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4부말씀
성경봉독 빌1:1-2
말씀
"은혜와평강"
신용대목사님
성도의교제
하나님앞에 아름답게 서 있는
축도
신용대목사님
주일 3부 집례
하혜승목사님
주 기 도 영창
다 같이
말씀교독
94번.새해(2)다 같이
송영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다 같이
하늘꿈소식 영상
하현경 아나운서
광고
새가족환영 집례자
성도의교제
담임목사님
찬송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다 같이
찬양
임마누엘성가대
성경봉독
사62:6-9(구p.1044.)
하혜승목사님
말씀의 증언
성령님으로 일하게 하라
담임목사님
결단의 찬송
세상 모든 민족이
(하늘꿈164)다 같이
파송의 기도
담임목사님
축도
담임목사님
축도송
임마누엘 성가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영국의 철인 수상으로 알려진 세계대전의 승리한 윈스턴 처칠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노력하라. 체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야말로 잠재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 라고 했다. 그만큼 인생에게 있어서 노력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노력한 만큼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은 프로 바둑기사 이창호 9단이 바둑계에 남긴 다양한 업적만큼 뛰어난 어록도 세상에 남기고 있다.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 “재능을 가진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은 노력 뿐이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천재라고 칭송받던 그의 인생은 노력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때로는 실수하고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기에 어떤 칭송을 받아도 자신을 조심하고 단속하는 데 힘써왔던 것이다.
우리가 쓰는 “조심이라는 한자는 '잡을 조'와 '마음 심'을 쓴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을 다 잡는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위기'에 대한 인식이라면 '조심성'은 그 인식 이후에 경계 하는 마음가짐이다. 겉으로는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두려움과 조심성은 크게 다른 것이다.”
항상 노력하고, 나 자신을 조심하며 다스린다면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노력한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인생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큰 업적과 달성을 위해서만 필요한 마음가짐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크고 작은 일에 전부 필요한 마음가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번의 도전
어느 어린 아들을 둔 젊은 아버지가 어느 날 지기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아들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온전히 온 정신을 모두어서 집중력있게 게임을 하던 아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앗싸! 좋았어!” 하도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에 게임을 하던 중 이 아들이 게임에서 이겼나 싶어 아들의 게임 화면을 슬쩍 봤다. 그런데 화면에는 ‘FAIL’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런 아들이 이상했다. 그래서 게임에진 아들에게 아니 게임에서 졌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그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들, fail이 무슨 뜻인지 아니?” 의아해 하면서 묻는 아빠에게 “아빠 저도 알아요. 그거 실패라는 것이 잖아요. 그래서 나는 더 좋아요. 실패는요.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는 거잖아요.” 라고 의아해 하며 묻는 아버지에게 대답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어떤 일의 실패는 바로 그 일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 번의 도전으로 성공을 이룬 사람은 거의 없다. 성공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 하면서 그 실패 끝에 '다시 한번 도전한 사람' 들이다. 그러기에 실패는 끝이 아니다. 실패를 밑거름 삼아 다시 한번 도전할 할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기회인 것이다.
미국의 흑인 여성으로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서 성공한 방송의 앵커인 '우디 앨런' 은 이렇게 실패를 우리들에게 설명한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건 새로운 일을 전혀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 라고 말한다. 어제 까지 실패했는가? 그건 바꾸어 말하면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새해도 힘차게 나가자
2020.1.8.광은기도원 집회중
하늘꿈교회 신용대담임목사님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출 20:18-21)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계속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약속하신대로 3일 후에 강림하셔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우레와 번개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은 더욱더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 백성들이 모세에게 부탁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중재자로 세우셨지만, 백성들은 늘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직접 강림하셔서 모세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출 19:9).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보니까 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은 택함 받아 믿던 믿지 않던 ‘죄인들’입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앞으로 무조건 나아가면 죽음을 당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하는데, 어느 누구도 법궤를 만지거나, 열어보면 죽게 됩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독한 종기와 재앙으로 죽거나 종기에 고통을 당하였고(삼상 5:6).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오만 칠십 인이 죽음을 당하였고(삼상 6:19). 웃사는 흔들리는 ‘법궤’를 만지자 즉사하였습니다(삼하 6:6~7).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셨듯이, 죄인인 우리들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직접 인도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들의 중보자로 오신 것입니다.
