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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능히 믿지 못하는 것은
요 12:37-43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 12:37-43 / [유대인들의 불신앙]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이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38)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ㄱ) `우리가 들은 소식을 아무나 믿겠느냐? 여호와의 권능과 승리가 그토록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도대체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ㄱ. 70인역 사53:1) 39) 또한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40) ㄴ)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ㄴ. 70인역 사6:10) 41)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주님을 가리켜 이러한 예언을 한 것이었다. 42) 유대인 지도자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내색하지 못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을 회당에서 쫓아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43)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영광을 더 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표적을 믿지 않는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37-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53:1; 6:9, 10)대로 듣고도 믿지 않았으며,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하여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은 어느 시대나 큰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누가 그것을 믿음으로 연결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이란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신 표적들이 유대인들이 보고 믿기에 충분한 분량이었음을 알려주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가르침을 받고도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눈이 먼 상태로 하나님의 뜻이나 그분이 하시는 일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완고하게 하다'라는 말은 '돌같이 굳게 하다, 무디게 하다, 어둡게 하다'의 뜻으로 그들의 굳어진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는 자로 자부하였지만, 예언의 핵심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로 하나님의 뜻과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과 자만이 그들을 완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42-43) 관리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회중으로부터 추방되거나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믿음을 시인하지 못했습니다. 출교란 회당에서 쫓아내다라는 뜻으로 그들은 회당에서 추방되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유대 사회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추방되면 유대 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의 삶은 분명히 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회당은 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출교를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일 자체였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사람 공동체를 더욱 두려운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공직자들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지만 출교될 것이 두려워하여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 신앙의 역설을 잘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개인 신앙의 문제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안전이 더욱 중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진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으로는 믿음의 열매를 보기 어렵습니다. 바른 믿음의 고백이 바른 결실을 보게 할 것입니다.
적용: 믿음이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안타까움입니다. 말씀이 어려워서 못 믿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닫혀서 못 믿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그 분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께서 나른 긍휼히 여기시고 나른 돕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그 어느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나를 믿는 자는
요 12:37-50 / 이동휘 목사
1. 만약 지금 이 시대에 모세같은 지도자가 나타나, 독도를 향해 손을 내밀자 바닷물이 갈라져 독도까지 바닷길이 마른 땅이 되어 자동차로 달려갈 수 있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바 ‘모세의 기적’이 나타났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까요? 아마 그러한 기적을 본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출애굽해서 홍해 광야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바로가 장자 죽음의 재앙을 떨쳐버리고 전열을 정비하여 전차 600대와 애굽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를 보자 기겁을 하며 모세를 원망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출14:11-12)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출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들어 바다 위로 내밀자 하나님께서 큰 동풍이 불게 하시자 바닷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홍해를 건너갔습니다. 이 뒤를 이어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자, 모세가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바다의 힘이 회복되어 바닷물이 애굽 군대를 덮쳐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모두 수장해버렸습니다.(출14장) 이같은 장면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출14:30-31)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광야 길을 걸었겠습니까?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마라에 이르게 되었는데 물이 써서 도무지 마실 수 없다며 또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출15:22-24)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한 한 나무를 물어 던져 물이 달게 되어 모두가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지 둘째 달이 되는 때,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며 또 다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출16: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 먹고 싶은 고기를 실컷 먹도록 해주셨습니다.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르디딤에 이르게 되었을 때 또 다시 마실 물이 없다며 이번에는 원망불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일 기세였습니다.
(출17:1-4)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출17:7)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이제는 믿음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까지 의심하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 후에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백성도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없는 모습은 가나안 약속의 땅을 정탐하기 전에도 나타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을 뽑아 정탐보냈습니다. 이들은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과 각기 보고합니다. 이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군이 먼저 보고하는데,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긴 한데 그 땅 거민들과 성읍들을 볼 때, 점령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민13:27-33)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러한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통곡하며 모세를 원망하며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다른 지도자를 세우려 합니다.
(민14:1-4)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보다 못해 함께 정탐했던 갈렙과 여호수아가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가지라며 이렇게 격려합니다.
