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구좌읍 송당리 1450번지(송당리 1445-1번지로 들어가서 1451-1번지와의 경계를 따라 70m 정도 지점에서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약 50m 지점에 묘가 있다.)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함덕리 출신.
출생년도 미상(1911년생 김일준에 대한 판결문에서 한영섭을 선배라고 지칭. 조선일보 1931년 기사에 22세라고 한 점 등으로 보아 1909 또는 1910년생 추정)
일본에서 공산주의 실천운동을 함.
1931.01.15. 동경에서 사망.
1931.01.19. 시신 향리에 도착.
1931.01.21. 제주청년동맹 함덕지부 맹원들이 한윤섭의 집에 모여서 ‘追悼 赤革 한영섭의 靈’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하라’는 내용의 기를 만들어 다음날 장례식에 세워놓았다.
1931.01.22. 대흘리에서 장례식을 지낼 때 제주청년동맹 함덕지부 맹원들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赤旗歌’와 같은 혁명가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1931.03.17. 송건호 등 제주청년동맹 함덕지부 맹원들이 각 30전 또는 50전을 내어서 비석돌을 매입하여 앞면에는 ‘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 뒷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흘린 동지였다’라는 항일과 계급의식 내용이 들어있는 비문을 새겼다. 그리고 같은 날 이 비석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동우물(함덕리 1002-109번지 고도물) 부근에 눈에 잘 띄게 세웠다.
이에 경찰은 형사들을 파견하여 3월 29일부터 청년 20여명을 검속하였다. 그리고 5월 6일까지 장기간의 취조를 거친 후에 검사국으로 사건을 넘겼다.
1931.05.06. 조천경찰관주재소 순사 2명이 증거를 확보한다면서 한영섭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비석을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비문 〈전면〉學生韓公永燮之墓
〈왼∼뒤∼오른쪽〉公은 淸州后人濟州入島始祖23世孫이시며 父晳堅母慶州金氏南平文氏의 長子로 서기1910년 5월 14일 出生, 京城 養正高普 5년 在學時 光州學生事件 主謀者로 數次 投獄, 1931년 1월 15일 於日本東京 弱冠 下世하셨으니 故鄕 靑年 同志들이 望思碑를 마을 동족 동산에 建立하였었고, 公의 ◉◉하셨든 書籍 500余 卷을 土台로 眞理探究하시다가 兩事件으로 日本警察에 檢擧當하여 其中 宋健浩 夫生鍾 金才童 同志는 獄死하시다. 舍弟 元燮長子 在瀅 立系 慰勞奉祀라. 子婦는 卓慶愛요, 孫은 定錫 旻錫 尙錫 東佑라. 서기1980년 春 朝天面 咸德里 弟元燮 謹竪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 지사가 동경에 유학 중 공산주의 계열로 독립운동을 하다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東京) 순천당병원에서 사망, 동월 19일 그 시신이 향리에 도착하게 되자 동지장(同志葬)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윤섭의 집에 모여서 '추도 적혁(赤革) 한영섭의 영',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鎭座)하라'라는 내용을 적은 만장(輓章)기를 만들어서 다음날 장례식에 세워놓았다.
동월 22일 한영섭의 조부 한정권(韓程權)의 집에서 대흘(大屹)리 장지까지 행상하면서 동지들과 적기가(赤旗歌, 혁명가)를 합창하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청맹원(靑盟員=함덕청년동맹회원)들과 의논 끝에 3월 17일 각각 30전 또는 50전을 내어서 비석을 매입하여, 비문은 송건호(宋健鎬)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이에 일제 경찰은 비석의 문구가 불온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함덕리에 형사들을 파견하여 3월 29일부터 청년 20여 명을 검속하여, 조기(弔旗), 비석, 상장(喪章) 등은 몰수하였다. 비를 세운 김일준(金日準), 부생종(夫生鍾), 김재동(金才童), 양구문(梁龜文=梁共根), 김두성(金斗性), 고종건(高宗虔) 등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 후에도 1931년 5월 6일 조천 경찰관주재소 순사 2명이 함덕리로 출장, 고(故) 한영섭의 부친 한문옥(韓文玉)에게 찾아가 본서(本署)의 명령이니 아들의 관(棺) 속을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장지로 가서 흙을 파고 관 안을 수색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불온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1931-05-14)에 실렸다. 이에 일경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졌다.(濟州抗日獨立運動史, 독립운동인명사전, 북제주군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의소리 2007-04-02)
이후 한영섭의 묘는 송당리 1450번지로 옮겼다.
《작성 2020-03-20, 보완 202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