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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토론장에 올릴까 하다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에 관한 부분도 있어서 백제게시판에 올립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에 관한 연구는 한국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란 이야기가 많더군요.
日本 前方後圓墳과 橫穴式 石室 (일본 전방후원분과 횡혈식 석실)
河上邦彦(카와카미 쿠니히코-일본 카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원구(圓丘)와 방구(方丘)를 접합한 것처럼 보이는 전방후원분이라는 분형은 동아시아의 극히 일부 지역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시점을 바꾸어 원분이나 방분을 이은 더블마운드․트리플마운드라는 면에서는 동아시아에 넓게 분포한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한대에 衛靑墓(전방 후원형), 霍去病(장방형), 陽伝公墓(장방형․방분의 연결), 周三公墓(쌍방중방분),打虎亭墓(쌍원분) 등이 있고 , 당대에는 李靖墓, 李勛墓 등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황남동고분군 등에 쌍원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의 마운드에 묘실(매장)이 있어, 본래는 독립한 고분이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열도내의 더블마운드 고분 즉 전방후원형은 커다란 분구쪽만 매장시설을 가진 것으로 두 고분의 결합이 아니고 한 고분의 분형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수한 분형의 성립에 대해서는 아직 그 해답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 묘제의 영향이라는 설도 있는 반면, 야요이 시대에 그 전신이 있다고 하여 독자적으로 성립하였다는 설도 있다.
필자는 전방부 성립에 대해서는 전대의 야요이시대 묘에 맹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방부는 작은 부대시설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야마토정권 성립 전에 중국 더불마운드 분형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위하여 더블분형의 묘로서 고안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일본열도에서 강력한 정치 집단이 태어날 때 스스로 권력과시를 위해 새로운 묘제를 성립시킨 것이다.
현재 일본열도에서 고분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3세기 말경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그 밖에도 다른 견해가 있다. 올려보는 사람은 3세기 초경으로, 늦게 보는 사람은 4세기 초경으로 주장한다. 최근 필자는 전기 고분의 계획적인 조사성과로부터 전방후원분 성립을 3세기 중엽 이전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전방후원분은 최초 단계에서 대규모 분형으로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야요이 시대의 한 구획, 한 분구내에 다량 매장하는 형태가 야마토의 가장 오래된 고분시대 고분내에도 있는 듯 하다(호케노야마고분). 그 분형은 정형화한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전방부가 짧은 타입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형화한 뒤의 전방후원분 단계에서는 한 고분에 하나의 매장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즉 한사람을 위해 전방후원분이라는 더블마운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야마토정권 고분의 원칙이었다. 그 후 추가장 등으로 한 고분에 다수의 매장도 행하여 졌지만, 원칙적으로 고분시대를 통하여 이것은 지켜졌다. 이와 같은 전방후원분 분포와 규모로 보아 그 중심은 야마토(나라)에 있었다. 그리고 이 분형은 야마토정권을 상징하는 묘제이며, 이 묘제를 전국 각지에 확대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야마토 정권은 전국통일 과정에서 각지 호족이 야마토정권에 종속하였다는 증거로서 이 분형을 허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 야마토 이외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이 전방후방분이고, 그 다음이 전방후원분이라는 사례가 많다. 야마토정권에 종속한 최초의 수장에는 전방후방분, 2대째 이후 수장에는 전방후원형 묘를 만드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이지만, 처음부터 전방후원분을 조성한 지역도 있다. 아무튼 우리들은 전방후원분이 각지에서 성립하는 것은 야마토정권 하에 그 지역이 종속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전방후원분의 매장 시설에 대해서는 그다지 제약은 없었던 것 같다. 야마토에서 초기단계(전기고분)에는 장대한 수혈식 석실이 주류였지만, 각 지역에서 각자 특색을 가진 매장시설이 사용된다. 점토곽, 상자식 석관, 목관장, 소형 수혈식 석실 등이다. 또 이 시기 삼각연신수경을 포함한 거울이 전국에서 다량 출토하지만 이것도 야마토정권 하에서 장의구로서 배포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앙에는 이미 4세기대에 전장 300m를 넘는 전방후원분이 출현하였고, 5세기에는 500m정도의 초거대 고분도 나타난다. 이와같이 외면과 외형을 중시한 무덤 조영이 야마토정권 묘제의 기본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 전방후원분을 중심으로 한 묘제는 당시 사회구성의 커다란 기둥이 되어 전방후원분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들 고분은 면밀한 기본적 설계가 있었다. 즉 고도의 토목기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멀리 떨어진 고분끼리 완전히 동일 규모, 형태를 나타내는 고분도 있다.
