라는 씻을 수 없는 이름을 가졌고 본인은 물론 그 자손들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우리 젊은이들을 향하여 이 전쟁에 나가라고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하고 그렇게 독려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8·15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으면 아니 미쳤다고 그러고 다니겠습니까? 역사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쉽게 빨리 망할 것을 모르고 일본 사람에게 붙어서 그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을 하고 반민족적인 그러한 행동을 했더라는 얘기입니다. 또 한가지는 죽음이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목숨은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음, 살고 죽는 문제는 참 심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는 이런 이야기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보세요. 부끄럽게 살기가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 창피스럽게 부끄럽게 살아남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좋았는데요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 자손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이 아버지 이름 때문에 장가도 못 가겠다 그랬어요. 한평생 그 이름이 따라다니니까요. 이 부끄러운 이름,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씻을 수 없는 거예요. 또 한가지는 죽음으로서 더 큰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죄송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한번 갑니다. 그런데 잘 죽으면 산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참 훌륭한 죽음은 많은 훌륭한 사람을 탄생케 하는 결과가 되거든요. 이걸 몰랐어요.
8·15 해방이 된 다음에 그 왜정 말기에 그 신사참배문제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신학 대학 간판도 못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육을 못 받은 집사님인데 목사님 안 계시는 시골 교회에서 이분이 전도사로 일하다가 신사참배 반대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7년 동안 고생하고 산 순교자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래 출옥을 해서 나왔는데 이분을 모셔다가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 5학년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그때 옷이 많지 않으니까 무명옷, 무명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오셔서 시간시간 일주일동안 설교하시는데 손을 딱 들고 "죽도록 충성하라."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두가 감격 감격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게 총 주제였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는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낮 공부 시간에 그때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장로님들이 "한번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아 이 옷을 벗고 배를 보여주는데요 이 가슴과 배가 만국지도 같아요. 인두로다가 지졌어요. 고문을 하면서 계속 지져서 여기가 전부 이렇게 데이고 그냥 막……. 만국지도 같다니까요. 정말 우러러 보이고 영광스럽게 보이더만요. 그 부흥회가 있은 후에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교회에 있는 목사님은 바로 사표를 내고 먼 지방으로 가버렸어요. 왜요? 그 분은 부끄럽게도 신사참배 했거든요. 죽음이 무서워서 신사참배 했는데 목사가 신사 앞에 가서 꾸벅꾸벅 했다 그 말이에요. 이러고 나니 해방되니 이게 부끄러워 살수가 있어야지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뭐 누가 얼마를 뭐 횡령했느니 누가 얼마를 수뢰했느니……. 참 나는 사실여부를 알고싶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나. 아, 좀 가난하게 살면 안되나. 그 창피하게 이게 뭡니까? 이래놓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니는 이거이거이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생명보다 귀한 것이 명예입니다. 왜 이 생각을 못하고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들어보세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진리를 이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이 생명의 진리를 믿었고 이 생명의 진리를 따라 그는 죽었습니다. 놀라운, 영광스러운 생명을 위하여 그는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건 선택적인 죽음입니다. 안 죽으려고 이리저리 도망가다가 억지로 어떻게 되어서 죽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당당하게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왜요? 그는 저 앞에 있는 영광과 많은 열매를 맺는 저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죠.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이 죽음의 끝이 아니요. 생명의 시작이요 죽음의 끝이 아니요. 이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 헬라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요청을 했다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조금 해석을 드려야 됩니다. 누가 왔을까? 이 헬라인이 누굴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게 간청해. 여기에 보니깐 '여짜온대' 그랬어요. '가서 여짜온대' 그런데 무얼 여쭈웠는지 내용이 없어요. 여기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전설이 여기 해석을 주고 있습니다. 이 헬라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에데스다 왕국의 사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데스다 왕의 아들이 지금 한센병 걸렸어요. 그래 죽어가니까 왕이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고칠 수가 없어서 소문을 듣자하니 유대 땅에 예수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는 한센병도 고친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이 헬라문화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바로 빌립입니다. 