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물 사전] 우편함 ⓒ이현경 |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점이 내게 신뢰를 주었다. 이따금 우리는 몇 시간이고 걷곤 했다. 언덕을 지나 강을 끼고 걷다 보면 커다란 유리공장이 있었다. 앞마당에는 깨지고 흠이 나 상품가치가 없는 유리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는데, 해 질 무렵에 그 유리탑 앞에 있으면 불더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딘가 돌이킬 수 없이 헤집어진 것처럼 아프기도 하고 물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하기도 했다.
이제 돌아갈까, 하고 말을 꺼내는 것은 늘 내 몫의 일이었다. 우리는 유리를 관통하던 무수한 빛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끔 내가 굉장했지? 물으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몇 시간이고 걸어 돌아오는 동안. 해가 지고 어둑해져 가로등 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배회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의 곁에 있다는 생각에 벅찬 마음이 들면서도 그의 비스듬한 어깨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이 불안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마음으로만 여러 가지 말을 하며 강변과 언덕을 가로지르기 일쑤였다.
우린 약속을 하고 만난 일이 없다. 그는 조용히 찾아와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내가 없는 방에서 울리는 그의 노크 소리를 상상하곤 했다. 쉽게 외출을 할 수 없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일도 관두게 됐다. 내가 먼저 찾아간 적은 없다. 나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원래는 내가 살던 방에 살았다는 것 외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그의 뒷모습이 처음의 기억이다. 그는 가만히 자신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확인하라는 듯 내게 내밀어 보여주곤 묵례한 뒤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그렇게 우편물을 찾으러 오던 일이 인연이 되었다. 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들렀으므로 종종 나는 그의 우편물을 모아놨다가 그가 올 때쯤 나가 건네주었다. 단정한 글씨체였다. 꾹꾹 눌러 적은 편지 봉투의 이름이 어쩐지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누구예요? 편지 보내는 사람? 묻고 싶었지만 답하지 않을 것 같아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얼굴을 찌푸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잡은 손을 놓으며. 그럴 때는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더미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몇 통의 편지를 훔쳤다. 거기에는 몇 편의 시가 적혀 있던 적도 있고 짧은 안부가 적혀 있던 적도 있다. 발신인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소인을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편지는 멀리서 왔다. 나는 그 편지들을 읽고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강가를 걸으며 수면에 드리운 두 개의 긴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리공장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낯선 얼굴로, 태양을 등지고 서서. 이제 못 올 거야. 빛은 지면을 태울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고 나무들은 풍경화의 그것처럼 고요하게 흔들렸다. 유리탑의 거미줄 같은 실금들이 반짝였다.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나는 돌아갈까, 하곤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미지근한 땀이 손안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후에도 편지는 계속 왔다. 주소를 몰라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오기 전날 밤, 편지를 모아 마당에서 태웠다. 불을 보며 산책의 나날들을 생각했다. 공중으로 흩어진 문장들을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 집 우편함에 지금도 편지가 도착하는지도. 그 후에 다시 그 길들을 걸어본 일 없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말수가 적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백은선(시인) |
백은선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2년 <문학과사회>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_ 한겨레 문학웹진 <한판> 201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