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인민군 막사가 대한민국 땅에 남아 있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2023. 8. 19. 11:45
https://v.daum.net/v/20230819114516198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2] 조선인민군의 창설
[윤태옥(답사 여행객)]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남아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
ⓒ 윤태옥 |
북한 인민군사령부의 막사가 대한민국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내가 휴전선 답사여행을 시작하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인민군 막사를 찾아간 것은 지난해 10월 하순. 강원도 철원에서 화천으로 가는 56번 도로(김화~춘천)로 남하하다가 461번 도로(철원~화천)로 옮겨 타고는 동으로 1.3킬로미터 정도 진행하니 인민군사령부 안내 표지가 길가에 설치된 것이 눈에 띄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경사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군부대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나타났다. 주소로는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361-1. 현장의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북한이 1945년 신축했고 한국전쟁 당시에 막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건물 앞에 표지판이 하나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건물 안도 텅 빈 공간뿐이다. 건물이 낡은 터라 전시관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정전협정으로부터 이미 70년이 지났고, 우리 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해왔으니 선제공격의 전면전은커녕 일반적인 흔적조차 남아 있을 리 없다.
1950년 6월에는 인민군 2군단이나 화천-춘천 축선에 담당한 인민군 2사단의 막사였을 것이다. 최전선인 38선에서 20킬로미터 떨어졌으니 후방부대가 사용했을 수도 있고, 전투부대가 주둔하다가 6월 25일 직전에 38선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북한 지역의 거의 모든 건물이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남아 있다는 게 조금은 의외였다.
전쟁 후에는 국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하다가 최근 들어서 등록문화재 27호로 지정했다. 역사 유적지답게 군부대 안에 있던 것을 따로 통로를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은 가능한 범위에서 남겨두는 게 바람직하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이든 한국전쟁의 상처든 마찬가지다. 역사적 의의가 있고 보존가치가 있다면 인민군 막사라도 굳이 철거할 이유는 없다.
마침 시월 하순이었던 터라 막사 중간에 있는 잘 생긴 단풍나무의 빨간 잎사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게 되는 인민군사령부 막사를 보러 왔는데 막상 단풍만 이토록 아름답다니.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냉소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 인민군 막사 위치 |
ⓒ 봉주영 |
북한의 군대조직, 조선인민군
북한의 군대는 조선인민군, 인민군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국군을 창설했고 같은 시기에 북한은 인민군을 만들어갔다. 한국전쟁은 국군 대 인민군의 대결이자 충돌이었다. 전쟁의 참극으로 가는 가장 진하고 굵은 화살표가 바로 인민군이었다.
남북 모두 창군이라는 국가적 과제는 건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진행됐다. 남한에서는 미군의 이니셔티브 아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에 비해 북한은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 소련이 보낸 고려인, 국내의 사회주의자 네 그룹이 연립하면서 경쟁하는 구도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 각지에서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치안조직과 군사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치안확보가 우선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이나 군사단체를 용인하지 않았다. 남한의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킨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2일 북한의 모든 무장단체들을 해체해 이들을 각 지방인민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보안대로 조직했다.
치안 다음은 군대였다. 북한에서도 1945년 말부터 구체적으로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북조선5도행정국(소련 군정의 중앙행정기관)은 군사담당 부서로 보안국을 설치했다. 보안국 중심으로 육·해·공군의 모체가 되는 각종 보안기구를 육성하고, 훗날 정규군의 기간이 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에서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치안의 골격으로 부활시킨 다음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한 것과 비슷한 행보였다.
▲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회의장에서 소련 측 스티고프 수석대표가 연설하고 있다(1946. 3.). |
ⓒ 박도/NARA |
북한은 당장의 국경 경비를 위해 1946년 초에서 그해 중반까지 38경비보안대와 국경경비대를 창설했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 20일)에 앞서 북한은 토지개혁과 군대창설을 추진함으로써 향후 독립정부의 토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본격적인 군대조직은 1946년 8월 보안간부훈련소를 개편해 창설한 경보병 사단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인민군 보병부대의 모체다. 창설 초기의 경비대 보안대 보안간부훈련소의 간부는 대부분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맡았다. 그 이후 본격적인 창군과정이 확대되면서 조선의용군 출신, 고려인 출신, 국내공산주의자들 모두 참여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은 해외의 정치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입북했다. 그들은 소련군 위수사령부의 부사령관직을 도맡았기 때문에 훗날 인민군 창설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한 셈이었다.
반면에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일제 패망 직후 만주에서 조선인 부대를 창군해 조선혁명의 무력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것은 소련군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여해 국민당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북한에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된 뒤에야 입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병종부대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인민군 창설과 성장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다. 고려인들은 독자적인 조직이나 창군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 소련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창군사업에 가장 늦게 참여했다.
군대창설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소련군사령부에 있었지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 행정부)가 성립되면서 점차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이양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군사담당 부서는 여전히 보안국이었다. 보안국에 대한 행정지휘권은 1947년 2월 22일 '임시'라는 명칭을 떼어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면서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김일성 유일체제'의 탄생
북한의 인민군에 대해서는 김선호 박사(현대사)가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북한의 인민군 창설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이를 간추려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조선인민군>이란 두툼한 단행본을 내기도 했다.
