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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문(羊의門) 교회 앞 오르막을 지나면 성곽이 다시 보인다.
사진: 성곽시작점-양의문교회 지나서.
길은 안팎 양쪽으로 다 나 있는데 바깥으로 돌면 성곽을 제대로 보고
안쪽은 성벽은 별로지만 도성을 굽어보는 맛이 있다. 이번은 바깥으로 돈다.
사진 : 성곽시작점 부근
길을 죽 따라 오른 쪽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다.
암문(暗門)이 나오고 앞에 차들이 무질서하게 가로 막는다.
개념 없이 세워둔 차를 피해 올라가면 탐방로는 그런대로 나 있다.
그러다가 앞을 철책이 가로 막는다.
사진: 성벽탐방로를 막은 철책
저거 타 넘으면 법규 위반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다.
아래 쪽 소공원으로 돌아도 길 없기는 마찬가지니 그냥 넘었다.
이렇게 계속 걸을 수 있는 길을 왜 막아 놓았을까?
성곽 따라 걸으면 돈도 안 들고 참 괜찮은 걸 모르는 인물들이 펜대잡고
행정 보는 탓일 게다. 그런 면에서 문화재탐방 저변확대가 필요하다.
성곽은 인왕산을 휘감아 돈다.
사진: 성벽과 인왕산
고개를 뒤로 돌리면 남산이 보인다.
사진: 성벽과 남산
그런데 이번에는 옹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사진: 성곽 탐방길을 가로 막은 옹벽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몸을 날려 옹벽을 넘을 수는 없으니 왼쪽으로
100 여 미터 돌아가야 한다. 위쪽으로 올라가 다시 오른 쪽으로 가면
성곽 안으로 길이 편안하게 나 있지만 바깥 쪽으로는 잡목만 우거져 있다.
그러나 헤쳐 나갈 수는 있기에 바깥으로 길을 잡았다.
여름 철이라면 나뭇가지와 덤불이 우거져 제법 곤란 할 것이다.
관청에서 조금 신경 써서 나무는 그냥 두고 가지만 쳐 주면 좋을 텐데.
돈 들여 길 닦을 필요 없이 취로사업 인력만 잠시 돌리면 될 일이다.
이렇게 비 맞은 중놈처럼 군정거리며 나무 가지 사이를 헤치고 나가다가
곧 왼쪽으로 작은 계곡 너머 묘하게 생긴 바위와 암자 같은 것이 보인다.
바로 선바위와 국사당이다.
사진: 선바위와 국사당
국사당(國師堂)
중요민속자료 제28호, 종로구 무악동 산2번지 12호
조선 태조와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있는 무속신당(巫俗神堂)이다.
태조 4년 (1395)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목멱신사
(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국사당은 1925년 까지는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세우기 위해 이해 7월 지금의 인왕산 중턱으로 옮긴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무당들이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지노귀굿(오구굿, 씻김굿
등을 한다. 국사당 주위에는 기자암(祈子岩)으로 이름난 선바위(禪岩)가 있고
암자가 여러 채 있어 서울 무속신앙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국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 제 17호로 지정된 여러 무신도(巫神圖)가 있다.(안내판에서)
목멱(木覓)은 우리 말 ‘마뫼’의 이두식 표기라고 이전 글에서 쓴 바 있다.
실록을 찾아 보니 과연 안내판에 적힌 대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태조 4년(1395 을해) 12월 29일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 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 으로 삼아….
일제(日帝) 부분은 일본인들이 조선신궁을 식물원 자리에 지으려는데
그 꼭대기 산 위에 지저분한(?) 잡귀 모시는 사당이 있으니 기분이 덜 좋아
이리로 옮기게 했다는 이야기다.
굴러온 돌-일본 귀신 아마데라스 오오가미(天照大神)가 박힌 돌-우리 남산신
(목멱대왕)을 빼버린 꼴이니 말이 좀 안 되지만 그러게 누가 나라 뺏기랬나?
