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닮은 Che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다.
삼화사 정문앞에서, 같은 학교 음악선생이었던, 긴 머리의 여자와 커다란 키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깨를 안고 찍었던 사진.
그 사진을 보자 마자 어머니는 털썩 주저 앉았다. 어머니 뒤에 매달려 있던 아기 여동생은 어머니가 주저 앉는 바람에 발이 깔려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었고,
얼마 후, 어머니와 나와 내 동생들은 아버지가 계시던 삼척군 근덕면으로 이사를 했다. 그 후 아버지와 음악선생의 불륜의 결과는 기억에 없다.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 학교로 놀러가면 음악 선생은 강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과자를 사주었던 기억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제자들도 입을 모은다.
극좌에서 극우를 넘나들었던 아버지. 퇴학 당하는 학생을 위해 교장실을 설거지 했고, 군 생활 중 휴가를 나오니, 아버지는 머리를 중처럼 빡빡 밀고 심지어 눈썹까지 밀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당시, 모발 자유화를 위해 데모하던 학생들 때문이란다.
집에는 책들이 산더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많은 책들을 처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책들은 다양했다. 미국의 또 다른 정부 CIA에 대한 책, 일본 도꾸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대망 등, 아버지의 일기도 있었다.
아버지는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앞의 드넓은 논과 심지어 방앗깐 까지 소유했던 천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산림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10 월 유신 때 퇴직 당하고, 강릉 월대산 밑에서 닭을 키웠고, 닭이 콜레라로 전부 죽자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닭을 팔았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선생 시험을 치고 근덕농고에 첫 부임을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아버지를 그냥 놔둘리 없었을 것이다.
학교의 노처녀 음악선생이 홀로 하숙을 하던 아버지 방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을, 집 주인의 신고로 어머니는 들었다.
그래서 어린 우리 남매들은 느닷없이 이사를 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일 슬퍼했던 것은 아내였다. 아버지는 나보다 아내를 더 좋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동안 아내는 힘들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는 아버지와 겨우 화해를 한터였다.
아마, 아내가 아버지 보다 먼저 죽었다면, 아버지는 나를 미친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체 게바라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체는 의사로 있다가, 남미 오토바이 여행을 하다가 반미 감정이 생기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과테말라에서 반미 공산주의 무장 단체가 미국에 의해 몰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당시 남미의 반미 무장단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호치민처럼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의사로서 평범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던 그가, 단 한번의 여행으로 반미 투사가 된다. 심지어 그는 극한의 전투 훈련을 받고 최고의 용사가 된다.
체는 이탈리아 출신들의 별명 앞에 붙이는 관용어다. 그의 이름의 게바라와 합쳐저 체 게바라가 된 것이다.
그의 잘 생긴 얼굴은 젊은이 들의 티샤츠에 액자에 또는 영화에 사진에 수도 없이 지구 전체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 만큼 그의 업적은 가려져 있다.
그것은 그가 지독한 반미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성공하고, 쿠바 은행장과 산업부 장관을 하다가, 돌연 아프리카를 갔다가 볼리비아로 가서 정부군과 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볼리비아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의사였던 그는, 쿠바 의과 대학을 세계 최고의 무상 교육기기관으로 만들었다. 쿠바 대학생들은 전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심지어 한달에 500 달러의 용돈을 받는다. 쿠바의 무상의료는 폴리코사놀이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순환기 계통의 건강식품으로 증명된다.
폴리코사놀은 쿠바 국민들의 심장병 사망률을 현저히 낮추었다. 물론 무료였다.
체게바라는 산업부 장관을 하면서, 지금도 통용하는 쿠바 화폐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국내용 화페와 외국인용 화페. 그것은 체게바라의 쿠바에 대한 최고의 업적이다. 무상의료와 함께.
죽은 후, 그의 배낭에는 그가 읽던 책 한권 뿐이었다.
죽어서도 그는 미남이었다. 그의 시체는 버려져 있다가 부패되기 직전 발견되었다. 그의 얼굴은 전혀 썩지 않았다.
역시 미남은 죽어서도 미남인가 보다.
아버지는 죽으면 백봉령 정상에 태워서 뿌려달라고 했다.
백봉령 밑에는 울진 장씨의 일족들이 모여살았고, 할아버지가 백봉령을 넘어 옥계로 와서
일가를 이룬 것이다.
나도 죽으면 아버지를 따라 백봉령에서 바람에 흩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