그가 헬라 말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만나서 얘기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다는 거예요. 뭘 여쭈었느냐. 여기 계시지 말고 에데스다로 가십시다. 왕의 아들의 한센병만 고쳐주시면 우리가 평생토록 왕의 고문으로 추대해서 잘 모시겠습니다. 저들은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까지 그 정보를 다 알고 왔다는 겁니다. 이 위험한데 계시지 마시고 우리 나라로 가십시다, 그랬다는 거예요. 어쩜 그럴 것도 같아요. 그래 예수님은 이 시간에 말씀합니다. 아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은 이 돌연 말씀은 어디 뜻이 뭐냐 하면 이쪽에는 에데스다 나라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세속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쪽에는 십자가의 권한이 있고 저 앞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세속적인 영광과 영원한 영광 사이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그 순간입니다. 그런 결단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결심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는 바로 결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의식이요. 예수님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 있었던 그의 소신이올시다.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는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게 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865년 아주 추운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날입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에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없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지금 갓난아이를 안고 그리고 가던 길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추위에 떨다떨다 못해서 이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다 그친 다음에 사람들이 이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자가 홀랑 벗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안고있는 아이를 살리려고 자기는 하나씩 하나씩 옷을 자꾸 벗어서 그 아이를 감쌌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아 있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착한 사람이 키웠는데 이 아이가 커서 1916년 영국수상이 됩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라고 하는 수상입니다. 그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내 대신 죽었다고 알몸으로 죽었다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고 한평생을 부모 없이 살았으나 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어느 분 하나 피아니스트를 압니다. 아주 훌륭해요. 남편도 훌륭해 보이는데 단란한 가정이에요. 그런데 밤낮 티격태격해요. 그리고 한번씩 별거했다가 또 만났다가 별거했다 만났다. 온 교회가 걱정을 해요 그 집 때문에. 그래 제가 한번 만나서 개인적으로 물어보았어요. 아니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세상에 우리가 보니 두 사람 다 좋은 여건인데 왜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했더니 대답이 재미있더라구요. "있지요." "아, 있으면 그럽시다" 그랬더니 "뭔데요" 그랬더니 "내가 죽으면 되지요." 여러분 내가 죽으면 됩니다. 별것도 아닌 거 살아 가지고 야단이요. 죽어버려 까짓 거. 어차피 죽을 건데 죽어버려. 어차피 끝난 건데 죽어버려. 그러면 되는 건데요.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 별것도 아닌 자존심, 다 없어진 그까짓 체면, 그 무얼 가지고 그럽니까. 툭툭 털어 버려. 그러면 살 길이 있어요.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르게 죽으면 영광의 아침이 옵니다. 이게 사는 길이지요. 죄짓고 부끄럽게 사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나죽고 남 죽이는 겁니다. 여기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린다. 바르게 죽으면 영생이 있다. 오늘 죽고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인도에 갠지스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지요. 거기에 어떤 노인 하나가 강둑에 앉아서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보는데 아주 유리알 같이 맑은 물에 이렇게 흘러가는데 그래 보니까 꿈틀꿈틀 하는 게 보여요. 이게 뭔가 하면 전갈 하나가 지금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요. 떠내려가면서 육지로 나와 보려고 하는데 이게 헤엄을 잘 못 치거든요. 그래서 나뭇가지를 붙들고 하려는데 그 나뭇가지도 흘러가고 있어요. 이러 모로 이러 모로 그냥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 것을 보고 이 노인이 전갈을 건져주었어요. 건지자마자 물잖아요. 아 그 다음엔 유명한 전갈 꼬리로 쏘잖아요. 그 지나가던 사람이 "노인, 아 그 전갈은 살려줘서 뭘 하겠다고 그를 그렇게 구출하려고 하는 거요. 쏘이면서……." 이 노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갈은 쏘는 것이 본능이고 나는 구원하는 것이 본능이요." 대상을 묻지 마세요. 나는 나대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에요. 희생할 것이요.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네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리리라.
성도 여러분, 현재에 죽고 미래에 삽시다. 나 하나 죽고 많은 사람을 살립시다. 순간에 죽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이것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진리를 버렸기 때문에 나라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고 부끄러운 생을 살고 저 가문도 망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얻기 위해서는 주저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알의 밀의 신비를 다시 생각합니다.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고, 죽음의 신비가 있고, 영생의 신비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 진리를 따라 살고, 이 진리를 따라 가게 하시고, 앞에 약속된 영생을 얻을 뿐더러 나의 희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그러한 영광된 삶과 영광된 미래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알의 밀알
장광영 목사 / 2002.12.11.
