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29) - 변화의 시대, 엄숙한 시간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치니 두 가지 기사가 눈길을 끈다. 1면 기사로 크게 뽑은 트럼프 시대의 개막이 그 하나요 시가 있는 아침의 ‘엄숙한 시간’이 또 다른 하나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동생을 떠나보낸 장례의 날들이 엄숙한 시간이었음을 깨치며 때에 맞은 시를 고른 편집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어제(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물이란 말처럼 그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불확실성이다. 미국 지도자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거친 언사, 140자 트위터 정치 등 그는 기성 정치 문화를 무시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분노, 양극화에 대한 반발, 반(反)이민 정서가 그의 돌출 행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에 지각변동을 야기할 것이란 관측이다. 국익우선과 손익계산을 앞세운 그의 등장은 한반도정세에도 예측불가와 불안정성을 드리운다. 그러나 역사는 나름의 궤도를 따라 흐른다. 위정자들이여, 지혜와 경륜으로 변화의 시대에 슬기롭게 대처하라. 위정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미국 제45대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20일, 전·현직 대통령 부부인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 부부가 만나 취재진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박수 받고 떠난 오바마와 시위 속에 들어서는 트럼프의 앞날을 주시하자.
릴케의 시처럼 지금 세상 어딘가에는 우는 사람, 웃는 사람, 걷는 사람, 죽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먼저 시를 음미하자.
엄숙한 시간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밤에 이유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정처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내게로 오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지난 주 동생은 그 죽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전 우주가 걸린 엄숙한 순간을 맞은 것이다. 그가 겪은 몇 달간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피를 나눈 형제의 안타까움과 무력감에 낙담하기도 하였으나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감정의 기복은 무엇일까.
천혜경로원과도 인연이 닿았던 동생을 떠나 보낸 과정과 소회를 집안의 카페에 올렸다. 누구나 맞는 엄숙한 시간의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동생을 보내며
2014년 6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재활 투병 중이던 동생이 몇달 전부터 2차 뇌경색 쇼크로 위중한 상태와 회복증세를 반복하다가 지난 17일 오후 우리 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 가족과 친척 지인들의 애도 속에 장례를 치렀다.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어제 새벽에 발인,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후 오전 10시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분당 뉴케슬 납골당에 안치하였다. 원래는 고향 선영에서 수목장으로 끝맺음할 예정이었는데 갑작스런 폭설로 4월의 성묘행사 때 그곳으로 가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장례기간 동안 가족과 친척은 물론 수십 년 공직생활의 동료와 지인들이 찾아와 갑작스런 부음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공덕을 기렸다. 황망 중에도 동생을 위하여 기도하며 염원한 글과 동생이 남긴 기록 중에서 몇을 발췌, '사랑하는 동생이여, 편히 쉬라'는 제목으로 프린트하여 문상객에게 나눠드리며 동생을 향한 가족의 사랑과 동생의 인품을 회상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동생이 입원 중일 때 자주 문병한 집례 목사는 장례기간 중 여러 차례 격려와 위로를 보내면서 동생과 우리 가족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예배에서 그가 전한 메시지의 주제는 ‘헛된 것, 헛되지 않은 것’으로 동생의 삶이 ‘온유한 인품과 성실한 자세로 고희에 이르기까지 참되게 이어오신 삶, 하나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받아 서기어린 선영에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다.’ 는 묘비명의 내용처럼 온전하고 충실하여 헛되지 않은 것임을 새겼다. 더불어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강조하였다.
병상의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살핀 아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며 가족들을 잘 보살피겠다고 작별 인사하였다.
' 아버지, 평소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못 드렸던 게 후회되네요.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매일 아침 뵐 때마다 말씀드렸을 걸 그랬어요. 이제 아버지를 뵙고 부를 수는 없지만 제 맘속에 항상 같이 계실 테니 언제든 제 예기 들어주세요. 제게 아버지는 늘 ‘모범적인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귀감이 되어주셨답니다. 남에 대한 배려, 양보, 인내가 몸에 배셨고 남에게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으셨죠. 그런데 아버지, 화도 좀 내고 욕도 좀 하고 거짓말도 좀 하면서 사시지 그러셨어요. 너무 참고만 사셔서 이 병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저는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살려고 노력할께요. 어디 가서도 ‘김행진 아들답다’는 말 듣도록 할께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세상은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3일이 지났어요. 어제 말씀 드렸듯이 어머니랑 동생은 제가 잘 돌볼께요. 걱정 말고 편히 가세요.
