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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회가 거듭될수록 박근혜(오늘부터 모든 존칭은 생략합니다)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연설에 임하는 자세나 강경한 톤의 변화도 그렇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설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에는 수첩공주나 독재자의 딸이란 말이 나오면 수세적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수첩에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이 뭐가 나쁘냐는 반론도 간간이 있기는 했지만 수첩에 메모를 하는 것은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미지를 주입함으로써 컨텐츠가 없지 않느냐는 쪽으로 몰아가기 위함이었고 수첩 뒤에 공주라는 말를 붙여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는 한번도 이런 별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철저한 준비로 토론회를 묵묵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박근혜가 이번에는 작심을 한 듯 합니다.
부산과 울산에서의 연설회는 박근혜가 얼마만큼 변했고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동안의 연설에서는 스스로의 금도를 지키느라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의 연설에서는 수첩공주와 독재자의 딸이란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은 이제 박근혜가 수첩공주나 독재자의 딸이란 틀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기 위해서는 그 멍에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싸워 이겨야만 가능합니다.
뭔가 마음 속에 꺼리는 부분이 있거나 두려움이 있다면 결코 그런 멍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멍에란 일종의 심리적 제한이기 때문에 이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리적 제한은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의 회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제 박근혜가 수첩공주나 독재자의 딸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그것도 중요한 연설에서 언급했다는 것은 스스로 그 한계를 뛰어 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수히 들어왔던 독재자의 딸이란 말은 박근혜의 입을 통해서 무력화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거부하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에게 있어 아버지는 후광이기도 하지만 부채이기도 했기 때문에 박근혜가 직접 아버지를 거론하거나 아버지의 사례를 들었던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5.16혁명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함으로써 그동안의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5.16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정의한 것은 확실히 박근혜의 변신입니다.
분명 아버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획을 그었다는 큰 공로가 있지만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해온 일부 세력들에 의해 단순한 독재자로만 낙인찍히다 보니 반론을 펴기가 껄끄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가 자신감이 가득찬 그 딸의 입을 통해 부활하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아버지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할 수 있겠지만 최근의 발언들은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아마도 아버지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한국의 정통주류세력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줌으로써 친박정희 세력들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반박정희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비록 진영은 다르지만 반박근혜라는 공동전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김영삼은 이명박에게, 김대중은 아직도 범여권통합의 중심에 서서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다를 뿐 반박근혜 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구국의 결단이라는 한마디는 이런 전선에 커다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박정희를 흉내내었던 이명박은 박정희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경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박정희와 경제를 [주장만 하는] 이명박은 결코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정희의 적통은 박근혜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은 더 이상 박정희를 논하지 말라는 견제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명박 진영에 반박정희와 경제실패의 대명사인 김영삼이 가세하는 순간 이명박은 박정희의 경제이미지와는 단절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하필 무능과 실패의 대명사인 김영삼이냐는 것인데 같은 김영삼계 중에서도 서청원을 비롯한 중심 세력은 죄다 박근혜쪽으로 가버리고 김덕룡 정도만 이삭줍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덕룡이 이명박에게로 간 것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말의 효과였던 셈인데 이로써 이명박은 반산업화의 이미지까지 함께 가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로 이명박 진영은 반박정희세가 혼재되면서 이명박의 박정희 이미지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구성원의 정체성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명박의 정체성에도 혼란을 가져온 것인데 이런 혼란은 그동안 이명박이 공들였던 박정희 이미지 즉 경제 이미지를 손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리와 성추행, 표절과 투기로 얼룩진 인물들을 막무가내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명박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는 공헌을 했던 것입니다.
반박정희의 중심이었던 김대중의 경우도 진영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는데 민주당이 김홍업의 탈당에도 불구하고 조순형을 내세워 김대중에게 반기를 든 것이나 한화갑의 조직이었던 민주정우회 500여명이 대거 박근혜 지지로 돌아선 것은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고건을 지지했던 한미준까지 박근혜를 지지하고 보니 고건의 전북과 한화갑의 전남세력의 일부가 김대중의 반박정희 대열을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번 대선이 박정희냐 반박정희냐가 주 전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정희로 대변되는 산업화 세력과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의 충돌에서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세력의 분열은 반박정희 전선의 붕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독재자의 딸에게 모여드는 세력중에는 반박정희 세력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호남세력의 가세는 호남과의 화해라는 큰 화두를 던져줌과 동시에 박정희 재평가라는 선물을 동시에 안겨준 것입니다.
