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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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시인이고 대표작 「가을의 기도」가 더 유명하지만 이 시는 더욱 고독한 지하실로 한 걸음 더 내딛는 데가 있다. 넓이와 높이 대신 오직 깊이에 침잠한 시인의 사유가 응축돼서다. 열매가 사라진 자리, 훗날의 공허마저 감지해내는 이 예언적인 시는 '이 계절의 내가 어느 태양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가을은 눈으로 온다고 했던가. 가을은 '나'를 겸허한 온도로 바꾸기에 좋은 계절, 애상을 넘어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기에 적당한 날씨다.
김유태 (시인, 매경 기자)
첫댓글 이 시를 낭상하는 김현승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평안을 느끼기도 하지요
여기서 만난 김현승의 <가을의 시>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