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수(鳳凰愁)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라면,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문장』 13호, 1940.2)
[어휘풀이]
-봉황수(鳳凰愁) : 봉황의 근심과 시름. 여기서는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한 우리 민족 의 아픔을 상징함
-두리기둥 :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
-단청 : 옛날식 집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림. 또는
그림이나 무늬
-둥주리 : ‘둥우리’의 방언
-옥좌 :임금의 자리
-추석 : 바닥에 까는 장식용 돌
-패옥 : 조선 시대에 왕과 왕비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
-품석 : 조선 시대에, 품계를 새겨서 대궐 안의 정전(正殿) 앞뜰에 세운 돌. 두 줄로 되어
동서 양반이 차례로 늘어서게 되어 있다.
-정일품 : 조선 시대의 18품계 가운데 첫째 등급, 문곤의 대광보국숭록대부, 보국숭록대부, 종친(宗親)의 현록대부, 흥록대부, 의빈(儀賓)의 성록대부·수록대부 등이 이에 해당
된다.
-종구품 : 조선시대의 18품계 가운데 맨 아래 등급, 문관의 장사랑, 무관의 전력부위, 토관
(土官)의 시사랑·탄력도위, 잡직의 전근항 따위가 있다.
-바이 : 전혀
-구천 : 아주 높은 하늘
-호곡 : 소리 내어 통곡함.
[작품해설]
이 시는 퇴락(頹落)한 고궁의 옥좌 앞에서 몰락한 왕조와 국권의 상실을 회고하면서 비극적인 역사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자품이다. 역사에 대한 감회라는 관념적인 주제를 구체적이면서 평범한 시어를 적절히 이용하여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시인의 역사 의식과 조국애가 낭만적 정조를 바탕으로 잘 드러나 있다.
행과 연의 구분없이 6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이지만, 시상의 흐름에 따라 기·승·전·결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첫 번째 문장으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통해 국권 상실의 비극을 보여 주며, 둘째 단락은 두 번째 문장으로 사대주의의 슬픈 역사와 그 말로를 통해 망국의 허망함을 보여 준다. 또한 셋째 단락은 세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로 역사의 무상감과 비애의 인식을 드러내며, 넷째 단락은 여섯 번째 문장으로 망국의 한(恨)과 그 극복 의지를 봉황새에 감정 이입시켜 표출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승의 앞 단락은 퇴락한 대권의 모습을 서경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며, 전·결의 뒤 단락은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ㅇ르 노래한 부분으로, 이 시는 선경 후정의 방법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치하라는 현실적 절망감에 빠져들지 않고 냉철한 시선으로 조국의 패망 원인을 분석한 시인은 그것을 ‘큰 나라 섬기다 기미줄 친 옥좌’라는 사대사상(事大思想)으로 단정한다. 그리고는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르랴만’에서처럼 나라를 잃기 이전의 조선의 역사 또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탄식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보다 푸른 하늘 밑에서 추석을 밟고 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나라가 망해서 이제는 패옥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인 없는 품석들만 줄지어 서 있기 때문이다. 망국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이제 몸 둘 곳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조국의 패망에 대해 눈물 흘리는 것이 부질없음에도 불구하고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며 망국의 설움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여기에서 ‘구천’은 저승의 ‘구천(九泉)’이 아닌,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뜻의 ‘구천(九天)’이다. 화자는 이러한 구천을 바라보며 조국이 해방될 그 날을 꿈꾸게 된다. 이것은 곧 사대주의로 일관된 민족 주체성의 부재를 비판하는 동시에 조국 해방은 민족 주체성의 회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시인의 투철한 역사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봉황’은 망국의 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시인에게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지향의 대상인 것이다.
[작가소개]
조지훈(趙芝薰)
본명 : 조동탁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 전문 강원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조직
1947년 고려대학교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196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