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루카 19,45-48
힘들이지 않고 기도 오래 할 수 있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성전은 분명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내적 성전에서 기도가 충만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는 게 기도이니 특별히 기도 시간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내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있다면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욕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내가 기도의 집이 되려면 우선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오래 붙어 있어야 자기에게도 자성이 생깁니다. 쇠를 풀무 불에 잠깐 넣었다 빼면 속까지 뜨거워지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가 결국 모든 삶이 기도가 되면 그제야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로 한 시간을 합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전의 기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닌 내 뜻을 하느님이 아시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청하면 기도가 길어질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어떤 신자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을 사시는 할머니셨습니다.
저와 면담하자며 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직원분은 신부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면담할 시간은 안 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꾸리아 강복을 주고 점심에 맞춰 올라오는데 그 자매님이 저를 잡았습니다.
면담하고 싶은데 점심을 드셔야 해서 안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으로 치자면 10분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오래 당신 말씀을 하지 못하실 것을. 고해성사에 들어오셔서 일사 후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셔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오래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렇게 금방 지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여섯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자녀 간의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 거짓말 안 하기, 음식물 방으로 가져가지 않기, 형제간의 서열 지키기 등 몇 마디 하니 회의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금쪽 처방받고는 오래 회의가 지속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지 눈치를 보며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자 오랜 대화가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도.
기도를 오래 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 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수학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고 가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한마디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아무리 길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표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의 희망에 내 희망을 걸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깊어질수록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해서 자신이 먼저 제사를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왕위에서 쫓아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주님의 기도만 바쳐도 굉장히 유익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금방 끝납니다.
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섀클턴을 기다리던 선원들이 기다리던 나를 살리는 한마디여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마카베오기 상 4,36-37.52-59
루카 19,45-48
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대로 구려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추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퍼져야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소리가 넘쳐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대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뺑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 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1월18일 [연중 제33주 금요일]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