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느 날 내 눈길을 확 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고비사막의 밤하늘.
검푸른 하늘과 쏟아질 듯 빼곡하게 반짝이던 무수한 별들.
그래서 고비사막은 나에게 꼭 가야할 여행지가 되었다.
민족의 시원이라는 바이칼 호수는 내 핏줄 속에 흐르는 DNA의 기억 때문인지 아주 오래 전부터 가야 할 곳이 되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여행을 꿈꾸는 누구나에게 다 해당하는 로망인지라 이번 여행은 참으로 설레고 기대되는 코스였다.
배낭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해두는 서랍에서 배낭을 채우고 부족한 몇 개를 좀 더 구입하고 나니 떠날 준비가 끝났다.
7월 21일, 화요일(1일째)
부산 출발, 울란바토르로!
이번 여행은 총 여덟 분이 참여했는데, 김동권샘은 이미 몽골에 가셔서 우리와 울란바토르에서 합류할 예정이라 일곱명이 KTX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울란바토르 가는 항공편이 없어 부산역에서 인천공항 가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집을 나설 때 딸아이의 배웅을 받았는데 오랜 시간을 집에 혼자 둘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인천공항 가며 본 갯벌의 풍경에 모두 시선을 뺏겼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케이씨님, 유재명님 부부, 최대식님 부부가 우리를 반긴다.
유재명님 부부는 제 작년 윈난여행을, 최대식님 부부는 작년 실크로드여행을 함께 한 분들이다.
세시간 정도 거리라 이륙하고 난 뒤 잠시 졸다 저녁 먹고 와인 두잔 마신 후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 한편을 다 못 보고 내렸다.
울란바토르 징기즈칸 공항.
노포동 버스터미널 보다 작고 소박한 공항이다.
도착해서 짐 찾고 입국 수속을 한 뒤 호텔에 도착하니 김동권샘이 기다라고 계신다.
근처 술집에서 맥주 마시며 이번 여행을 함께 할 일행들과 인사를 나눈 후 숙소로 돌아와 씻고 새벽 두시 사십분에 취침을 했다.
그랜드힐 호텔은 시설이 좋을 뿐 아니라 와이파이가 팡팡 터진다.
7월 22일, 수요일(2일째)
울란바토르 시내 둘러보기
늦은 식사를 한 후 10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런데 거리로 나가는 순간 막막해졌다.
버스정류장 표시 없음.
길 표지판 없음.
햇살은 따가워 지고 일행들은 서서히 지쳐 가는데 47번 버스 타는 곳은 도대체 어디야?
그때 짜안하고 나타난 천사 같은 친절한 몽골 아주머니.
자이승기념관 가는 버스가 여기 안 선다며 버스 타는 곳을 가르쳐 주시는데 우리가 몽골말을 알아듣지를 못하니 손짓 발짓 다 동원하여 설명해 주시다가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 자기를 따라 오란다.
그 버스 타는 곳이란 데가 10여분이 훨씬 더 넘게 걸렸는데 아주머니는 자신의 볼 일을 미루어둔 채 답답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투자해 주셨다.
버스 타는 데가 가까워져 저기라고 가르쳐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걷는데 우리가 못 미덥던지 또 따라 오셔서 버스 타는 곳을 알려 주신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진심을 다해 안아드리니 자신의 가슴을 가르치며 “마마”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엄마 마음이라고 해석해 버렸다.
그래! 세상 엄마들은 불쌍한 사람 그냥 못 보고 지나가니까.
몽골 아주머니의 따뜻한 인정을 가슴 가득 담고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서 제일 먼저 간 곳은 이태준 열사 기념관.
이태준 열사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안군 군북면 출신 대암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2회 졸업생으로 의학도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돌봤고 중국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31세 때 몽골로 건너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어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연락처로 삼은 한편 당시 일본이 몽골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퍼트렸다는, 몽골인 70% 이상이 고통을 받고 있던 매독을 퇴치하면서 ‘붓다 의사’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34세 때에 몽골 마지막 왕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된 이후 한인사회당 지하당원, 상해 임시정보 군의관 간부, 의열단 등 독립단체에서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을 펼쳐 오다가 1921년 일본군이 섞인 러시아 백위군 운게른 부대가 울란바타르시를 점령하면서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군과 기념사업회는 2012년에 몽골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정비사업 준공식을 열어 많은 한국인이 찾는 명소로 정비했으며 군은 울란바타르시 항올구와 자매결연을 맺어 청소년 홈스테이 교류 등 이태준 선생 선양사업을 위해 양 지역 간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장소일지 몰라도 몽골에서는 관심 받지 못하는 곳인 듯 주변에 둘러보는 사람은 우리뿐이었고 기념관은 잠겨 있어 외관만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자이승 기념관 주변은 공사 중이었는데 울란바토르 시내 전체 전망을 보려면 언덕을 좀 올라가야 한다.
시내 전경을 보니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가 연상될 정도로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이 나라도 몇 년 후면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들어서는 빌딩과 저 멀리 산동네의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기념탑의 조각들이 눈길을 끌 뿐 특별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울란바토르의 현재를 보고 싶다면 꼭 자이승기념관에 들르라고 말하고 싶다.
악기를 불며 파는 소년에게 칸 복트칸 궁전을 물으니 간단한 영어와 손짓으로 위치를 가르쳐 준다.
