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반(初盤)에 유럽(Europe)이 프랑스(France) 혁명(革命)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昏亂)에 빠진 틈을 타서 중남미(中南美)의 많은 식민지(植民地)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독립(獨立)했습니다.
그런데 지배국(支配國)이 통치(統治)의 편의(便宜)를 위해 대강 나눈 지역(地域)들을 기반(基盤)으로 독립국(獨立國)들이 들어서다 보니 국경선(國境線)이 명확(明確)하지 않았습니다.
미개척지(未開拓地)가 많았고 인구(人口)도 적어 한마디로 먼저 깃발을 꽂은 쪽에서 권리(權利)를 주장(主張)할 수 있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남미에서 봇물 터지듯 독립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툭하면 영토 분쟁(領土紛爭)이 벌어졌고 경우에 따라 전쟁으로도 비화(飛火)했습니다.
반면 러시아(Russia)가 알래스카(Alaskar)를 미국에 팔아버린 예(豫)처럼 개척(開拓)이 어렵다고 판단(判斷)한 곳은 미련 없이 포기(抛棄)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당장 이득(利得)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싸워서라도 차지하려 들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無關心)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새롭게 경제적(經濟的)인 가치(價値)가 드러나면서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건국 후 많은 나라들이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태평양 연안(太平洋沿岸)의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 지역(地域)은 현재 구리(Cu)가 엄청나게 매장(埋藏)된 칠레(Chile)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곳의 주인(主人)은 볼리비아(Bolivia↑)였습니다. 현재 볼리비아는 남미(南美)에서 파라과이(Paraguay) 와 더불어 둘뿐인 내륙국(內陸國)이지만 1825년 독립(獨立) 당시에는 안토파가스타를 통해 바다와 접했었습니다.
볼리비아가 나중에 독립했음에도 이곳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칠레가 그다지 관심(關心)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의 최근 모습, 칠레의 보물인 구리의 주산지입니다
그랬던 이곳이 칠레의 영토(領土)가 된 것은 1879년에 발발(勃發)한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에서 볼리비아-페루(Peru) 연합국(聯合國)을 물리친 후부터입니다.
경제적(經濟的)인 이유로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칠레에게 구리는 세계 생산량(生産量)의 30~40% 정도를 담당(擔當)하는 중요한 재화(財貨)지만 운송(運送) 인프라(Infra, 사회적 생산기반을 뜻)가 구축(構築)되고 탐사(探査) 및 채굴 기법(採掘技法)이 발달(發達) 된 1930년대 이후에서야 중요한 위치(位置)를 차지(借地)했습니다.
↑전투 직후 전사한 볼리비아군을 둘러보는 칠레군
구리 이전에 안토파가스타가 주목(注目)받은 이유(理由)는 구아노[(guano, 케추아어의 'wanu'에서 유래)는 강우량(降雨量)이 적은 건조지대(乾燥地帶)에서 새들의 배설물(排泄物)이 퇴적(堆積), 응고(凝固)되어 화석화(化石化)된 것을 말한다)와 초석(礎石)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부정(否定)되지만 19세기 직전에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년 2월 14일~1834년 12월 23일)는 영국의 성직자(聖職者)이며, 인구통계학자(人口統計學者)이자 정치경제학자(政治經濟學者)는 산업혁명(産業革命) 이후 인구가 급속(急速)히 늘어난 데 비해 한정(限定)된 토지(土地)에서 곡물(穀物)의 생산량(生産量)을 획기적(劃期的)으로 늘리기 어려워 큰 문제(問題)가 될 것이라고 주장(主張)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帝國主義國家)들이 침략(侵掠)을 노골화(露骨化)할 때 거론(擧論)한 핑계 중 하나가 식량 자급(食量自給)이 어려울 만큼 자국의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페루의 구아노 광산, 화학비료 등장 전까지 최고의 고품질 비료였습니다
구아노와 초석은 이러한 고민(苦悶)을 해결책(解決策)이 될 수 있을 만큼 농업 생산량(農業生産量)을 획기적(劃期的)으로 늘릴 수 있는 최고의 비료(肥料)이나 산출(産出)되는 곳이 지구상에서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귀한 보물이 안토파가스타에서 발견(發見)되자 자금(資金)과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했던 볼리비아는 이를 개발(開發)하고자 1874년 25년간 면세혜택(免稅惠澤)을 주기로 칠레와 조약(條約)을 맺었습니다.
이에 많은 칠레인과 기업(企業)이 투자(投資)에 나섰습니다.
↑칠레는 안토파가스타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내정 실패(內政失敗)로 경제(經濟)가 어려워진 볼리비아가 1878년 약속(約束)을 깨고 세금(稅金)을 부과(賦課)했습니다.
투자자(投資者)들이 납부(納付)를 거부(拒否)하자 볼리비아는 자산(資産)을 압류(押留)했고 이에 격분(激憤)한 칠레가 1879년 2월 14일, 군대(軍隊)를 안토파가스타로 진격(進擊)시키면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볼리비아와 동맹(同盟)인 페루도 참전(參戰)했으나 칠레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掌握)하면서 대세(大勢)가 결정(決定)되었고, 4년 후 볼리비아, 페루의 항복(降伏)으로 전쟁은 막(幕)을 내렸습니다.
↑전쟁을 일으켜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한 칠레군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칠레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經濟的利益)에 현혹(眩惑)되어 정책(定策)을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바꾼 볼리비아가 명분(名分)을 제공(提供)했습니다.
그렇게 볼리비아는 구아노, 초석은 물론 훗날 더욱 중요성(重要性)이 커진 구리가 묻혀있고 바다로 나가는 유일(唯一)한 통로(通路)인 안토파가스타를 완전히 상실(喪失)했습니다.
25년만 참으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성급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대가(代價)는 이처럼 혹독(酷毒)했습니다.
↑현재 볼리비아는 내륙국 임에도 해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티티카카호를 관할 중이나 고토 회복의 염원도 담겨 있습니다
볼리비아 해군은 1970~8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베트남 스키부대'란 드립처럼 들리기도 한다. 베트남 스키부대의 의미는 있을 리 없는 것을 있는 것마냥 우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리비아에 해군은 마냥 초현실주의 농담이 아니다. 지금은 바다가 없는 볼리비아지만 한때는 바다와 해군을 가진 해양국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볼리비아는 태평양 연안까지 국토가 있었으나 1883년 칠레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패한 뒤 12만㎢의 영토와 400㎞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을 송두리째 뺏겼다.
이에 불리비아는 바다를 넘겨준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매년 3월 23일을 '바다의 날(El Dia del Mar)'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피(血)를 부른 구아노와 초석은 1905년 하버(Jakob Haber↑, 1868년 12월 9일~1934년 1월 29일)가 암모니아 합성법(合成法)을 발명(發明)한 덕분에 가치(價値)가 추락(墜落)했습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볼리비아가 무모(無謀)한 도박(賭博)을 한 셈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유사(有史) 이래 전쟁의 가장 중요한 발발 원인(勃發原因)입니다.
하지만 역사(歷史)는 주고받을 때 이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입증(立證)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여파(餘波)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은 좋은 교훈 사례(敎訓事例)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성급히 배를 가른 결과j|작성자 aug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