사랑하는 아버지, 좋은 곳에서 저희들 잘 사는 모습 지켜봐 주세요. 아들 올림‘
안치에 앞서 드린 예배에서 전한 메시지를 덧붙인다.
‘사랑하는 동생이여, 편히 쉬라
이제 평생을 온유하고 성실한 삶으로 일관한 사랑하는 남편이며 아버지이자 동기요 친척인 김행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영감이 감도는 빈소에서 동생에게 온유하고 성실함으로 온전히 살았으니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히 잠드시라, 제수에게는 성심을 다하여 간병하고 도왔으니 마음의 부담 놓으시고 평안을 누리시라고 적었다.조카에게는 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시느라 수고하였으니 흔연한 마음으로 심신을 추스르고 밝은 날들로 나아가라 하였고,
사흘 전(1월 17일), 형님에게서 동생이 운명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랜 만에 찾은 딸을 만난 지 몇 시간 후 갑작스런 운명이라니. 착잡한 가운데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였다. 진인사 대천명이라 하지 않던가, 동생은 물론 온 가족과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때가 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라 여기는 마음이었나 보다.
지난 해 위중한 상황일 때 묘비명을 다듬었다. ‘온유한 인품과 성실한 자세로 고희에 이르기까지 참되게 이어오신 삶, 하나님의 따뜻한 부르심을 받아 서기어린 선영에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다.’ 이를 살핀 제수와 조카가 동생의 삶을 잘 요약하였다며 동의하였다.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로부터 이 글의 내용처럼 동생이 올곧게 산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뜻깊었다.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한 시간여 머물며 동생이 과묵하고 성실한 동료였음을 칭송하였고 윤청하 전 건강관리협회 본부장은 동생이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직과 원칙으로 협회의 기틀을 튼튼히 바로 잡은 존경하는 상사였다고 술회하였다.
이번 기회에 20년 전 중국여행 때 동생에게 쓴 편지글을 정리하여 동생이 카페에 올린 글들과 함께 ‘성실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책자로 엮었다. 동생이 의식을 찾으면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를 영전에 바쳤다. 추가로 인쇄하여 아끼던 주변에 전하리라. 은퇴 후 10여년, 동생과 함께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하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이제 세상 여행보다 더 좋은 천국여행 떠나는가. 사랑하는 동생이여, 온유하고 성실한 삶 온전히 살았으니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히 가시게. 그리하여 훗날 웃으며 만나세. 굿바이, 김행진!
장례 다음날 제수가 문자를 보내왔다. '장례가 잘 끝나서 오늘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매일 일찍부터 늦은 시간까지 빈소에서 많은 역할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진하여 심신을 가누지 못할 상황일 텐데 잘 견디며 의연한 자세인 것이 감사하다. 장례기간 내내, 마지막 가는 길까지 자리를 함께 한 가족 친지 여러분에게 위로와 찬사를 드린다.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엄숙한 시간 가졌으니 남은 때 밝은 날들로 가꾸시라.
첫댓글 고인의 생전모습을 뵙지는 못하였지만,
교수님의 글을 통해 느껴지는 가족애와 고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우셨는가..아드님의 작별인사가 가슴에 와닿아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부디 가족분들 모두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고 건강한 삶을 살으시기를...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요즘 메스컴을 통해 보여지는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사시고 떠나가신 정직,성실하신 김행진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잔잔한 미소로 답 해주셨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천혜경로원 강당 신축할 때 힘이되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편히 잠드소서...
성심을 담은 두분의 댓글, 감사합니다. 강은수 원장님께서 멀리 빈소를 찾아 따뜻한 위로를 주신 것도. 동생과의 작별이 경로원 어른들을 떠나보내며 자주 겪은 일보다 안타깝고 힘들었지만 한 편으로 엄숙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