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관동군은 호전적이기 짝이 없었습니다. 군 수뇌부의 결정도 없이 중국군에 도발, 선제 공격하여 중국군과 교전 상태에 빠지면 군부가 뒤이어 이를 승인하고 힘없는 일본의 내각은 군부에 질질 끌려 다니곤 했습니다.
제가 미국 서 녹화한 다큐 "Kitahiki & Rusin" 을 보면 일본의 당시 시대상이 잘 나옵니다. 키타이키의 사상에 심취한 일본 장교 일단은 36년 2월 26일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키타이키는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한 원조로 일본 군부의 태평양전쟁의 정신적인 지주격인 사람입니다.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 민족들이 힘을 합하여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이론을 집대성한 인물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아시아 인들에게 서구에 대항할만한 힘들 갖게 해 줄 필요가 있고 그 역할을 일본이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아시아 국가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개명한 정권을 세우는 것이죠.
이러한 사상에 심취한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2.26 쿠데타는 천황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같은 군부에 의해 진압이 됩니다. 그렇지만 36년 2.26 쿠데타 이후의 일본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일본이 되고 맙니다. 그나마 민주주의를 근근히 지탱하던 내각이 완전히 힘을 잃고 군부가 득세를 하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가게 됩니다.
37년 노구교 사건은 기세가 등등한 관동군이 상부의 승인도 없이 중국군에게 도발, 기습 공격을 가한 사건입니다. 훈련 도중 실종된 일 병사 하나를 찾기 위해 중국의 한 성을 수색하려는 과정에서 양군 사이에 발포가 이어지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집니다. 감히 황군에게 총질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군수뇌부는 이러한 관동군을 제지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닙니다. 결국 관동군의 공격을 추후 승인하고 일본은 중국과의 대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미국, 영 과의 태평양 전쟁도 어떤 의미에서는 중일전쟁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의 끝없는 소모전에 시달리는 일본은 미국의 보이콧으로 말미암아 중국과 싸워 얻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위기에 처합니다. 중국서 철수하지 않으면 석유를 포함한 자원의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미국의 통첩을 받게 됩니다. 이 최후 통첩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원을 확보해 중일전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태평양에서 대치하면서 동남아시아를 석권해 그곳의 자원을 전쟁물자로 쓴다는 구상에서였죠.
관동군의 객기로 시작된 노모한 사건은 이후 8년간 일본을 피폐시킨 전쟁의 서곡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