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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투수 오렐 허샤이저(Orel Hershiser)는 자서전 ‘Out of the Blue’에서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한번은 LA 다저스 팀의 토미 라소다 감독이 허샤이저 투수를 불렀습니다. 라소다 감독은 소리를 지르며 허샤이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자신에 대해 믿음이 없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때, 잔뜩 겁먹고 공을 자신 있게 던지지 못한다구. 자네가 상대하는 타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쯤 된다고 여기나? 그는 벌써 죽었다구! 자네는 충분히 좋은 구질을 갖고 있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네를 우리 다저스에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선수들을 봐 왔는데, 자네 실력 정도면 훌륭하다구! 그러니 공격적인 피칭을 해 보게나! 마운드에 올라서면 으르렁 거리는 불독처럼 행세하라구. 불독! 이제 자네를 ‘불독’이라고 부르겠네! 마운드에 올라서면, 불독처럼 사납게 굴어 타자들을 겁먹게 만들어야 하네!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시작하세. 나는 자네가 메이저리그 투수들 중에 가장 잘 던지는 투수라고 믿고 있네. 마운드에서 타자들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해 보라구. ‘너는 절대 내 공을 치지 못할 걸!” 라소다 감독의 격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후 구원 등판한 자리에서 오렐 허샤이저는 3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1점만 내어주는 호투를 펼쳤습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성적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허샤이저는 1988년, 월드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고 은퇴이후 LA 다저스팀의 야구 해설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허샤이저는 라소다의 조언을 예수의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에 빗대어 ‘마운드의 수훈’ (Sermon on the mound)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만큼 라소다의 말이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투수면 투수답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성도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물론 연약하여 죄도 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도입니다. 바울이 성도라고 부른 초대교회 신자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불렀습니다. 행동거지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가에 따라 행동방식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성도로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그 정체성에 맞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복음의 수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이라는 단어 속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어려운 일이 생긴다해도 쉽게 복음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의 ‘생활하라’는 원어는 ‘폴리투 에스투’ 로서 ‘시민답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는 바닷가 휴양지로서 로마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로마인으로서 품격과 신분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성공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받은 자들은 하늘나라의 시민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천국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삶 자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이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협력을 하여야 합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 전투기들에게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공중전에서 독일 전투기들이 편대를 지어 공중전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전투기들은 1:1로 공중전을 했는데 독일의 한 장교가 공중전에서 비행기가 둘씩 편대를 지어서 싸우면 어떨까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비행기 1대가 기관총을 쏠 때는 약 2.5m 직경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지만, 2대가 편대를 지어 쏠 때는 5m가 아니라 250m 직경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대 비행전략으로 크게 성과를 거두어 영국 공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을 미국의 슈날드 공군 소장이 도입하여 버마 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일본군 전투기를 217대 추락시켰는데 당시 미국 전투기는 16대만 격추되었다고 합니다. 협동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인 것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의 ‘협력한다’는 단어는 군사적 의미가 강합니다. 그것은 ‘함께 경기하다’ ‘한 팀으로 함께 싸우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협력한다는 단어를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가 수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한 뜻으로’는 바울이 자주 반복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서로 한 몸처럼 연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마음’은 ‘한 성령으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성령 안에서 복음을 위해 협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복음을 위해 협력하여 하나 되는 모습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시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분열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하여 하나가 되도록 협력하여야 합니다. 예배하고, 전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은 협동(cooperation)이상의 뜻을 가집니다. 협동은 동의하에 일하는 것이지만, 협력은 자발적으로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협력이지 협동이 아닙니다. 부디 협동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은 로마 황제 시이저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 체포되어 로마의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습니다.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먼저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저를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저의 아버지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크리소스톰은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곳을 뚫고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키겠다”라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저에게는 결코 저를 떠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인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환경 즉 투옥,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상관없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했습니다. 복음이 있었기에 어떤 환경과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여기의 ‘대적하는 자들’이란 유대인을 포함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담대하게 맞서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평온한 때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협력하기 쉬우나 고난이 닥치면 갈라지기 쉽습니다. 대적자들은 연합을 깨기 위하여 모진 박해를 가하곤 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대적과 고난에도 두려움 없이 복음에 굳게 서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반대하며 박해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면서 박해에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복음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은 사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던 까닭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으로 대적자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박윤선(朴允善) 목사는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고난을 귀중히 여기면서 고난을 예찬하신 분입니다. 박목사는 1986년 4월 22일 신학교 학생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수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사람과 기도의 사람과 고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죽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은 저주다 고생은 싫다 고생은 꿈에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과 고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조되고 새로워지고 눈의 밝음을 얻으며 귀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에 대한 생각은 세상 사람의 고난에 대한 생각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고 다릅니다.” 박윤선 목사는 평생토록 고생과 수고로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환경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박 목사 스스로 고생과 고난과 수고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본문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고난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고난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초대 교인들은 항상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기독교인의 특권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장차 얻게 될 영광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면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위한 흔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으로 고난의 흔적을 소유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 기준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정욕을 따라서, 어떤 이는 헛된 가르침을 따라서, 어떤 이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풍습을 따라 살아갑니다. 물질에 대한 소욕과 육체의 정욕, 과시욕들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 합당하게’가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모습이 복음에 합당하게 여겨질 때 비로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친구 두 사람이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기 위해 꽃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꽃가게에서 논쟁이 붙었습니다. “꽃을 선물하면 꽃을 사는 사람이 행복할까? 아니면 꽃을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결론이 나지 않자 꽃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 것 같습니까?” 꽃가게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꽃을 판 내가 제일 행복하지요” 그러더랍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것도 행복이지만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제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힘쓰십니까? 부디 복음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대적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