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목) 이사야 63:15-19 찬송 28장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개역 개정)
- 이사야의 여호와 은총 회복 간구 -
어제 말씀(7-14절)에서 과거 여호와께서 선민에게 베푸신
구원 역사 회고를 통하여 선민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 이어
이제 63:15-64:12에서는 본격적으로 선민의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오늘 말씀에서는 먼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택하신
선민의 아버지요 구속자가 되심을 고백한 후(15-16절)
현재 범죄로 인하여 주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비참한 실상,
곧 대적에게서 기업을 유린당한 사실을 말하고
속히 선민에게 구원의 은총을 회복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7-19절)
한편 본문에서 구원 호소는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는
선민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서 제3부 3편인 제 58-66장에서 만세대의 택한 백성의
종국적인 구원에 대해 집중 거론하고 있는 문맥의 흐름에서 볼 때
본문에서 암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곧 죄성이 가득한 전인류가 사단의 세력에 묶여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것이며,
선민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는 이사야는
그러한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중보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롬8:34)
이러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의 은총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구속사의 핵심 진리를 재확인하며(엡2:8-9)
은총을 얻기 위해 회개의 기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을 깨닫는다.(행3:19)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부성에 대한 고백은
회개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시51:12-13; 눅15:7,10)
16절)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이사야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고백한다.
이사야는 이 고백을 본절에서 두차례 반복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호소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아무리 잘못하고 부족해도
그를 외면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아버지도 감정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식이 자기에게 잘못을 행하면 분노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며 부자 관계를 부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식을 집에서 쫓아낼 수도 있고
집에서 쫓겨난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외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아무리 자기 자식이 잘못을 범해도
그를 영원히 외면하거나 부정하지는 못한다.
집에서 쫓아낸 자식이라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항상 관심을 갖고 있으며
혹시라도 그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한다.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잘못을 뉘우치고 호소하면
언제 분노하였느냐 싶게 자식을 사랑으로 대해준다.
이사야도 바로 이러한 사실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지금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의 장자라고 하셨다.(출4:22-23)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먼저 아버지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신을 모를 때에
그들을 불러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고 당신의 호적에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비록 잘못을 범할지라도
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실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요일4:8)
그러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잘못을 범했다는 이유로
그를 영원히 버리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 아버지 중에는 자기 자식이 잘못을 범하면
그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아버지도 간혹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신 사랑의 하나님은 그리하시지 못한다.
이사야는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정하시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이 잘못을 행하면 그를 향하여 진노하실 수도 있고
잠시 외면하실 수도 있지만 결코 영원히 그리하실 수는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치시기는 하였지만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사실이나
가나안에서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 그들을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셨으나
결국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신 사실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자들이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영원불변의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범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호소하면 들어주신다.
아무리 중대한 죄를 범하였다고 해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호소하기만 하면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리므로 잘못을 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호소해야 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