(민14:6-9)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러나 정탐군들 다수가 불가능하다는 믿음없는 보고에 기울어져 오히려 백성들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나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민14:11)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출애굽 하기 전부터 10가지 재앙,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기적, 반석에 물이 나와 해갈했던 기적, 날마다 지금까지도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의 기적, 등등 수많은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지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고, 오직 믿음을 가진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그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민14:30-38)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2.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이신 것은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이신 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믿고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기적과 능력을 나타내실지라도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을 쉽게 가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특히 직접 하나님의 기적이나 능력을 보지 않고 귀로만 들었을 뿐인데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출4:20) 하나만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애굽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것을 말합니다. 바로 왕이 턱도 없는 소리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여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자 나일 강을 비롯하여 모든 물들이 피로 변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구리 재앙,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 파리 재앙 등 9가지 재앙을 거듭 나타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왕은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결국 장자 죽음의 재앙을 내리자 애굽 전역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임을 당하자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했습니다. 그 이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해갈하게 되었고, 등등의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 등을 모세가 애굽에서 돌아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낱낱이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드로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찬양드립니다.
(출18:8-11) (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9)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10)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 등을 직접 보지 않고 전해 듣기만 하고서 하나님을 믿은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능력 등을 보고 믿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 관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드러내놓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 유대 사회에서 추방당할까봐 그 믿음을 감추고 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권세 있는 교훈과 수많은 능력으로 많은 기적을 나타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알게 하시자,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몹시 불쾌하게 여기며, 이를 그냥 방치하게 되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으로 여겨 예수 믿는 사람들을 추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원들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자리가 어느 자리에서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감추지 말고 밝히 드러내며 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위협과 험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궁금해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영적인 비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왔던 이 사람이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겠습니까? 또는 ‘어머님, 왜 날 나셨나요?’라며 부모를 얼마나 원망하며 지내왔겠습니까? 소경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하루하루 구걸하여 연명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불운하게 태어난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부모에 대한 원망 등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메말랐던 눈물이 흐르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며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와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이제 존재 의미를 찾고,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시고 “(요9:6)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을 밷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다는 것은 예수께 기대되는 신비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상당히 기분 나쁘고 비합리적이며, 비위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은 그러한 예수의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의 인격이 고상하거나 믿음이 깊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소경은 자신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말씀으로 존재 의미를 찾게 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어떠한 행동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침을 밷아 진흙으로 이겨 자신의 눈에 바르는 예수의 행동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고 예수께서 명령하신대로 실로암으로 가서 씻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평생 어두웠던 삶이 훤하게 밝아졌습니다. 이 엄청난 기적에 놀란 “(요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9:9) 혹은 그 사람이라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이에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여러 말 할 것 없다 바로 내가 너희가 말하는 그 사람이다.’며 자신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요9:10)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을 때 “(요9:11)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며 사실 그대로 자신의 예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놀랍게도 눈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와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거나 목격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눈을 뜬 소경은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시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순종하실 때 그의 인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을 접하게 된 바리새인들이 혈안이 되어 그 소경되었던 사람을 소환해 갔습니다. 함께 기적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이 안식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검증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며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그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왜곡시켜 만든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떤 병환자일지라도 치료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회당에 가다 담장이 무너져 다리가 부러졌다면 부러진 부분을 소독하는 것은 괜찮으나 부러진 다리를 바로 잡아 깁스를 하고 항생제를 먹이는 등 치료행위를 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소경을 완치시켜 주었다는 것은 명백히 안식일을 범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권세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 눌려 주가가 하락하여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바리새인들인지라 예수를 잡아 죽일 호기를 잡았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한 예수를 일단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결론을 내리고,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요9:17) 안식일에 네 눈을 뜨게 한 예수를 너는 어떤 사람으로 여기느냐?” 예수에 대한 신앙여부에 따라 그 사람도 처벌하겠다는 뜻입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자칫 안식일을 범한 예수와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니이다.”며 예수를 증거합니다. 