20분 정도 걸으면 칸 복트칸 궁전이다.
팔천 투그릭을 지불하고 입장했는데 고풍스럽고 독특한 아름다운 색상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건축물 구경에 빠졌다.
외몽골의 독립 선언 후 수립된 새 정권은 티베트 출신의 제8대 활불 자브잔담훗타그트(Javzandamba Khutagt)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를 복드칸(Bogd Khan)이라 한다.
복드칸 궁전 박물관 [Winter Palace of Bogd Khan]은 몽골 왕조의 마지막 황제 자브춘 담바 후탁트 8세가 20년간 살았던 겨울궁전에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복드칸이 세계의 왕들에게받은 선물, 몽골 왕과 왕비의 침실, 복드칸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박제 동물들과 18~19세기 티베트 지역에서 활약했던 작가들의 불교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제법 풍성했다.
복드칸 궁전 박물관을 나와 수흐바토르 광장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아 가려다 지나가는 버스를 길에서 세우니 세!워!준!다!
지난 겨울 스리랑카에서도 버스정류장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서 타고 다녔는데 몽골에서도 그게 통한다.
수흐바토르 광장에 내려 제일 처음 보이는 음식점에 무조건 돌진해서 점심과 맥주를 시켜서 먹었다.
식사 때를 놓쳐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무조건 들어간 식당인데 음식이 제법 괜찮다.
배를 채우고 원기를 회복한 후 우리는 광장을 지나 15분 정도 걸어서 자나바자르뮤지엄에 도착했다.
자나바자르뮤지엄은 징기즈칸의 직계후손으로 1대 법왕이었던 자나바자르(1635-1723)의 문화적 업적들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은데 특히 관세음보살의 아내인 타라의 아름다움이 눈길을 끌었으며 팔천 투그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볼거리가 풍성했다.
타라.
아름답고 온화한 화이트 타라.
뇌쇄적이고 고혹적인 그린 타라.
다들 화이트 타라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데 나는 그린 타라에 더 눈길이 간다.
요염하고 관능적인 그린타라여!
그리고 내 발길을 한참이나 머물게 한 작품 One day mogolian.
1920년대의 작품으로 인간의 윈초적인 욕망과 일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깜짝 놀랐는데,
아이를 낳는 장면과 남녀의 성애장면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시대 몽골인들의 성의식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넓고 척박한 땅에 생명을 퍼뜨리기 위해 성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하긴 인간처럼 양육 기간이 길고 힘든 동물에게 성욕이 아니라면 인간이란 종족은 멸종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이카 단원으로 울란바토르에서 봉사활동 중인 김동권샘의 따님이 몽골 민속 공연장을 안내해 주려고 와서 우리는 택시를 나눠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키도 크고 시원한 매력의 이 아가씨는 몽골어로 택시 기사에게 장소를 가르쳐 주고 가격 흥정까지 해 주었다.
일행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우리 셋이 택시를 잡아탔는데 우리 하는 말을 듣던 기사가 갑자기 한국말로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칠년간 일한 사람으로 우리말을 제법 잘 했다.
몽골은 택시 수가 매우 부족하여 자가용이 택시 역할을 하고 있어 우리는 자가용 택시를 주로 이용했는데 영업용 택시보다 자가용 택시가 훨씬 많아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찾아간 공연장은 몽골리언 내셔널 송 앤드 댄스 앙상블.
이만 투그릭의 공연비를 지불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입장을 해보니 유럽인 여행객들과 우리나라 여행객들로 객석은 이미 차고 넘쳤다.
몽골 특유의 발성을 이용 한 흐미 공연 뿐 아니라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운 동작과 악기 연주가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이었다.
압살라 공연이나 카타칼리 공연보다 훨씬 볼거리가 풍부하고 멋졌다고 생각한다.
신이 만든 악기인 목소리, 몽골의 자연을 닮은 초원의 소리, 징기즈칸의 후예답게 힘이 넘치는 동작.
우리 감성에 맞는 음악과 춤을 보자니 우리와 사촌 지간인 몽골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왔다.
족두리를 한 여인이 나와 공연을 하는 걸 보니 몽골풍이 떠오른다.
고려 말 80여년을 몽골의 간섭을 받으며 부마국으로 지내다 보니 왕비와 수행원이 퍼뜨린 몽골의 양식이 그 시대 유행이었는데 이를 몽골풍이라 불렀다.
족두리도 그때 들어왔으며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몽골 샤머니즘을 대표하는 오보는 제주도의 서낭당과 비슷한데 고려시대에 몽골군이 제주도에 주둔하여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대 이상으로 흡족한 공연을 보도록 안내 해 준 김동권샘 따님에게 한번 더 고마움을 전한다.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돌아 온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시원한 맥주에 기분 좋게 취해서 빡센 몽골에서의 하루를 마감했다.
첫댓글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표정으로 이번 여행길을 환하게 비춰주시던
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선생님 여행기 덕분에 다시한번 여행을 떠나는 기분입니다 ^^
예전에 귀찮아서 사진 없이 여행기를 한번만에 올리다가 이렇게 사진을 넣어 여러편으로 나누어 올리려니 보통 힘든게 아니군요.
그래도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많이 행복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의 좋은 인연이 다음 여행으로도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중간에 사진도 끼워야 볼 만하지요.
ㅎㅎ 부지런한 재란 선생 덕분에 여행을 다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