장준하 미망인을 방문하고 아버지 시대에 희생된 분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호남세력을 끌어안음으로써 독재자의 딸에서 동서화합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인데 이는 단순히 아버지의 후광이라는 측면을 넘어 민주화 세력과 정통 산업화세력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남과 영남의 지역 감정을 넘어 국민통합이라는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반박근혜 전선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서청원과 한화갑을 박근혜 진영으로 보냄으로써 일종의 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직접 박근혜에게 칼을 겨누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동서화합이라는 명제 앞에서 그들이 박근혜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명분도 사실상 없기 때문에 박근혜는 이번 경선만 통과하면 별다른 저항은 없다고 봐야합니다.
문제는 이명박 진영인데 박근혜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해도 이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명박이 스스로 박정희 흉내를 냈을 뿐 아니라 박정희의 경제 이미지를 차용했기 때문에 구국의 결단을 반박함으로써 스스로 박정희의 이미지를 파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이 최태민에게 집중될 뿐 결코 박정희에 대한 공격이 없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박정희의 본류가 누구에게 있느냐는 정통성 싸움과도 비슷한 것인데 개발시대를 살아온 이명박과 박정희의 적자인 박근혜 중 누구를 박정희의 후계자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박정희의 경제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자인 박근혜는 그동안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박근혜의 이런 소극적인 자세 때문에 박정희 이미지를 선점한 것은 오히려 이명박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울산을 자신이 키운 것인양 말했던 것인데 아마도 자신을 아직 박정희의 분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박근혜의 5.16 혁명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날카로운 한마디는 이명박을 겨냥한 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좌파들의 반발 정도는 가볍게 생각할 만큼의 자신감도 있었지만 이명박이 선점한 박정희는 원래 내 것이니 돌려달라는 짧은 기합소리였던 것입니다.
박정희를 오롯이 자신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아버지의 5.16을 구국의 결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박정희는 부활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부활을 통해서 박근혜는 김영삼 김대중을 제압하고 아버지의 짝퉁인 이명박으로부터 아버지를 찾아오게 됩니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다 못했던 선진화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아버지의 칼을 빌려 반선진화의 매듭을 잘라버린 것입니다.
박근혜가 아버지를 부활시킨 것은 이미 박근혜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아버지를 살려 낼 수가 없는 것인데 아버지를 불러냄으로써 박근혜의 내공이 이미 박정희에 필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활은 그럼 아버지를 버리란 말이냐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상 최강의 내공을 가졌던 아버지와 이에 필적할만한 내공을 키워온 딸의 만남입니다.
박정희의 부활은 반박정희 세력들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제부터의 싸움에서 김영삼 김대중이 설자리는 거의 없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호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인데 김대중-한화갑-호남으로 이어져 오는 반박정희 정서의 도식은 이미 깨졌습니다.
한화갑 세력의 박근혜 지지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순형의 부상은 김대중의 영향력, 즉 반박정희 세력이 쇠퇴해 가는 이런 지형 변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에 조순형 역시 무작정 반박정희 대열에 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남의 반박정희 정서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진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담긴 박정희의 칼이 박근혜의 손에 쥐어진 이상 박근혜의 앞을 가로막는 적은 사실상 소멸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올라오는 새끼만을 키운다는 말로 박근혜는 자신만이 박정희라는 사자의 유일한 살아남은 새끼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절벽을 올라오지 못한 새끼는 가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벽을 올라온 박근혜에게 이제 박정희가 전해준 칼이 쥐어졌습니다.
박정희의 칼은 이 칼의 본래 주인이 아니면 결코 뽑히지 않는 칼인데 아직까지 바위에 꽂힌 채 아무도 뽑아주지 않던 이 칼을 드디어 박근혜가 뽑아 들었습니다.
칼이 뽑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인의 사자후에 공명하는 보검이 만들어내는 검기에 모든 비리와 구태가 잘려나가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박근혜의 자신감이 부활시킨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무적입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칼을 뽑아들 때입니다.
무궁화사랑.
첫댓글 그 검(대한민국의 선진화)은 임자가 아니면 뽑을 수도 없을것 이지만 명검은 주인을 알아 본다고 하였습니다.
후련한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