왜 우리가 일본 동경을 차지하여 황거(皇居) 앞에 총독부를 세우고
또 야스구니 신사(靖國神社)를 옮기고 그 자리에 단군신당을 짓지 못하고,
반대로 왜놈들이 조선 총독부를 건립하여 경복궁을 답답하게 가로 막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방향으로 역사(歷史)가 진행되었을까?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런 소박한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다 못 배웠느냐는 비아냥을 안사람에게 들어가며
천날만날 역사 책 끼고 돌아도 잘 모르겠다.
일제 덕에 이만큼 발전했다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이야기나 만나고 있다.
안내판에 중요민속자료인 여러 무신도가 있다고 적혀 있지만
문이 잠겨 있어 들여다 보지는 못 했다.
국사당 밑으로는 절-인왕사(仁旺寺)가 있고 위 쪽으로는 선바위가 있다.
으음.. 여기 절 이름은 성할 왕(旺)을 쓰는군.
임금 왕(王)자 쓰는 仁王 인데 일제가 심술로 仁旺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은
고려의 가치가 별로 없는 듯 하다.
선바위(禪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 4호
부인들이 이 바위에서 아이를 기원하는 일이 많아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한다.
모습이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전설과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위는 선바위 안내판 내용 중 일부다.
참선의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로 불렀다고?
어째 견강부회(牽强附會) 냄새가 난다.
한자로 쓰면 폼나고 우리 말은 비루하게 여기는 갑갑한 전통이 있다.
이것도 먹물이 좀 들어간 무리가 제 딴에 우아하게 바꾸어(아화 雅化)
붙인 것 아닐까? 방방곡곡에 있는 입암(立岩), 입석(立石) 중 하나로
아득한 옛날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선바위’라고 했을 것 같다.
선바위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더 있다.
옛 문헌에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고자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길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 이라 하니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했다.
이에 무학이 탄식하며 '이제부터 중은 선비 책보따리나 지고 따라 다닐 것이다'
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운운
이런 전설 내지 신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옛 문헌에 ‘ 어쩌고 하면, 더욱이 앞 부분에서 태조부부를 닮았다는
전설 운운한 다음이면, 이 부분은 마치 fact 같은 인상을 주지 않나?
옛날 책이라고 다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록부터 정감록 류 참서(讖書)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다.
전설로 처리하던지 아니면 무슨 책인지 소자출(所自出)을 밝혀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설이라고 까닭 없이 생길 리는 없으니
한양성 축성을 둘러 싼 논쟁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지 모른다.
위 사진은 인왕산에서 본 무악(안산-길마재)다.
현재는 인왕산에서 바로 서대문 쪽으로 성벽이 벋어 있지만, 길마재 쪽으로
내어 쌓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무악 정상까지 올리는 것은
너무 심하고, 중간쯤 가다가 필자가 파란 선으로 그은 대로 틀어서
약현(藥峴), 서울역 뒤를 지나 남산으로 가자는 안(案)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선바위가 성곽 안으로 들어오게 되나, 성이 너무 넓어진다.
현재대로 선바위를 바깥에 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쨌든 논의야 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게 전설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선바위에는 절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데 제단에도 무속금지라고 써 있고
근처 곳곳에 무속(巫俗)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경고문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떠들지 말거나 불 조심하라면 몰라도 무속금지라니?
고등종교 경배(敬拜)행위와 무속을 가르는 기준점이 있긴 하나?
꽹과리 치면 무속이고 목탁 치던가 통성으로 기도하면 종교인가?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기도하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곧 응답 받을 것 같이 암시하는 설교에 차이가 있나?
다시 성곽을 따라 산을 올라가면 제법 오르막이 심해지며 줄을 잡아야
하는 곳도 나온다. 그것도 잠시 초소가 나오면 정상 능선부가 시작되고
답사는 성벽 위를 따라 걷게 된다.
