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2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35-40)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말씀의 초대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1,8)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교회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함을 의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겨 주신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것이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전망입니다. 이제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미약하나마 밖을 향한 선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처음부터 선교를 목적으로 유다와 사마리아로 떠나간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나간 것입니다. 박해받는 교회가 그 박해를 피하여 흩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박해가 다른 곳에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교회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테파노와 사울의
관계도 이와 유사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전하는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사도
8,1)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스테파노가 죽은 다음 사울은 더욱 맹렬하게 교회를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굳이 스테파노의 순교
마지막에서 사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울의 회심이 스테파노의 순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곧,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그의 죽음으로
바오로 사도를 낳았던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은 가치관은 물론, 소신마저 헌신짝처럼 집어던지는 반면, 참혹하지만
장렬하게 목숨 바치는 순교자들의 피는 한 알의 씨앗처럼 수천수만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생명을 낳는 죽음,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계시를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가 부활하시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이루어 참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성립되는 새로운 관계란 아주 가깝고 친밀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 된다는 표현 이외에 더 적합한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잘 알고
지냈던 청년 한 명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청년이 저와 안 본 사이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알게 되었지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사실이 약간 서운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왜 내게 연락도 하지 않았니?”
그런데 이 청년은
제게 뜻밖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바쁘시잖아요.”
충격이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로 알고 늘 제 자신을 채찍질을 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점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다가서기 힘든
가장 큰 단점이었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사제는 바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니 바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가서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하루 24시간 내내 바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바쁘다”라는
표현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바쁜 것이 아닌, 마음만 바빴음을 반성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잠을 잘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지요. 그런데도 때로는 소위 당시에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면서,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가한
모습을 보이셨던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편안히 다가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미사 영성체를 하기 힘들다면 어떨까요? 미사를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할 수 있어서 주님 모시기가 쉽지 않다면 아마
사람들은 주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직접 세우시고, 지금 현재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손쉽게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바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한가하게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다가와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주님께서는
바쁘게 살아가며 여유 없이 혼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바쁘다는 말보다는 이런
말을 써 보면 어떨까요?
“저, 오늘
한가해요~~~”
가장 어려운 일은
한 번의 폭발적인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매일매일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루어진다(오그 만디노)
인간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걸까요?
한 학생이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걸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인간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즉,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요? 혹시 나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인류는 한
몸
-이기정신부-
손가락 하나
깨물어서 안 아픈 손이 어디 있겠냐는 어른들의 이야기. 몸의 각 부분이 서로 얽혀 모두 한 몸이라 어디가 아파도 몸이 힘듭니다. 나의 오른손과
왼손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고 항상 서로 돕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라 하신 분은 인류사에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결국 인류는 한 몸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하나라도
잃으면, 몸이 괴롭듯 하느님 아버지도 그러시다는 겁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9)”
오늘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파워
오브 원 >
-전삼용신부-
남미
태생이면서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인 하이머 에스카란테는 유명한 컴퓨터 회사에 다니면서도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월급을 포기해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가
부임한 가필드 고등학교는 남미계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했으며 갱단에 가입을 했고 보통의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머는 실망과 좌절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가
싫어 도망치는 학생을 잡으려다 얼굴에 주먹을 맞아도 그는 피를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배워야
한다,
배워야
성공한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
이런
열정에 탄복한 아이들은 구구단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이머에게 방학동안 고등수학을 배웠고 마침내 전국 고등학교의 2%만
지원할 수 있는 고등수학 시험에서 18명
전원이 합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위원회에서 남미계 학교라는 이유로 부정행위를 했을 것이라며 합격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것을 우려해 하이머는 재시험을 요청했고 결국 더 어려운 문제와 철저한 감독 하에 재시험을 허락받았습니다.