5세기대는 전방후원분이 최고로 발달하여 고분의 축조규격도 엄격히 행하여진 시대였다. 그런데 6세기가 되면 전방후원분도 키나이(나라․오사카 주변)지역 이외에서도, 특히 토오코구 지역(일본 본도 동쪽지역․관동지방)에도 많이 축조된다. 더욱이 분구 규격의 엄밀함이 없어진다. 전방후원분이 중앙에서 지방호족에 내려준 분형이라는 상황은 없어졌다고 보이며, 각 지방의 호족은 스스로 전통적인 묘제로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고분 축조는 내부구조에 대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야마토의 대왕 매장시설로서는, 4세기대 까지는 장대한 수혈식 석실에 장대한 통나무형 목관이며, 4~5세기가 되면 짧은 수혈식 석실에 석관(긴 손잡이가 달린)등을 넣게 된다. 즉 수혈계의 매장시설이다. 그러나 이 무렵 일부 지역에서는 횡혈계 매장시설이 채용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북부구주였다. 북부구주에서는 횡혈계 매장시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초현기의 횡혈식석실은 북부구주를 중심으로 한 북부구주형, 아리아케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후(히고)형, 그리고 수혈계 횡구식 석실은 사가현 곡구(타니구치)고분의 후원부 매장시설이다. 합장형 수혈식 석실의 단변에 입구를 설치한 것이다. 내부에는 석관(긴 손잡이가 달린)이 있었다. 추가장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고, 피장자의 생전에 묘를 만드는 수릉(壽陵)이었다고 추정된다. 후쿠오카시 노사(로오지)고분에서는 중심매장 3호 석실 이외에, 후원부에 1․2호, 전방부에 4호 석실이 있고, 이 3기가 수혈계 횡구식석실이다. 이러한 석실은 후쿠오카현 서부에서 사가현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경에는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타니구치 고분이 일본 횡혈식석실의 가장 오랜 예이며, 다른 횡혈식석실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 고분이 전장 77m의 전방후원분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즉 북부구주의 수장층 묘로서 최초로 횡혈계 매장시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북부구주형 횡혈식 석실은 석실 주축을 직교시켜 유체를 안치시킨다는 점에서 수혈계 횡구식 석실과 다르다. 또한 석실내에 상자식 석관이나 목관을 넣고 그 2~3체의 매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로오지 3호석실이나 후쿠오카시 서기(스키자키)고분, 사가현 관행환(세키교오마루)고분 등이 있다. 전방후원분이나 대형 원분의 매장시설로 채용되었다. 타니구치 고분과 같은 수혈계 횡구식석실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한반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4세기 말경에는 이 타입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히고형 횡혈식 석실은 석실내에 석장(石障)이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다. 구마모토현 장군총(쇼오군즈카)이나 소서장(고소죠오) 1호분은 5세기초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타입은 북부구주형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많다. 히고형은 오카야마현의 천족(센조쿠)고분이나 미에현 오죠카고분, 후쿠이현 향산(무카이야마) 1호, 오사카부의 탑총(토오즈카)고분 등 5세기중엽 경에는 타 지역에 전파된다. 구주에서는 이 세 가지 타입 이외에 복실구조의 횡혈식석실도 발달하지만 이 타입은 5세기 후엽의 전좌산고분을 초현으로 하고 있어, 후에 발전하는 형식이다. 구주의 이와 같은 횡혈식석실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타니구치고분과 같은 예는 일본의 전통적인 매장시설에 횡구부를 부설한 것으로 새로운 묘제에 대응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일은 한반도 횡혈 매장시설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구주지역에서 횡혈식석실은 분명히 고분문화 중심인 키나이(나라․오사카주변)보다 그 채용이 빠르다. 그리고 타니구치와로오지처럼 이 지역 수장묘인 전방후원분 매장시설로서 최초로 채용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마도 야마토정권은 외형에 대해서는 그 의지를 강하게 주장하였지만 내부구조는 각지의 호족들이 자유롭게 하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한국과 가까운 북부구주의 호족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횡혈식석실을 스스로 묘실에 채용하여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확대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한편 키나이야마토에서는 횡혈식석실의 채용이 상당히 늦어진다. 