■ 백성들에게 대답하는 모세의 말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20절)고 합니다.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순종하지 못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불순종하고 원망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서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문제를 해결 받으면 또 다시 다른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문제를 해결 받으면 금방이라도 믿음이 커질 것 같고, 다시는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어떤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함께 믿음 생활하는 식구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믿음의 길을 가기 때문에 같은 영의 세계를 지배하는 마귀의 유혹을 이 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나 지금이나 앞잡이들을 세우고 주동자가 되게 하여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중보자요, 지도자를 원망하게 하고 한사람에서 전체로 퍼져 나가게 합니다. 그 원인자는 바로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20세 이상으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전부 광야에서 죽게 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가정 안에서 작은 불씨부터 꺼야합니다. 직장생활, 친구관계, 자녀와 손자들에게 바르게 믿음으로 가르치고 이웃관계에서도 이간질 하는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말을 듣지 않으면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다시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이 쉽게 넘어지고 죄를 짓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당연히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범죄 하지 않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자신들이 요셉에게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범죄 한 일이 있으면 이처럼 두려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에 대한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두려워하는 백성들입니까? 아니면 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는 모세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을 향하여 “할렐루야!”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가 될지언정 두려움으로 멀어져 가는 성도가 한사람도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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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출 20:1-17)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옛날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을 제시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단지 신자로서의 행동강령이나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제 1계명을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신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제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4-6절)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을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을 부를 때 비록 그 이름이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을 대신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1,2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지만,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것으로 간주하시며 3~4대까지 그 죄를 갚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은혜는 무궁함을, 죄를 갚음은 3~4대만 지나도 그 가문은 없어지게 되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제 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7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사용한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8-11절) 안식일은 엿새 동안 일하고 먹고 살았던 모든 것이 우리가 일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며 보여주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언제나 변함없어야 합니다.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12절) 이 말씀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하나님은 그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장수의 축복은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13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의 생명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배후에 함께하시는 하나님까지 같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14절) 부부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관계요, 서로가 선물로 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현재의 남편과 아내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부부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면 그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제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15절)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도전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제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16절) 거짓 증거라는 것은 이웃에게 해를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받은 한 형제, 자매됨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한 몸으로 대해야 합니다.
제 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17절) 이웃의 것들을 탐낸다는 것은 함께 나누며 살 마음이 없다는 것이며, 시기와 질투가 이미 그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고, 아름답게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의미를 은혜로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법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십계명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십계명이 곧 하나님의 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의를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십계명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는 죄인임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고 은혜로만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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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게 다시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출 19:16-25)
3개월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더 강한 관계, 확실한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19장은 언약체결을 위하여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을 준비하게 하시고, 백성들은 순종하여 삼일동안 준비하였습니다. 경계를 정하여 하나님 임재의 장소에 절대로 가까이 올수 없도록 여러 차례 경고를 하셨습니다. 모세와의 대화 속에서 약속하신 강림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강림하심이 필요한 이유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떨었던 대상은 애굽 왕 바로, 홍해, 사막, 목마름, 굶주림, 아말렉의 공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상대가 있음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광대하고 위엄 있는 분인지 감성적으로 느끼며, 만약 순종하지 않는다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실존적 자아가 느껴졌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엄을 경험한 자는 그 앞에서 떨게 됩니다.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머리로는 그 분이 계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기들 앞에 실존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분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신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 직장, 돈, 가난, 질병, 소외, 배반, 전쟁, 지진, 재해, 죽음 등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임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경험은 우리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하고 더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
산꼭대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다시 경고하셨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려고 올라오지 않도록 주의시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경계를 세웠고,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주의를 주었으니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들입니까? 성인들입니다. 한 번 말했으니 다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산에 가서 직접 얼굴을 보아야겠다고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사장도 자신을 성결하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 한 사람에게는 그 경계선을 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자격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를 짓고 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엡 2:14, 히 10:19-20).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듣고 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해야지 죄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돌격하십니다. 우리 모두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와 같이 듣고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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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출 19:7-15)
모세가 백성들과 장로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자, 장로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하였는지 아느냐?” 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누구도 얼굴을 대면하여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었어도 하나님은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명확히 듣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인 것을 영원히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대화중에 모세는 백성들과 장로들의 대답을 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려 갈테니 나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하게 하고, 3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맞이할 때 그냥 있는 그대로 만나지 말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성결”이고, “3일을 기다려라.”하는 말씀입니다.
1) 성결하게 하여 맞이하라…하나님의 ‘거룩함’ 과 인간의 성결 ‘거룩’은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영역이며, 하나님 자신의 품격과 품성입니다. 인간이 ‘거룩’ 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민 이스라엘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선언하셨습니다. ‘성결’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필수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옷을 빨라’고 하셨습니까? 옷을 빠는 일을 통해서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인식하게하기 위함입니다. 선민이 되었지만 늘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옷을 빠는 3일 동안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특별한 일이고, 사는 목적이며, 가장 기쁘고 좋은 일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초대하시고, 그들을 향해 거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성결하게 해라. 그러면 구원해 줄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어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들을 향해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백성 되었으니 거기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빨면서 지난 과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방신을 섬기던 일들, 애굽의 가치관, 풍습, 문화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게 행했던 일들, 지난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옷을 3일 동안 빨면서 지난 모든 잘못된 것들을 기억하면서 씻어버렸을 것입니다.