금년이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간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은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그리 많은 세월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짧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의 감리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계 선교역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수많은 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인물을 길러내었습니다. 수많은 병원과 봉사기관을 세웠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제 한국감리교회는 복음을 다른 나라에 나가서 전하는 선교국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복음의 열매는 결코 우연하게 열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알로 바친 아펜젤러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음과 모든 힘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자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아펜젤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까? 그가 미국 선교사임은 대개 알고 있지요? 미국 어느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해서 얼굴도 말도 다른 한국에 와서 뼈를 묻을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가 한국에 와서 어떠한 일을 하였고, 마침내 어떠한 죽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바쳤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아펜젤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대충 그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오늘 비로소 그 분에 대해 보다 더 상세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27세에 한국에 와서 17년간 일했습니다. 그리고 4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보다 11년 더 세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리 긴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한 일은 실로 놀랍습니다. 한 사람이 17년 동안 이 땅에서 한 일이 이처럼 많고 위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 인간 아펜젤러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아펜젤러를 통해 하신 일입니다. 아펜젤러가 감리교회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래의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아펜젤러의 가문은 본래 칼빈주의의 개혁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아펜젤러의 5대조가 농노신분으로 스위스에서 미국 펜실바니아주로 이주해 왔습니다. 펜실바니아주는 17세기 전설적인 청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개척한 지역으로 칼빈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였던 아펜젤러가 감리교회로 옮기게 된 것은 개혁교회 계통 프랭클린 마샬대학 재학 중이던 1879년 4월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3년 전인 1876년에 존 웨슬리와 같은 회심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입학 후 영적 불안을 느끼고 있던 중 랭카스터 감리교회에 나가면서 믿음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감리교회의 기도모임과 속회활동을 통한 경건운동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훗날 선교동역자였던 장로교회의 언더우드가 그에게 왜 감리교회로 옮겼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장로교회에서는 그렇게 외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감리교회로 옮겼지요."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교회였기에 아펜젤러는 200년 전통의 칼빈주의를 포기하고 감리교회로 옮겼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한국의 감리교회를 위한 세밀한 계획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는 프랭클린 마샬대학에 재학 중일 때부터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졸업 후 그는 뉴저지 주에 있는 감리교 계통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드류신학교는 '감리교 사관학교'로 불릴 만큼 학생들에게 경건훈련을 엄격하게 시켰습니다. 아펜젤러는 신학교 3학년 때 선교강연을 듣고 2달러 50센트를 선교비로 내면서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도 해외선교사로 나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마침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 가운데 워즈워드(Wordsworth)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미지의 나라, 은둔국인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아펜젤러는 일본선교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한국선교에 열정을 나타내던 워즈워드가 개인사정으로 선교사지원을 포기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고민하는 워즈워드를 위로하러 갔다가 그의 표정에서 "네가 대신 한국으로 갈 수 없겠느냐?"는 호소를 읽게 되었습니다.
1883년 10월 아펜젤러는 하트포트에서 개최된 전국신학교 연맹주최 선교집회에 드류신학교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의 열기로 타올랐던 이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워즈워드'대신 한국에 가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갓 결혼한 아내 엘라 닷지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이 마침 우리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미국 선교본부에 도착 소식을 전하였는데 마지막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죽음의 철장을 깨뜨리신 주님께서 이 민족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깨뜨리시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아펜젤러는 실로 한국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이 밀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닌 살아있는 밀알이었습니다. 이 밀알은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밀알은 더 많은 생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라는 밀알 한 알은 결코 한 알 그대로 머물러 있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땅에 묻혀 썩고 죽어 수많은 생명으로 태어나길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생명을 얻고자 하여 자기 영혼을 불살랐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전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펜젤러의 최후를 봅시다. 1902년 6월 그는 감리사의 일을 수행하던 중 성서번역자 모임을 위해 목포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번역을 돕던 조한규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던 이화학당 여학생을 데리고 인천에서 일본 오사카 선박회사 소유 구마가와마루호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탄 배가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군산 앞바다 오식도 근해에서 또 다른 일본 배 기소가와마루호와 충돌하여 침몰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수영도 잘하고 탈출이 용이한 일등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었습니다.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그는 3등실에 있던 이화학당 학생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때는 6월 11일 수요일 밤이었습니다.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은 실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우리 주님의 뒤를 따른 모습입니다.
그는 비록 마흔 네 살, 짧은 삶을 살고 갔지만, 한국 감리교회 개척선교사로서 그가 보여준 용기와 헌신, 충성과 희생의 삶은 그의 뒤를 이은 선교사들과 한국감리교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그는 실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기라성 같은 교회지도자들을 길러내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신학자로 불리는 탁사 최병헌, 최초목사 김창식, 그리고 이승만, 신흥우, 최재학, 문경호, 주시경 등 한국교회사와 근대사를 이끌어간 인물들이 다 그가 맺은 열매들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의 열매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오늘의 한국감리교회가 그의 열매입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 문 좌우에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증인들 가운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어쩌면 낯이 익은 외국인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아마 이렇게 쓰여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온 형제자매들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 믿음의 씨앗이요, 이 날 그의 삶을 주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되새기는 아펜젤러 선교사입니다.