분명 이러한 그의 증거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각오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떠한 불이익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위협적인 심문에도 막무가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사람을 일단 제쳐두고 이제 그 부모를 소환해서 심문합니다. “이 사람이 네 아들이냐?”,“정말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났느냐?”,“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이에 그 부모는 “(요9:21)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당사자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사실 “(요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문둥병자처럼 유대 공동체에서 영구히 격리되는 일종의 저주와 같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출교 처분받은 사람과는 그 누구도 상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상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교를 당하게 되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족 중 하나만 출교당해도 그 집안은 몽땅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 유대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경되었던 사람이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했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마다 출교키로 결의한 마당에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이 고백은 로마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드렸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황제를 ‘주’로 숭배하던 로마 당시에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오직 예수만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재산 몰수, 사회적 신분 지위 박탈 등은 물론 사자굴, 십자가 처형, 화형 등에 처해져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백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공개적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는 생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소경되었던 자는 출교를 각오하고 출교처분권을 가진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공개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전향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 거듭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요9:27) 아니 내가 그렇게 여러 번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여기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시렵니까?”라는 말에 모멸감을 느낀 바리새인들이 “(요9:28)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며 반박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이 “(요9:30)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며 반문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자신을 눈 뜨게 해준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라고까지 증거합니다.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출교당할 위기 상황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는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불이익과 처분을 받을지라도 오직 예수와 생명을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진리가 되시는 예수 편에 서서 예수를 증거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생명력을 지니고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사람의 성장해가는 믿음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9절) 그 다음으로는 7절에 보면,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자란 증거입니다. 그리고는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하시나이까?”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분”(33절)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공개할수록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갈수록 신앙의 진수를 증거하는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은 견디다 못해 “(요9:34)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면서 결국 “쫓아내고” 맙니다. 쫓아냈다는 것은 출교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즉결처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카멜레온처럼 환경이나 분위기에 따라 신앙 고백이 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 어느 환경에서도 한 색깔, 한 목소리로“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공개적 선언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불이익이나 핍박이 따른다 해도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므로 가족들이나 친척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서 고립되고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믿으려는 사람들은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므로 더욱 더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소경되었던 사람은 출교당함으로 가정에서 쫓겨났고,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유대교에서는 배교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유대인 사회에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이웃들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소경되었을 때보다 더 못한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요9: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9: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멸시 천대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가 누구이신가도 알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예수의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인해 이렇게 엄청난 고통과 멸시를 받고 가족들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음에도 나를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삶과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는 고백과 경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공개적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고 선언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처럼 예수 믿음 때문에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고 손해보는 상황, 삶에 위기 상황에 처할지라도 주저없이 날마다 예수 믿음을 공개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데 편한 길, 쉬운 길, 남한테 싫은 소리 하나 듣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자신의 신앙을 공개함으로 사서라도 고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오는 그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사람, 어떤 신변의 위험과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진리 편에 서는 사람이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레갑 족속은 비느하스와 욥의 가문처럼 그 후손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B.C.588년경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입니다.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나라 민족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위기상황이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거듭되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으로 일관했습니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치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왜곡되거나 매장되는 가운데 참된 선지자 예레미야가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나라 민족의 멸망이라는 심판과 그에 따른 엄청난 환난으로부터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답답한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쳐 돌이키고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레갑 집안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초대하여 성전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렘35:1-2) ‘성전의 한 방’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밤에 성전을 봉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골방’을 말합니다. 당시 성전에는 3층 규모에 30개의 골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골방 중 어느 한 곳에 레갑 집안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 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 한 골방에서 CCTV도 없는 곳에서 술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레갑 족속들은 이렇게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레갑의 아들인 우리 조상 요나답이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들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라. 또 너희는 집도 짓지 말고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지도 말고 항상 천막에서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잠시 머무는 이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레갑의 아들인 우리 조상 요나답이 우리에게 한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들이 평생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살 집도 짓지 않으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곡식을 소유하지 않고 천막에 살면서 우리 조상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습니다.’(렘35:5-10)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방 족속인 레갑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결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명령한대로 순종하여 오늘날까지 300년 동안 그 믿음을 지켜오고 있는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은 내 종 선지자들을 수도 없이 부지런히 보내어 ‘악한 길에서 돌아서 회개하고 우상숭배하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라.’ 고 했으나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선언한 재앙을 내리겠노라.” 그리고 자그마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일치하는 조상의 명령에 대대로 순종해온 레갑 집안 사람들에게는 그 후손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자손으로 축복하셨습니다.(렘35:12-19)