김선호 박사는 이 보안국 시기에 향후 북한 정규군의 정치사상 체계의 원형이 출현했다고 분석했다. 하나는 중국군과 소련군의 정치간부 제도를 차용해서 인민군의 문화간부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안국이 북한의 기관·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1945년 11월부터 검열을 통해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인민들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으로 구분해 반혁명세력을 군대에서 솎아냈다. 인민군의 인적구성에서 친일 지주 부르조아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노동자 농민 사무원과 같은 혁명친화적인 계층으로 채운 셈이다. 인민군이 반혁명세력을 솎아낸 것은 남한에서 국방경비대에서 좌익 성향의 장병들을 축출한 숙군사업과 유사하게 군의 정체성을 더욱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세 번째는 보안국이 북한지역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의 영도사상을 기관의 지도사상으로 채택하고, 동북항일연군의 혁명전통을 유일한 것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향후에 수립된 김일성 유일체제의 역사적 맹아였다는 게 김선호 박사의 분석이다.
당시 북한은 여러 세력이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추구했지만, 군대에서만큼은 통일전선이 아니라 노동당 중심의 단일조직으로 구축해갔다. 인민군은 '조선로동당 규약'에 분명히 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라고 명시돼 있다. 국가의 군대인 우리 국군과는 제도적 위상이 다르다.
▲ 책 <한국전쟁2>에 실린 북한 인민군 사진 |
ⓒ 박도/NARA |
조선인민군의 창설은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입법부)와 북조선인민위원회(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입법부의 입법절차를 거쳐 행정부가 집행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해 5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개편해 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이 시기에 인민군은 노동당에 비해 더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소위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했다. 군을 앞장세우고 군을 중시하는 선군(先軍)정치의 전통은 이미 인민군 태동기에 발아한 셈이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는 물론 지금의 김정은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7년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북은 본격적으로 단독정부를 추진했다. 그 중대한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1948년 2월 8일 공식적인 조선인민군의 창설이었다. 인민군은 전체 한반도에서 조직된 최초의 무력조직이었다. 이날이 북한의 건군절, 곧 인민군 창설일이 됐다. 최초의 인민군 사령관은 최용건, 부사령관은 김책이었다. 한국전쟁을 개전한 1950년에는 김일성이 총사령관, 최용건이 부사령관이었다.
참고로 북한의 건군절은 한동안은 4월 25일이었다. 1978년 김일성은 자신이 1932년 항일 빨치산 부대를 조직한 4월 25일이 진짜 조선인민군 창설일이라면서 바꿨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다시 2월 8일로 환원했다.
이 시기의 인민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창군이념의 정립이었다. 북한은 인민군의 창군이념에서 조선의용군이나 고려인 또는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나 무장투쟁 역사는 배제하고 김일성의 항일운동과 항일유격대로 단일화했다.
당시의 북조선로동당 지도부는 1948년 3월 이후 각 정치세력이 분점하고 있었지만, 인민군에서는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창군이념을 김일성이 독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훗날 북한이란 국가가 김일성 유일체제로 귀결되는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었다.
두 개의 군대... 일촉즉발 위기에 놓인 한반도
▲ 책 <한국전쟁2>에 실린 인민군 기갑부대 |
ⓒ 박도/NARA |
창군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민족 전체의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시시각각 전쟁으로 다가선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정부수립 이후에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국토완정론(國土完征)을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인민군 확군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를 최종적으로 점령하자 북한은 확군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50년 6월 당시 인민군은 7개 정규 보병사단, 3개 예비 보병사단, 1개 기계화여단(탱크여단), 해군, 항공부대(비행사단), 그리고 직속부대를 보유한 공격형 정규군으로 완성됐다. 공격형 정규군이 완성된 가장 큰 무장의 토대는 철수하는 소련군이 놓고 간 잉여무기였고, 인력 확충과 전투력 증강의 가장 큰 전기는 만주조선인 부대의 입북이었다.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승전국의 분할 점령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로 완전히 분단되고 말았다.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일반적인 국가건설에서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과제지만, 분단이란 상황에서는 분단을 적대적 대결로 굳혀버리는 결정적인 고갯마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근원적으로 적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적과의 대결에 대비하는 군대조직이 양쪽에 적대적으로 세워졌다. 실제 북한의 국토완정과 남한의 북진통일은 김일성과 이승만의 정치적 지향이었지만 국군과 인민군의 현실적인 무력이 뒷받침되면서 더욱 강력한 힘으로 남북의 충돌을 추동해간 것이다.
분단이란 말은 서로 다른 것으로 나뉘고 갈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데칼코마니처럼 방향만 반대일 뿐 형태는 똑같아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지역을 민주기지로 강화시켰다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남한지역을 반공기지로 굳혀주는 강력한 외부의 힘이 됐다. 조선인민군은 국토완정을 실현할 혁명무력으로 성장했다지만, 그로 인해 남한의 국군은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반공무력으로 육성됐다.
서로가 상대방의 지배영역을 '빼앗긴 국토'로 인식했고, 상대방 정부를 미국과 소련의 꼭두각시로 규정했다. 북한에게 남한은 반혁명세력의 결집체였고, 남한에게 북한은 극도로 위험한 공산집단이었다. 이렇게 분단은 상대방을 압박하면서 이념으로는 반대라고 주장하지만 전쟁이라는 하나의 구덩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한국전쟁에서의 선제공격, 곧 남침의 주역으로서의 인민군이 있었던 것이다.
▲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전쟁 후 국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하다가 최근 들어 등록문화재 27호로 지정했다. |
ⓒ 윤태옥 |
▲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게 되는 인민군사령부 막사를 보러 왔는데 막상 단풍만 이토록 아름답다니.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냉소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