사진: 성벽
무악(毋岳)
이제 서쪽으로 무악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무악(毋岳)은 달리 안산(鞍山), 기산,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 모악(母岳),
모아재, 모악재, 무학재, 무학현, 사현(沙峴)이라고도 하고
현저동에서 홍제동 넘어가는 고개는 길마재-한자로 안현(鞍峴)이다.
기산(岐山)은 제갈량이 칠출기산(七出岐山)했다는 그 기산에서 딴 것이리라.
무악 이름에 대하여 인터넷에 있는 서울시청 관광과 자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안산(鞍山) : 동봉 서봉 두 봉우리 모양이 말 안장-길마 같다고 붙은 이름
길마재 :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 한자로 안현(鞍峴)이다.
남사고 (조선 명종 때 학자.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 :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 안산이 있으니, 반드시 당파가 생기는데
駱'은 '各馬'니 동인은 갈라지고, '鞍'은 '革安'이니 서인은 혁명한 후에야
안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모악(母岳) :
풍수지리로 볼 때 북한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므로
그를 막기 위해 안산을 어머니 산이라고 모악(母岳.).
안산 남쪽에 떡고개가 있고 남산 동쪽에 벌아령(伐兒嶺)이 있으니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나가려는 어린애를 꾀이고, 또는 때리겠다고
얼러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함.
모아재 :
양편에 밤나무와 수풀이 무성하여 호랑이가 출몰했으므로 고개를 넘으려면
사람을 모아서 넘어가 ‘모아재’ 라고 부르던 것이 ‘모악재’가 됨.
무학재 또는 무학현(無學峴)
도읍을 정할 때 하륜(河崙)이 무악 남쪽을 주장하였으나 명당이 좁다고 반대.
이에 태조가 무학대사를 데리고 다시 답사하였으므로 이라 하기도.
사현(沙峴)
모래바람이 불었다는 설과, 무악 북서쪽 모래내(沙川)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
이상 제법 길어 지루할 수 있나 필자는 이런 것이 재미있다.
무악의 다른 이름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꼭대기에 봉수대(烽燧臺)가 동, 서 두 군데 있었다.
현재 복원한 동쪽 봉수대는 옛 제 3 봉수로(烽燧路) 곧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 봉현을 거쳐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에 전했다.
서봉수대는 동봉수에서 100m 떨어진 군부대 통신탑 자리라고 추정하는데
제 4 봉수로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서해안 바다를 따라와 파주 교하를
거쳐오는 신호를 받아 역시 남산으로 보냈다.
이괄(李适)의 난(亂)
인왕산 기슭에서 싸움구경을 신나게 한 때가 있었다.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고 그 1년 후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성에 들어왔다. 조선 역사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성공한 쿠데타는 빼고)
때에 도원수 장만이 관군을 끌고 쫓아 와 안산(무악)에 진을 쳤다.
정예부대는 모두 이괄 예하에 들어 있어 관군은 약했다.
이괄은 서울 사람들에게 장만 군대를 무찌르는 장면을 구경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 들어 인왕산부터 남산까지 이르는 성벽에
구경꾼이 마치 흰 빨래를 널어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고 초장에는 이괄 군대가 관군을 삼킬 것 같았다.
그러나 싸움이 한참인데 갑자기 서북풍-무악 쪽에서 강풍이 몰아쳤다.
말로는 정충신이 고춧가루를 바람에 흘려 보내 이괄 군대가 눈을 못 뜨게
만들었다는데 하여튼 전세가 역전되어 반군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패한 이괄은 수구문-광희문으로 빠져 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 지나
이천까지 도망갔다. 여기서 부하 기익헌, 이수백이 이괄,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고 만다.
인왕산
인왕산 그 장엄한 암봉을 나타내기에는 필자 사진이 까칠하기만 하니
겸재(謙齋) 그림으로 다시 본다,
인왕제색 (仁王霽色), 영조27년 (1751), 종이에 먹, 138.2 X 79.2 cm
국보 제 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제(霽)는 비 갤 제다.)
저 바위에 치마 한 폭을 널어 놓으면 구중궁궐 경복궁에서 보일까?