레갑 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같은 족속으로 300년 전 가나안 땅에 이주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자손손 그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하나님 말씀에 엄격하게 순종했습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보다 더 뛰어난 믿음을 이어왔습니다. 레갑 족의 선조 요나답(여호나답, 왕하10:15)은 자손들에게 단 한번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 집을 짓지 말고 장막생활을 할 것’ 등을 명령했을 뿐인데 그 자손들은 그 명령을 수 백년 동안 기억하고 순종하며 믿음을 굳게 지켜왔던 것입니다. 레갑 족의 선조 요나답은 B.C.830년경 인물로 당시 사회는 부패할대로 부패하고 부조리와 불의, 그리고 각종 우상숭배가 판치는 퇴폐적인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경건한 신앙을 보존하여 하나님만을 마음의 기쁨으로 삼고(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 인생을 영원히 가치 있는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썩어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집을 짓지 말 것)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도록 하기 위해 장막생활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 모아놓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지만 아름답고 거룩한 신앙 전통, 가훈을 지켜 술잔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자신들은 포도 재배조차 하지 않으며, 세상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기에 집도 짓지 않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경건한 자손들이 되기 위해 장막생활을 해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가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방인을 구분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에 진실되게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는 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마3:9)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롬3:29) 레갑 족속에게 축복하신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영원히 누리게 되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봉사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술, 담배를 권할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술, 담배를 할 수 없습니다.’라며 그리스도인됨을 공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모나 형제, 친척들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조상숭배를 요구할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절대로 경배할 수 없습니다.’라며 그리스도인됨을 공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혼하자는 처녀 총각이 예수 믿지 않거나 결혼식 날짜를 주일날로 잡게 되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을 주일에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며 그리스도인됨을 공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예수 냄새가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냄새가 나야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냄새가 나지 않고 세상 냄새가 나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일찍이 돈에 눈을 떠 부자가 되고, 권세에 눈을 떠 출세했을지라도 예수를 보지 못하면 영적 소경이 되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여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그리스도의 향기’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2:14-16)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공개적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 냄새, 향기를 나타내지 못하고 사셨다면 이제부터 공개적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날마다 그리스도로 시인하며 순종하는 생활로 눈이 밝아지는 기적을 체험하시고 공개적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현대역으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입니다.” 라고 읽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가를 알아보고 자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뜻이고, 이는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가?’라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1:1-14입니다.
(요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는데 그곳 주둔군의 한 장교, 백부장이 예수께 나와 간구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고 하시자 그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내 집에까지 오시게 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나으라는 말씀만 한마디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웃사람을 모시고 있고 제 아래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부하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내 하인에게 ‘이 일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에 놀라시며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스라엘 온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동서 사방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니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니라.” 그리고서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시각에 백부장의 하인이 나았습니다.(마8:5-13) 예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백부장의 간구에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치유 기적을 행하실 때 주로 병자들이 찾아오거나 만난 자리에서 만져주시거나 말씀하시므로 치유되었습니다. 직접 찾아가셔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신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점령자인 로마 사람들을 이방인으로서 경멸했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으로 멸시했었습니다. 이러한 민족간에 장벽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직접 가서 고쳐 주시겠다는 것은 민족간 편견과 증오의 벽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허물어 버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마8:8-9)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라고 말함으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그 앞에 겸손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는 고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자 하나님,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백부장은 믿음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군대 조직에서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명령하는 상관과 그에 복종하는 부하와의 관계 속에서 질병과 자연세계를 말씀 한 마디로 복종시키시는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 세계 최고의 통치자 황제 이상의 존재로, 다시 말해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만물의 통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과 권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세계의 원리까지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를 보여주는 답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백부장의 지혜롭고 겸손한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8:10-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 예언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의 인격과 그의 본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누구보다 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백부장,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아니하고 누구나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는 유대인일지라도 이 백부장같은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신 예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각에 하인은 치유되었습니다. 자신이 과연 믿음 안에 있는가를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범사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신앙과 신앙의 원인
요 12:37-43 / 김영규 목사
철저한 불신자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든지, 어떤 일을 행하셨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든지, 구세주이시든지, 믿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 기적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표입니다. 그 기적의 하이라이트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기적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나병환자를 고친 모든 기적의 결정판이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입니다. 이런 기적을 보고도 안 믿는다면 더 이상 기적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지 않습니다.
