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눈먼 이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눈먼 이가 구원받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구원을 주십사고 이렇게 청하라고 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그리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는 청하라는 예레미야서의 권고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예언자의 권고를 듣고 그대로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청하는 눈먼 이와
잠자코 있으라며 꾸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청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얘기이고,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청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눈먼 이는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비를 청하는 데 반해
우리는 눈멀지 않은 것 때문에 청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자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자문해봅시다.
볼 수 있어서 자비를 청하지 않는 사람과
볼 수 없기에 자비를 청하는 사람 사이에 누가 옳고 누가 궁극적으로 행복합니까?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다고 믿고 청하는 사람이 옳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눈이 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청하지 않는 사람은 눈멀지 않은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제가 그런 사람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 나이에도 다른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성인병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진정 두렵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건강하기에 자비를 구하지 않는 것보다
구원을 청하지 않는 나는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자비를 청하는 것과 구원을 청하는 것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열 나환자가 같이 자비를 청해 치유 받았지만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입 싹 닦은 데 비해 이방인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드렸지요.
자비를 받아 치유 받은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자비를 받았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치유의 자비를 받고도 치유만 발생하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에게 하느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치유자 또는 의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아홉 유대인처럼 입 싹 닦고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병원에 가 돈 내고 치유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것으로 인해 의사와 평생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자비와 함께 구원자 하느님을 만난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본보기이고,
자비도 받고 구원도 받는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자비만 받고 구원받지는 못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