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9: 15. 안수하시고 16. 영생 17. 선한 일
마 19: 15. 안수하시고 -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증거되어 있다.
* 막 10: 16 -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그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고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나 교회에서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큰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해야 한다.
1]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13절).
그러나 '기도하심을 바란' 소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 요 11: 42 -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2: 30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본 시점에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 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 세례의 기원이 되는 구절이다.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초대 교회시대부터 자연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겐(Origen),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이레니우스는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Hoer. *, xxii, 4)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자신도 유아 세례를 받은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롬 5: 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라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Hom, On Lev. viii, MPG,ii, 496).
* 롬 5: 9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 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아 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
* 행 2: 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행 16: 15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 고전 1: 16 -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4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內侍)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행 8: 36)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행 8: 36 -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 사람들에 의해 유아 세례가 거부되었다.
루터와 칼뱅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 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하다".
개혁자(改革者)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하튼 유아 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 및 신앙적 의속성(依屬性)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 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訓育)하고 성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와 교회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하자.
2] 거기를 떠나시니라.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를 재촉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 제도를 귀히 여겨야 한다.
결혼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며 부부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결혼 서약은 사람이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닌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둘째, 우리는 이혼과 재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배우자가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는 이혼이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은 혼란하고 고통스럽다.
또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셋째, 독신(獨身) 생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만 가능하다.
독신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생활보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넷째, 우리는 신자들의 아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믿는 가정의 어린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천국 백성으로 간주 된다.
그들은 커서 하나님을 떠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 된다.
구약시대로부터 믿는 가정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적용된다.
3. 재물이 많은 청년 ( 19: 16-22. 막 10: 17-31. 눅 18: 18-30 )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 16. 영생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본 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 이두)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 20).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날 발생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1]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다.
막 10: 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예수에게로 달려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로 나타나 있다.
눅 18: 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 눅 18: 18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원'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 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世代)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부자 관원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3-15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전통 본문에 보면,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2]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청년이 예수를 '선생'(*, 디다스칼레)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존칭의 의미가 약하지만,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 막 10: 51 -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요 20: 16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마가복음(10: 17)과 누가복음(18: 18)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7절)고 하였다.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 암 5: 4, 6, 14 –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公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찾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3]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지닌 치명적(致命的)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 메시야의 나라에서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했다.
청년의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랍비들은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 하면 영생에 지장이 없는 계명(어겨도 별 상관없는)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경(恭敬)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아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 것(doing)이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재가 되는 데(being)에 있는 것이다.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관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전도서 3: 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마 19: 17. 선한 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는 선한 선생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내용을 반복하신 것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 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 롬 3: 19-20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된 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얻는다.
* 갈 3: 24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 1과 눅 18: 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통 본문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이점에 대해 학자들(Hoskyns, Allen)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 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등)과 라틴 벌게잇 역(Valgate) 등에는 예외 없이 본서를 따르고 있다.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 대상 16: 34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대하 5: 13 -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 시 106: 1 -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시 118: 1, 29 –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9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예수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의 표현은 마가나 누가보다 훨씬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 18이 예수의 무죄성(sinlessness)을 묻고 있지 않듯 본 절도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合法性)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 누가 그 어느 기자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D. A. Carson).
마가 우선설 때문에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可能性)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 수는 없다.
마태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으로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 관원은 예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思考)와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 10)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義認)된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2]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본문은 16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려는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한다.
신구약을 통틀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 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
* 레 18: 5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롬 10: 5 -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 갈 3: 12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盲目的)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래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하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계명의 참 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 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 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 롬 3: 19-20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 됨을 깨닫게 된 후 그리스도께로 인도된다.
* 갈 3: 24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설교 감사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