꽤 오래 전, 개척 당시 얘깁니다. 어떤 임종을 앞둔 분이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연세도 많고 병이 위중한데 정신은 말짱했습니다. 대개 세상 떠날 때 쯤 되면 마음도 약해지고 무슨 말을 하면 잘 듣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주 고집이 강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전혀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또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전합니다. 그냥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습니다. 평생 믿지 않다가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고 떠나신 분들이 여러 분이 있습니다.
안 믿을 사람은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안 믿습니다. 믿을 사람은 죽으려 하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어떤 사람은 기어이 믿고, 어떤 사람은 기어코 믿지 않을까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불신앙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8) 하나님께서 불신앙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 예고대로 사람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임의로 이루어진 생애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생애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성취된 구약 예언을 53회나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 탄생, 애굽에의 피신, 헤롯 임금의 유아 학살, 예수님의 나사렛 거주, 선구자 세례 요한의 행적, 예수님의 가버나움 전도, 병자들의 치유 사역, 나귀 타고 행진하신 일, 유대인의 배척, 가룟 유다의 배반과 죽음,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일, 십자가에서의 목마름, 뼈가 깨지지 않음, 죽으심, 부활, 승천 등등. 예수님 생애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도 예언대로 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다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여줬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믿었을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39-41)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
얼핏 들으면 이 말씀은 참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들의 마음을 악하고 나쁘게 만드셔서, 회개하지 못하게 하시고,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왕 바로를 강퍅하게 만드셨다든지,(출4:21,7:3,9:12) 어떤 사람들에게 걸림돌과 함정과 올무가 되신다든지(사8:14),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사람들을 일부러 악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전혀 고의성이 없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의 회개를 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의 죄악 된 본성을 그대로 놔두셨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더 이상 나쁘게 만들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놔둬도 최대한 악하고, 나쁘고, 고약합니다. 그걸 뭐 굳이 더 악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충분히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물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성경을 보세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죄를 짓게 하려고 어려서부터 굳이 죄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감옥에 간 범죄자들을 보세요. 살인, 간음, 강도, 도적질, 사기, 폭력을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배운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대학에 보세요. 살인 학과가 있습니까? 간음 학과, 절도 학과, 사기 학과, 폭력 학과가 있습니까? 그런 과목 전공한 사람을 보셨어요? 그런 일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자동 습득입니다. 사람마다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저절로 죄인이 됩니다. 반대로 의롭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게 하려면 엄청난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 되는 일은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그냥 버려두셨더라면 지옥에 떨어질 죄인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킨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할아버지라 해도 다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고 지옥 갈 것이다! 오늘 불신 세상이 그렇습니다. 굳이 하나님 믿지 말라고 권하고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지 말라고 고사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다 그냥 안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이 그냥 놔두셨다면 다 불신자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한 자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이 말씀은 이사야 6장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9-10)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고, 마음을 둔하게 하라!
