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덕이의 묘는 산골인 서운면 청룡리와 산평리의 경계 지점, 경기도와 충남의 경계인 개울가에 있다.(전해 오는 설)
남사당패의 바우덕이라는 이름은 3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바위틈에 버려진 아이를 주어다 기르면서 “바우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박우덕”인데 부르다보니 바우덕이가 됐다는 설이다.
세 번째는 지금 안성시에서 주장하는 설로 김암덕(金岩德)인데 암덕을 풀어서 바우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지명이나 인명은 대개 우리말로 된 것을 한자로 기록한 경우가 많으니 한자 이름을 한글로 풀어 쓰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 들면 어려서 오래 살라고 돌바위라고 불리던 사람을 한자로는 돌암(乭岩)으로 표현하고 솥배미골은 지금 안성맞춤 랜드 인근 골을 말하는데 한자로는 정야미동(鼎夜味洞)으로 쓴다. 솥정(鼎)의 “솥”과 밤야“夜”의 “밤” 맛미(味)에서는 그 음 “미”를 골동(洞)에서는 “골”을 따서 “솥밤미골”-“솥배미골”이 되는데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이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씨가 생긴 것은 박, 석, 김 등 9개의 성씨를 제외하면 대개 고려 초에 생겼다고 하며 천민들은 조선말까지 성씨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고 남사당패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집단이었고 천민들의 집단이었으니 김암덕, 박우덕은 잊어버리고 그냥 “바우덕이”라고만 부르면 안 될까?
내가 25년 전에 청룡리 동네 사람들의 안내로 찾아본 바우덕이 무덤은 개울가에 청개구리 무덤과 같이 비가 오면 떠내려갈까 걱정되는 곳에 가르쳐 주지 않으면 봉분이랄 수도 없는 흔적만이 있었다.
누군가가 소나무 두 개를 칡으로 묶어 만들어 놓은 외나무다리 건너에 있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바우덕이를 청룡리에서도 산평리에서도 묻는 것을 반대하여 그 경계 지점에 산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개울가에 묻혔구나.
얼마나 주민들의 천대를 받았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그가 살아서 가지고 있었다는 그 재주를 양반 사회에서는 이렇게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생각하니 그 후예 남사당패를 재건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내 가슴이 미어졌었다.
만약에 바우덕이가 당상관(정3품 이상) 상당의 벼슬을 했다면 청룡리 양반들이 그렇게 홀대 할 수 있었을까?
바우덕이가 꼭두쇠였다면 그 드센 패거리들이 아무리 양반 중심사회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그렇게 대접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조선시대에 기예인들이 벼슬을 받은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들이 받은 벼슬은 대개가 종9품인 선달, 동지, 참봉 등이었다고 하니 13품계를 뛰어 넘는 정3품 벼슬은 생각하기도 힘들다.
바우덕이의 당상관 벼슬 얘기는 경복궁 중건 당시 을축(1865년) 3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는 데서 시작이 된다.
옥관자 얘기도 두 개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읍내 돌우물(石井) 두레가 민참판의 추천으로 경복궁 공사장에서 놀고 그 공로로 옥관자를 받아 그 기에 옥관자를 의미하는 두 개의 노란색 원을 그려 넣고 그 기를 관자기(冠子旗)라고 불러왔다는 설과 관자기를 하사받았다는 설로 그 뒤로 돌우물두레가 영좌두레가 되어 다른 두레의 기 세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룡리 사당패인 바우덕이가 같은 곳에서, 같은 시기에 옥관자를 받았다는 설이다.
나는 돌우물 두레(남사당패)와 바우덕이패가 같은 곳, 같은 시기, 같은 이유로, 같은 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한패를 이루어 간 것을 의미한다고 추측한다.
다만 그들이 남자로만 구성된 남사당패와 바우덕이를 포함한 여자들로 구성된 사당패가 한 패가 되어 가서 공연을 하고 성공하여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사용하는 옥관자를 하사 받음으로서 실권자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그 기예가 출중함을 인정 받았으니 이들이 그 이후에도 때와 곳에 따라 같은 패거리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옥관자를 당상관 이상 벼슬아치들이 사용한다고 해서 당상관 벼슬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바우덕이의 재주가 좋았다고 어린 여자가 남자로만 구성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남사당패의 연구라는 책에서 1910년대에 바우덕이패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고 1865년도의 바우덕이가 45년 뒤에 꼭두쇠를 했다는 것도 비약이다.
시기가 다른 두 얘기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고 그 중 하나는 버려야 된다.
버려져서 아무도 돌보지 않던 바우덕이의 무덤은 말하고 있다.
첫댓글 소설로 씌여진 책을 몇년전 읽으면서 왠지 그 정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너무 부풀려지고 꾸며진 이야기라 그랬던 것일까요? 아님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뻥튀기 한걸까요~?
바우덕이가 1865년에 옥관자 받고 6년 뒤에 죽었다는데
어떤 사람이 쓴 책에는 바우덕이의 애인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사람을 숨기기 위해서 바우덕이가 줄을 타며 일본 순사들의 시선을 끌다가 줄위에서 떨어졌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역사 소설은 기본을 역사적 사실에 두어야 될 것 같은데 글 쓰는 분들이 허구를 너무 많이 넣어 독자들의 혼란을 유발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덕분에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ㅎㅎ 저도 오래 전에 책으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암튼 문맥이랑 내용이랑 이상했습니다만 굳이 나설 일이 아니다 싶어 그냥 있었더랬습니다만 사실 옳은 역사가, 진정한 사실이 필요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름 석자 걸고 매년 행사를 진행하니 말입니다.
조심스럽게 여쭙니다...우각님은 안성남사당을 발굴 하신 초기 보존회장님이 아니신지요? 이 글을 안성문화원 홈페이지에 올려도 되는지요? 안성 문화원 홈페이지가 활성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유익한 글 옮겨 나누고 싶습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로 시나 문화원에 작은 물결이 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바우덕이가 벼슬을 하지 않았고 꼭두쇠가 아니었다해도 바우덕이는 훌륭한, 안성이 자랑할 만한 기예인이었는 데
모 기관을 중심으로 무리하게 몇 사람들에 의해서 덧 칠해짐으로서 오히려 실존 인물인지의 의문 등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오래동안 남사당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