기내(키나이)에서 가장 오래된 횡혈식석실이라고 하면, 오사카부 고정전(타카이다)고분이나 나라현 춘정궁산(츠바이 미야야마)고분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5세기 후엽경에 축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소형고분의 매장시설로써 채용된다. 기내(키나이)지역의 횡혈식석실 채용에 대하여 구주에서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도 일부 있을런지 모르나 오히려 한반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초기 횡혈식석실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인해(오시미)28호분, 거세산(코세야마)8․9호, 평군(헤구리)의 춘정궁산(츠바이 미야야마)처럼 귀화계 씨족의 거주지 및 한반도와의 연결이 강한 씨족의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횡혈식석실이라는 형태의 묘실을 야마토에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횡혈식석실이 조금 침투하였다. 그것은 오사카부 후지노모리나 탑총(토오즈카)고분 등이며, 구주(큐슈)로 부터의 영향 일지도 모른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 경에 소규모 고분에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지만, 이들의 고지(故地)는 백제나 그 밖의 다른 지역도 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귀화계씨족은 그 출신지의 전통적인 묘를 만들려고 할 것이며,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호족은 관계한 한반도 지역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 필자는 여러 형식의 횡혈식석실이 어느 지역과 관계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일본과 한국의 횡혈식석실 비교로 그것은 가능해 질 것이다.
귀화계 씨족을 중심으로 채용된 횡혈식석실은 6세기 초에는 당시 사회의 유력호족 묘에 채용되기 시작한다. 야마토에서 횡혈식석실이 대형 전방후원분의 매장시설로 채용된 것은 시미묘산(이치오 하카야마)고분이 최초일 것이다. 이치오 하카야마고분은 전장65m이고 주호(周濠)와 외제(外堤)를 가진 것이며, 외제를 계측하면 길이110m에 미치는 고분이다. 후원분에만 편수(片袖)의 짧은 연도가 붙는 횡혈식석실이며 내부에는 가형(家形)석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추가장은 없었다. 대형전방후원분 그리고 관속을 깍아낸 가형석관이라는 조합은 당시 최고급 피장자상을 나타낸다. 도굴되었지만 장의구나 마구가 있었고, 고식의 스에키(도질토기류)도 발견되었다. 대략 6세기초의 고분 축조 년대가 추정된다. 이 시기에 드디어 횡혈식석실이 전방후원분의, 즉 각 호족의 우두머리 매장시설로 채용되기 시작한다. 키나이 각지의 횡혈식석실은 각 지역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지역성이 강한 형태를 나타낸다. 야마토(나라현 주변)만을 보아도 헤구리다니에서는 비교적 높이가 높은 횡혈식석실을 만드는 데 반하여, 코세다니에서는 길이가 긴 석실 만들기가 행하여진 것 같다.
이 원인은 여러 호족집단 내에서 독자적으로 석공을 데리고 석실을 쌓았기 때문일 것으며, 그 기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키나이 지역에서도 기이(와카야마현 주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5세기말 경에는 전방후원분에, 즉 수장의 묘에 이미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었다. 기이(키이)의 횡혈식석실은 암교(이와세)형으로 불리우는 특색이 있고, 녹니편암이라는 할석을 이용하여 종적기법으로 쌓았다. 묘실전도가 있고 석붕(石棚), 석량(石梁)등도 나타나는 독자적 발달을 보인다. 이 지역은 처음부터 수장의 매장시설로서 횡혈식석실을 채용하였다는 점에서 야마토 등과는 다르다.
키이가 한반도에 큰 발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호족이었기 때문에 횡혈식석실도 빨리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인 화산(하나야마)6호분 등에 한반도 산라토기(가야지역 것으로 생각됨)가 부장되어 있다는 것도 이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해(일본해)쪽 후쿠이현 등에도 비슷한 상황의 고분이 존재하는 지역이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전방후원분에 횡혈식석실이 채용된 것은 6세기 전반이 되어서 이다. 거대한 분구를 가진 고분에 횡혈식석실의 채용이란 횡혈식석실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즉 처음에는 횡혈식석실을 분구 중앙에 묻는 형태로 만들었고, 그 입구가 표면에 나오지 않아 추가장 기능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으로 축조되었다. 그 후 석실은 크게, 연도를 특별히 길게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전방후원분이라는 분구에 횡혈식석실은 어울리지 않았다. 수십년 후 6세기 말에는 전방후원분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박장화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튼 분구 중시였던 묘제가 이때부터 내부 구조를 중시하게 된다.