결과는
다시 전원 합격으로 전국에 대서특필되며 하이머는 미라클 메이커로 불렸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이머의
노력으로 가필드 학교는 18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이래로 꾸준히 그 수가 늘었고 구구단도 못 외우는 문제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제는 명문대 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명문고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누군가 피를 흘릴 준비가 된 한 사람을 통해 그 피의 뜨거움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도 바로 성령께서 스테파노에게 임하시어 사람들이 그에게 덤벼들게 만드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우리나라
박해도 바로 제사 지내기를 거부한 윤지충 바오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지만 성령께서는 윤 바오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박해가 100여년에
걸쳐 일어났고 2만여
명에 달하는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덕에 지금은 한 교구에서 일 년에 2만여
명 이상씩 세례를 받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가면 존 하버드가 1636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세운 하버드 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은 한 사람의 확신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돈 700파운드와
책 300권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세운 지 1년
만에 작고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의 꿈과 뜻이 계속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
하버드 대학은 지금 지도자들을 양성해내고 미국의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들을 무수히 배출했습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를 성령의 불로 사르고 그 불이 점점 더 옆으로 퍼져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군가 기꺼이 성령의 불쏘시개가 되어 줄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순교의 길로 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를 제물로 제단에서 살라 바쳐 그 향기가 온 땅에 퍼지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불로 살라 바쳐지는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성령께서 우리를 세상에 불을 지를 불쏘시개로 선택하여 주시기를 조심스럽게 청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불타야만 옆에 있던 미지근한 사람들도 타오르게 됩니다.
모두가
미지근하기만 하다면 그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구원의
전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수철신부-
오늘은 '구원의 전문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어제처럼 절실, 절박하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절실하고 절박한
처지도 생각이 났습니다.
수도자는 기도에는 아마츄어가
아닌 프로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데
정말 전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일찍암치 여유있게 피정지도하려고
수도원을 기분좋게 떠났는데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강남터미널에 와서 휴대폰의
전지를 갈아끼려고 가방을 열으니
'000' 정확한 비밀번호에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애당초 비밀번호를 설정하면
복잡할 듯 하여 그대로 편하게 둔 번호인데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11:30분 경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에 신세계
백화점에도 들려 십여 명 이상 많은 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수도원에 다시 가서 수도형제들의
도움을 받을까 망설이던 중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분의 안내자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류희현)이
친절하게도 해결의 물꼬를 터주었습니다.
이리저리 갖은 노력을 하다 되지
않자
상품명(Elegance)을
휴대폰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후 본사에 전화를 걸어
고속터미널 인근에 있는 뉴코아
아울렛 구관 1층 엘레강스가방 매장을 소개받았습니다.
휴대폰 인터넷 지도를 통해 알려
준 20분 거리의 장소를 가방을 끌고 찾아 갔습니다.
매장의 자매는 도저히 복잡하여
고칠 수 없어
경기 남양주시 진접면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저의
눈길에 잠시 생각하던 중 옆 매장의 자매를 불렀습니다.
와서 보더니 들고 간 후 20분
정도 걸린 후 가방을 고쳐왔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분명
손대지 않은 비밀 번호 000인데
312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다시
000으로 바꿔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량하고 친절한, 좋은
인상의 자매였고
감사의 표현으로 마침 넣고 갔던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라는 제 책을 선물했습니다.
과연
전문가였습니다.
돌팔이가 아닌 각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습니다.
무려 불쌍하게 헤맨뒤 3시간
만입니다.
하여 수도원의 원장수사에게 이런
사연도 전달하여 나눴습니다.
"가방 비밀번호가 고장나 열리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다
간신히 매장 찾아 수리하고
2시30분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오늘 처지가 아주
불쌍했습니다.
밥이고 뭐고 3시간
헤맸내요.
그리고 크게
웃었습니다.“
이어 원장수사는 감사하게도
배꽃들 만개한 수도원 절경 사진 5장을
위로 차원차 휴대폰 텔레그램을
통해 보내왔습니다.
가방이 수리가 완료되니 완전히
구원된 느낌이었습니다.
급한 김에 열쇠 연결 고리를
철물점에 가서 쇠톱으로 자를 생각도 했고 뜯어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방은 영영 불구가
될 것입니다.
이래서 어느 분야든 진정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함을,
전문가 앞에서는 겸손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수도사제로서
하느님에 대해, 또 신자들의
영신사정에 얼마나 전문가인가 하는 성찰도 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전문가가
상징하는바
궁극의 '구원의 전문가'인
하느님의 아드님,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의 전문가 예수님의 최고의
처방이 복음의 서두 말씀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닫힌 마음의 비밀번호를
알아서 활짝 여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만나 내
닫힌 문이 활짝 열릴 때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충만한 구원의 삶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궁극의
'구원의 전문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1독서의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신바람나게 활약하는 필리포스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하여 많은 사람에게 붙어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똑같은 부활하신 구원의 전문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고 큰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시편66,1-2).
아멘.
-조재형신부-
지난주에는 외부
일정이 많았습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평화방송에서는 피정
녹화를 하였습니다.
문정
2동 성당에서는
피정이 있었습니다.
아론의 집에서는
레지오 단원 기사교육이 있었습니다.