따지지 말자.
인왕산은 도성의 우백호(右白虎)다.
백호인 인왕산은 우뚝한데 비해 청룡인 낙산은 산세가 약하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맏아들, 우백호는 중서자(中庶子)를 가리킨다.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삼자고 했으나,
정도전이 임금이 마땅히 남면(南面)해야지 동쪽을 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여
오늘 날과 같이 도성이 앉았고 조선 왕조는 대대로 맏아들이 시원치 않았다나?
태조 인생상담이라면 몰라도 조선 초기 그 기세등등한 주자학자들 상대로
중이 감히 정책 그것도 반대 토론을 벌였을 개연성이 있을까?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인왕산에서 본 도성(都城)
도성을 내려다 보면 좌청룡, 우백호고 간에 현재대로-소위 정도전 안 대로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공간 이용에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벽련봉(碧蓮峰)
정상에서 창의문(자하문)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요즈음 멋대가리 없이
기차바위로 부르는 벽련봉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사진 : 인왕산 내려오다가 찍음. 오른 쪽 아래로 성벽이 있고
한 가운데 암벽이 벽련봉(기차바위)다. 멀리 북한산(삼각산) 연봉이 보이고
중앙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도성 어디서나 지표가 되는 보현봉(普賢峰)이다.
벽련봉에는 부침바위가 있는데 겸재 그림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창의문 (彰義門), 영조31년 (1755) 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0cm,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위에서 왼쪽으로 인왕산 자락이 내려오고 오른쪽은 백악(북악)이다.
두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창의문 문루가 있다. 창의문 위쪽 거대한 암봉이
벽련봉인데, 그 위 둥근 공 같이 생긴 바위가 부침바위다.
최완수 선생은 겸재 그림을 해설한 책 ‘한양진경’에서
“..이 부침바위는 지금도 있다. 그러나 보는 이의 눈에만 보인다 ! “
라고 꼭 선문답 같이 쓰고 있다.
세상에 …..보는 이의 눈에만 보이는 게 어디 있나?
겸재 당시는 산이 헐벗어 기슭에서도 부침바위를 볼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나무에 가려서 바로 코 앞에 가야만 겨우 볼 수 있다.
사진: 부침바위-요즈음 해골바위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서성(西城)
인왕산에서 북악으로 걷다 보면 성이 세 군데가 보일 때가 있다.
멀리 북한산에 걸쳐 있는 것은 북한산성이고
서울을 끼고 도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양 도성인데
인왕산 동북쪽 기차바위-벽련봉 쪽에서 북한산 비봉에 걸쳐 또 성곽이 있다.
이것이 서성(西城) 일명 탕춘대성(湯春臺城)으로 숙종 때 쌓은 것이다.
사진: 수선전도에 나타난 도성(都城)과 북한산성, 두 성을 잇는 서성(西城)
홍제동에 있는 홍지문(弘智門) 일명 한북문(漢北門)은 이 서성의 문이다.
기차바위(벽련봉) 갈림길에서 창의문까지는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
내려오면서 계속 맞은 편에 백악(북악)이 보인다.
사진: 인왕산에서 본 백악(북악) 오른 쪽 자락에 청와대가 보이고
정면 중앙 아래에 학교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필자의 모교다.
백운동(白雲洞)
거지반 내려오면 오른 쪽으로 지금 청운동이 되었으나 옛날 백운동이라
불렀던 골짜기가 보인다. 청운동은 청운초등학교 부근 청풍계와 이 백운동
둘을 합쳐 지은 이름이다. 백운동은 계곡이 깊고 개울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꼽히던 곳이다.
사진: 겸재 정선의 백운동(白雲洞), 영조31년 (1755) 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0 cm, <<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백운동 위에는 지금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이어 창의문이 보이는데
창의문은 다음 북악산 구간 탐방할 때 해설하기로 하고 이 구간 탐방 길을 구글에 나타내 본다.
출처 :구룡초부 옮긴이: 유랑아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