육체적인 눈과 귀를 말씀한 게 아닙니다. 마음의 눈, 마음의 귀, 영혼의 마음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눈과 귀가 멀었습니다. 보고 듣지 못합니다. 요즘 “고 아무개”란 사람 때문에 국민 모두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7살 먹은 아이를 납치하고 성폭행 한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런 범죄자를 대하는 사회적인 인식입니다. 범죄자의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다룹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일대학에 다니던 보니 갈런드라는 여학생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녀와 사귀다가 헤어진 남자친구가 밤중에 침실로 들어가 망치로 머리를 사정없이 가격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5주 동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해자인 남학생을 변호하기 위해 모금을 했는데 무려 3만 달러가 모금되었습니다. 그는 5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서 학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를 위한 운동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해자를 위한 인권 운동이 소위 문명국가라는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추세입니다. 1989년 4월 뉴욕에서 조깅을 하던 28세의 여인이 10대 소년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잔혹하게 구타하고 겁탈하여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의견을 쏟아냈습니다. “이 청소년들은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며, 그들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표출했다. 사회는 이 소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 그들은 분노와 울분에 싸여 있다.” 뭐 이런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들은 체포되었을 때,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 쇠파이프로 피해자의 머리를 때렸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울분은 무슨 개뿔이나, 그냥 눈이 멀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완악한 범죄자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피해자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자를 동정하고 옹호하고, 처벌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이 마치 진보적인 생각인양! 정말 개 같은 세상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흉악무도한 범죄를 한 번씩 당해보기를 강하게 권고합니다. 그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할는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해자의 인권만 들먹입니다. 사회적인 책임을 앞세워 개인적인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문제는 범죄에 대해 불감증의 사람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뻔뻔하고 당당합니다. 살해당한 사람보다 살인범이 더 큰 소리칩니다. 사기 당한 사람은 고통 받고 사기 친 놈은 떵떵거립니다. 성폭행범은 안면 보호를 받고 폭행 당한 사람은 심문을 받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눈이 멀고, 귀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보면, 라스코리니코프는 전당포 주인 노파를 당당한 마음으로 살해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소설 “백치”에 보면 주인공인 므이쉬킨 공작은 한 없이 순진해서 “백치”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나오는 또 다른 백치가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는 죄에 무감각한 백치입니다. “백치”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백치입니다. 뇌 속에서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나쁜지 보지 못합니다. 듣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못하고 고치지 못합니다. 그런 죄의 백치들이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냥 놔두면 다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본인이 시인하든지 말든지, 성경은 그렇게 진단합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오늘 불신앙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렸지만 불신앙이 주 관심사는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불신앙을 언급한 것뿐입니다. 세상사람 전부가 안 믿는다 해도 우리는 믿습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완악하게 안 믿는데, 우리는 믿게 되었을까요? 그 점을 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2-43) 관리라면 성전 관리들, 혹은 공회원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믿었지만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출교는 유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출교 당한 사람은 유대인들의 어떤 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출교 당한 사람 곁에는 4규빗(약2미터) 이내로 접근이 금지됩니다. 그와 교제할 수 없고, 물건을 팔지 못하고, 같이 식사하지 못합니다. 죽어서도 그 시체에 돌을 던지고, 그를 위해 우는 것이 금지됩니다. 이런 조치가 두렵기 때문에 표면상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하고 나타내지 못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같은 사도들과 초기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하나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불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철저하신 주권과 간섭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원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열심 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기왕이면 숨어서 믿지 말고, 용기 있게 드러내어 믿으세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표시나게 믿으세요. 예수 믿는 것이 외형상 걸림돌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업상의 관계를 맺는데 ‘나는 신자요’ 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학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해집니다. 대통령이 장로라고 별의 별 반기독교적인 도전이 다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성인 신자들은 소위 말해서 ‘점잖게’ 믿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를 찾아 와도 남의 눈치 보며 한 밤중에 찾아옵니다.(3:1) 아리마대 요셉처럼 홀로 ‘소신껏’ 행동은 하되 남에게 권면은 하지 않습니다.(19:38) 소극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데는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믿으라고는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단계가 아니라, 예수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단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 할 상대가 아니라 복음으로 정복해야 될 상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러내 놓고 예수를 자랑한다고 해서 정작 손해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업을 망칠 염려도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깨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배자가 아니요, 세상을 이긴 승리자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세요. 세상 영광에 너무 기대지 마세요. ‘영광’이라는 말은 ‘칭찬, praise’ 혹은 ‘존경,esteem'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칭찬이나 존경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칭찬과 영광은 사람들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높이면 얼마든지 높아집니다. 에스더처럼 하나님이 뽑으시면 천만인 중에서 왕비로 뽑힙니다. 세상 영광도 마귀의 손에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늘 나는 세상살이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소리 안하고 숨죽이고 살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세상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 영광을 먼저 구하면 세상 영광도 따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영광을 버리고 세상 영광을 취한다면 결국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 버렸습니다. 더구나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빌3:7-9)
그러므로 담대하게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자랑하세요. 사람들을 두려워 마세요. 세상 이익 날아가 버릴까 염려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더불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세요. 말과 행동으로 자랑하십시요.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생애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