풍납동 성당에서는
동서울 지역 청년 레지오 단원 피정이 있었습니다.
청년 레지오
단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불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는 중에도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도
그렇습니다.
박해가 심했을
때,
오히려 신앙은 더욱
뜨거웠고,
복음은 더 많은
곳으로 전해졌습니다.
교회의 재정도
여유가 있고,
새로운 성당도 많이
신축되었고,
사제의 숫자가 더
늘어나지만 요즘 교회는 예전처럼 뜨거운 활력이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곧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교육을
받고,
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였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너무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하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강물에 몸을 담갔으며 나병은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의 것들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자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성사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신앙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가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러나 아무나 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주어진
인연
-김준한신부-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며 꼭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가슴 깊이 숨겨진 하느님의 소명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되어 숨을 쉬고 살아가는 첫날부터 주어진 그 소명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한편으론 우리도 모르게 바로 그 일을 하도록 몸과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결코 자기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당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셨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나은 방법, 더
효율적인 수단, 더 풍부한 결과물을 낳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거듭하지 않습니까?
일부러 사건을
만들고, 일을 조직하며 억지로 결과를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습니까?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려도 괜찮습니다.
남들처럼 그렇게
용을 쓰지 않는다고 게으르거나 창의적이지 않다고 욕을 먹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새로운 일을
기획하기에 앞서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사람과 일을 헤아려 보아야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적당히
바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인연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다면 내 것이 아닌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게 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 6,35)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빵을
좋아하세요? 요즘은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여하튼 빵이든
밥이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꼭
필요한 존재일까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여러분은
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쩔 수
없이 생명의
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처럼 빵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선한
빵 갓 구워낸
빵이 생명을
줍니다. 너무 오래
두어 유효기간이 지난
빵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 신선한 빵이
되이주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즉시 내어주는
사람이 신선한
빵이겠지요.
맛있는
빵처럼 좋은 향기
풍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믿음
-기경호신부-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은 그분 친히 ‘먹히셔야 할 빵’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당신 희생에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임을
뜻한다. 믿음이란? 관계 속에서, 사건과 일 속에서,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바램과 사랑을 ‘바라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그래서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사실 복음사가 요한의 언어에는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
‘믿는다’는 있어도,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명사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구체적인 삶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사람의 삶에서
어려움도 많지만 아름다운 것들도 많이 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될 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상대를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든, 부족하든, 가진 것이 있든 없든, 참으로 크나큰 고통 중에 있든, 참된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울 것 없이 넉넉해진다. 몰아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촉구하시는 믿음의 행위이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6,36)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말씀과 성체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부활하신 그분을 바라보는 행위이며,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그분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37절),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을 보고 당신의 참 본질을 믿으라고 초대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이웃에게 등을
돌리며 사는 삶이란 곧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이는 곧 죽음의 길이다.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이웃을 말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받고 따돌림 당할 때 말없이 사랑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부당하게 무시당할 때 말없이 참아 받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깊고 깊은 슬픔의 늪에서도 말없이
사랑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상처받을 때 말없이 상처받으신 그분을 생각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마음 저 밑바닥에 스며든 괴로움을 그분께 되돌려드리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빈손으로 그분께 달려가자.
아! 절망감이
밀려올 때, 고통이 극에 달할 때 늘 변하고 나약한 인간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도록 하자. 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만이 사랑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늘 보고 계시기 때문에. 넋을 잃고 그분을 바라보자!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요,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분이 생명의 빵이지 않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한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내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하고 또 목말라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하느님 섭리에 관한
대화집)
오늘 제1독서에서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방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듯이, 우리가 말없이 참아 받는 고통과 시련 또한 생명이요 사랑이신 그분을
더욱 밝히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신앙인답게 말없이 더 깊이 사랑하도록
하자!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이영근수사-
주님!
계산하여
따지고 측량해보고
반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로
흐를 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취미와
기호에
맞지 않다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는
저를 물리치지
않음은
‘미처’
저는 당신을 믿지
못하여도
‘이미’
당신께서는 저를
믿으신 까닭입니다.
‘미처’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여도
‘이미’
당신께서는 저를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대로 된
삶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신앙안에서 성숙해지는
삶이란 우리를 물리치지
않으시는
주님께 용기를
내어 다가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이란 주님께 나아갈
때 체험되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믿음과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고유한
것입니다.
고유한
생명은 믿음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신뢰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길뿐입니다.
믿음의
길로 영원한
생명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향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돌보아
주십니다.
믿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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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