2) 절제하며, 인내하며 기다려 맞이하라…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부 관계를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정당한 부부간의 성관계를 죄악시 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식을 목전에 둔 백성들로 깨어서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바울도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합의 상 얼마동안 하라.”(고전 7:5)고 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예수님의 부친 요셉, 세례 요한은 모두 절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절제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육신의 정욕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옷을 빨았고, 성결하게 하고,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본문 12-13절을 보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뵈올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러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준비하는 시간이라도 경계선을 정하여준 산에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다가 넘어지거나, ‘모세는 되는데 난 왜 안되냐?’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3일간의 성결의 시간을 주시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겸손하고, 성결하게 하고, 절제하며, 기도하며 기다린다면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마음과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릴 줄 알고,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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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출 19:1-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3개월만에 4번째의 장막을 치게 되었는데, 그 산은 광야의 맞은편 산, 시내산 또는 호렙산이라고 부릅니다. 전에 모세는 이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한 후 이제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내가 10가지 재앙과 홍해와 광야에서의 인도하시고, 독수리의 날개로 이스라엘을 업어 이곳으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3-4절). 독수리는 새끼를 비행훈련을 시킬 때, 새끼를 절벽 끝으로 밀어냅니다. 새끼 독수리가 땅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급강하해서 두 날개를 쫙 펴서 새끼를 받습니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면서 새끼를 훈련시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 삼으시려고 구원하셨는데, 그 일을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두 날개로 업어 올린 일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3가지의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 세상이 다 내게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는 말씀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이 세상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 논밭, 사업체를 자기 이름으로 해놓고, 자신들이 무엇을 이루고 해내는 것처럼 떠들고 나타내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원하시는 대로 인도해 가십니다. 세상은 권력자가 통치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21장 1절 말씀을 현대어성경은 “임금의 마음도 여호와께서 이끄시는 물길과 같아 그분 생각대로 이끄신다.”고 했고, 메시지성경은 “훌륭한 지도력은 하나님이 조절하시는 수로와 같다. 그분의 목적에 따라 물길을 돌린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 되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하고, 재물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며, 감동과 은혜로 써야 합니다. 대구의 어느 교회 청년들은 매월 3일씩 ‘덜더운동’을 하는데 “덜 마시고, 더 구제한다. 덜 먹고, 더 선교한다. 덜 자고, 더 기도한다. 덜 놀고, 더 봉사한다. 덜 보고, 더 읽는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 내 말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계의 주인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소유’는 ‘특별한 기업, 보배’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에 입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은 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경험이나 지식을 앞세우며 자기 고집을 세우고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 때로 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며 형제(마3:35, 눅8:21)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처음 만날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5)는 말씀에 의지하여 빈 배가 가득하도록 고기가 잡았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잘 한 것은 바다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 기적을 체험하는 비결이었습니다. 내 경험, 지식, 능력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지키는 자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유요, 특별한 기업으로 삼으십니다.
■ 너희는 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선전하지 못합니다. 제사장의 헬라어의 뜻은 ‘다리 놓는 자’입니다. 원수 된 나라, 타락한 백성들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었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구별되어야 합니다. 옷 입는 것, 먹는 것, 주거 문화로 구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성도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서 안 되는 것이,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는 드리는 것이 예배당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주인, 밖에서는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게 되고,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자기에게 조금 손해가 되면 참지 못합니다.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희생,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려고 불러 주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벧전 2:9). 이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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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편하게 하는 와이파이의 교훈
현대인에게 있어서 생활의 한 모퉁이가 되어서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하는 문명의 이익이 있다면 당연히 와이파이 라고 할 것이다. 세상에 어디를 가도 와이파이는 통용되고 있는 인간에게 주는 값진 혜택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 와이파이의 명칭은 ‘Wireless Fidelity’를 줄여 만들어졌다. 와이어리스는 선이 없다는 의미이고, 피델리티는 충성을 의미한다. 전자 용어로는 충성보다는 충실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연결된 선이 없더라도 유선 랜을 연결했을 때처럼 신호를 재생하는 것이 바로 와이파이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아도 늘 충실하게 나타내는 것이 와이파이의 정신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활동적이지도 않고 앞으로 잘나서 지도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충실히 일하는 사람. 일할 때 없으면 허전하고 불안하고 있으면 마음 편하고 든든한 사람. 어찌 보면 와이파이의 정신처럼 충실한 사람이다. 당신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아마도 더 많은 행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8세기의 영국의 최고의 설교가로 인정 된 시드니 스미스는 "자신의 본성이 어떤 것이든 그에 충실하라. 자신이 가진 재능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마라. 본성이 이끄는 대로 따르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에 나는 정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인정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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