한편 매장시설인 횡혈식석실은 오히려 이 시기 이후 거대화하여, 약 반세기에 걸쳐 발전한다. 야마토의 거대 횡혈식석실은 목야(바쿠야)고분, 석무대(이시부타이)고분, 암옥산(이와야 야마)고분을 비롯하여 오히려 이 시기(6세기말~7세기 중엽)에 많다. 분구 축조에 많은 노력을 소비한 시기에 비하여 분구는 기껏해야 직경 50m의 원분이나 방분을 축조하는 정도였다.
이 6세기 후분~말 경이 되면 전방후원분의 소멸이라는 묘제상의 커다란 변화와 더불어 거석을 사용한 대규모 횡혈식석실은 지역별 형태적 특색은 없어지고 같은 형태를 띠게 된다. 즉 야마토 각지의 횡혈식석실에 개성이 없어진다. 동일 석공집단에 의한 같은 기술에 의해 석실 축조가 이루어 졌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야마토정권의 중추인 천황가가 묘제에 있어, 엄하게 각 호족 관리를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정에 의한 중앙집권정책의 하나일 것이다. 즉 각 호족이 자유롭게 무덤을 축조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규모가 큰 분구도 만들지 못하게 한다. 그 대신 석실축조는 조정(朝廷)이 석공 집단에게 만들게 하는 것이다. 즉 국장(國葬)과 같은 것이다.
이 시기에도 한반도의 영향은 계속되어, 키리이시고분이나 센즈미고분 등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7세기 중엽 아마도 박장령(薄葬令)이 내려진 646년 이후가 되면 횡혈식석실 규모도 매우 적어지며, 석관보다 약간 큰 횡구식석곽이라는 타입의 석곽이 증가한다. 7세기말~8세기초에는 횡혈계 매장시설이 사라지고 일본의 고분문화도 종언을 맞아하게 된다.
한국의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하여
영산강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은 5세기후반~6세기초 왜인(倭人), 왜계(倭系)의 사람들 묘지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일본인 학자중에는『일본서기』의 계체기에 보이는 임나4현할양 기사로부터 이 부근을 4현에 비정하는 설도 있고 많은 왜인․왜계의 사람들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이 부근은 작은 부족국가가 있어 혼돈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한인(韓人)이나 왜인(倭人)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라남도의 신덕고분이나 조산고분의 석실이 사기현 아리아케해에 면한 지역의 카부토즈카, 세키교마루고분 등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일부 학자는 큐슈에서 전라남도 신덕에 이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이 부근의 횡혈식석실은 한강유역 백제에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일본에 있어 귀화인처럼, 한반도에 있어 왜계 귀화인과 같은 상황에 있던 사람의 무덤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의 전방후원분을 보면 현상에서 분명히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5~6세기의 것이며, 일본 초기 전방후원분처럼 3세기전반~4세기대에 올라가는 것은 없는 듯 하다. 즉 5세기말~6세기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도 전방후원분이 매우 다양화 하는 시기이므로 한국의 전방후원분을 일본 전방후원분과 형태 비교하여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 단 이것이 전장 100m를 넘는 대형고분이라면 비교 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수십m이하 전방후원분의 경우는 축조 규격이라는 설계도 그다지 규격적이지 않다고 보이며, 각지에서 다양하게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방후원분이라고 하여도 일본 전방후원분 체계에 들어 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덕고분이 축조된 시기에는 일본 내부에서는 그 체제가 붕괴되었던 것 같고, 각 호족이 스스로 전통적 묘제로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분의 규격 등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다. 즉 일본의 전통적인 무덤의 형태를 스스로의 의지로 만든 것이며, 야마토정권의 직접적 배경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좀 퍼가겠습니다...^ㅡ^
시기가 5~6세기라는 점에 주목하면 왜국에서 귀국하여 즉위하는 곤지계- 동성왕, 무령왕 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묘제가 곧 국가 영역표시인양 생각하는,(그래서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이상한 풍조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