그러므로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예인 우리가 그의 뜻을 기리고 21세기를 내다보면서 한국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열매를 줄줄이 맺을 수 있는 능력 있는 금호제일교회의 성도, 감리교회의 성도, 한국교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히 여기시리라
조재호 목사
어떻게 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8가지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 부자가 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둘. 유명해지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셋. 딱 맞는 결혼 상대를 만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넷. 친구들이 많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다섯.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여섯. 신체 장애만 없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일곱. 가까운 누군가가 죽지만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여덟. 세상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8가지만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외모가 멋있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에는 더욱 지배적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외모가 멋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귀하게 여김 받고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으라고 성형수술들을 하고 얼굴 개보수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외모 때문에 행복해 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공통점 중의 하나는 내가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이신 수학선생님이 학교 오고갈 때 선생님 도시락을 들고 가라는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아침에 학교로 들고 갈 때 면 반찬 냄새가 솔솔 나고 저녁에 집으로 들고 갈 때 면 덜거덕거리는 도시락을 들고 다녔습니다. 방과후에 아이들이 “얘들아! 축구하고 가자”고 하면 “안돼 나 선생님 도시락가지고 가야돼”하며 선생님 도시락을 날랐습니다. 교무실을 하루 두 번 드나드는 특권, 선생님 집을 하루 두 번 드나드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귀하게 여겨 주면 충분히 행복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1.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긴다는 말은 원어(티마오)의 뜻은 ‘값을 메기다. 가격을 정하다’입니다.
물건의 값은 그 물건의 수준이나 가치를 나타냅니다. 값어치가 없으면 값이 싼 것이고 값어치가 있으면 값이 비싼 것입니다. 흔하면 값이 싸지고 드물거나 희귀하면 값이 비싸집니다.
귀히 여긴다는 것은 값을 높게 메기는 것이고, 가격을 높이 정하는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값을 높게 메기는 것을 바가지 씌운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본 관광객을 자기 집 지하실로 끌고 가서 가짜 명품들을 값을 높게 매겨 팔았습니다. 10만 원짜리 롤렉스를 수백 만원에, 5만 원짜리 핸드백을 200만원에 바가지 씌워 팔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오래 전 집으로 찾아온 행상으로부터 꿀을 한 병 샀습니다. 아마 이것이 홈쇼핑의 시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얼마나 제주도 말을 잘하는지 그만 그의 말을 듣고 병에 든 설탕물을 토종 제주 꿀로 알고 비싼 돈을 주고 샀습니다. 보기 좋게 바가지 쓴 것입니다. 몇 백 원짜리 설탕물을 몇 만원 주고 산 겁니다.
귀히 여기는 것은 소중한 것이고 값어치가 비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부정한 마음을 가지고 값을 엉터리로 메겨서 싼 것을 비싼 것이라고 별볼 일 없는 것을 귀중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세상의 질서이고 하나님께서 메기신 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을 한 사람 한 사람 귀히 여기십니다.
막스 디몬트(미국의 역사 문필가)가 지은 “세계 최강 성공집단 유대인”이라는 책을 보면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유대인은 1300백만 명으로 비율로 보면 0.2%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 65%, 의학상 수상자 중 23%, 문학상 수상자 중 8%를 배출했습니다. 스피노자, 베르그송, 비트겐슈타인, 멘델스존, 말러, 채플린, 프로이트, 키신저...철학, 심리학, 영화, 음악, 미술, 문학, 과학, 정치 등 모든 분야에 역사적 족적을 남긴 인물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시면 값어치가 나가고 주가가 올라갑니다.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지켜 주시고 귀하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잘 되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지켜 주시고 귀하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신이 잘 되는 길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귀하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고 존중하게 여김 받으며 사는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23:12)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먼저이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최우선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새벽마다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을 먼저라고 생각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네가 내 말을 버렸음으로 나도 너를 버리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여김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고 하나님을 귀하게 여겼으며 하나님이 항상 먼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욥의 고백이 곧 다윗의 고백이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욥의 고백이 곧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시는 백성은 예수님을 섬기며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잘)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섬기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
우리는 무엇을 해서 어떻게 해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을까요? 주님을 섬기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습니다. 생각에 있지 않고 실행함에 있습니다.
주님은 섬기는 것의 핵심은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쓰러진 사람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이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고 있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1800년 동안 인류를 밝혀 온 이 빛(예수)이었으며, 그 빛은 지금까지 나를 비추었으며 아직도 나를 비추고 있다“
어느 날 길거리에게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동전 한 닢을 줄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돈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형제여! 내가 마침 가진 돈이 한푼도 없소. 정말 미안하오“
거지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저는 돈보다 더 값진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생명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목적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추수감사주일을 고척가족 전체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수첩에 이름이 있고 교적부에 이름 있는 분은 모두 고척가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믿음 생활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디서 살든지 교회에 오십시오 이사간 고척가족도 오십시오 멀리 사는 가족들 오십시오. 올해 고척가족으로 등록한 분들 모두 오십시오. 우리 가족들을 잘 인도하십시오. 교회학교 각부서 각반 아이들 학생들, 교구 지역과 구역식구들이 함께 예배드리며 추수감사축제에 참여하시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민족과 우리 교회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