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 핀 소금꽃
임동옥
‘갯벌에 핀 소금꽃’ 시민창의문화캠프에 참여했다. 옛날 삼양염업사 해리지점이다. 동호해수욕장 근처에 있었으나 언제나 철문이 잠겨 있던 곳이다. 올 8월 말 처음으로 고창문화도시지원센터를 오 공장장과 함께 둘러보았다. 생태적 의미와 활용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곳엔 100여 년 전에 심었던 노거수가 즐비했다. 그 사이사이에 당시에 사용했던 사무소와 정미소 건물뿐만 아니라 커다란 창고와 숙소로 이용되었던 작은 집들까지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문화적 기억을, 향기를, 현장을 더듬어 보았다.
갯골 건너에는 염전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십여 개의 낡은 소금 창고도 있다. 일부는 고창CC로 활용되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는 곳까지 코발트 빛 블루 존인 염전 곳곳에 꽃이 피었다. 소금꽃이다. 한여름 땀범벅이 된 셔츠에 어리는 하얀 결정체처럼 염전의 블루 존은 서서히 소금꽃으로 바뀐다. 염부塩夫의 손길이 바쁘다. 고무래로 밀고 당겨서 소금산을 만든다. 삽으로 소금산을 허물어 소금 창고로 옮긴다. 창고는 모두 허술 자체다. 팔뚝 굵기의 나무 기둥에 판자를 엉성하게 덧댔다. 성긴 판자 사이로 바람이 숭숭 넘나드는 구조다. 천장의 어느 곳은 구멍이 나 있어 햇빛이 들어 소금꽃이 더욱 빛났다.
‘갯벌에 핀 소금꽃’ 행사에 발제는 셋이었다. 나는 갯벌에 핀 소금꽃 동네의 생태환경, 정 소장은 고창문화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양 작가는 삼양염업사 로컬 콘텐츠의 힘에 대해 발표했다. 패널로 참여한 군민과 초중고 학생들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도 빛났다. 식전 행사로 고창향교에서 이끄는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졌고, 식후에는 근대문화 패션쇼와 음악과 시 낭송이 어우러져 방장 풍류方丈 風流가 넘쳐났다. 아마추어 시민들이 연출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는 풋풋하고 흥미진진했다.
유산은 앞 세대가 물려준 사물이나 문화다. 고창군은 유산의 보물창고다. 2010년 운곡습지와 고창갯벌이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었다. 이어서 고창군 전체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고창갯벌은 신안과 서천의 갯벌과 함께 세계 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3,000여 기의 고인돌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판소리와 고창농악은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안군과 고창군 지역은 서해안권 세계지질공원과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 6관왕의 고장이 고창이다.
소금꽃 피는 옛 삼양염업사 일대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충분하다. 인천 소래포구 습지생태공원에는 염전이었다는 증거의 소금 창고가 2개만 남아 있는데 이것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삼양염업사 부속건물과 소금 창고는 백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재도 염전은 소금꽃을 피운다. 삼양염업사 동호지점이 보전하여 만든 문화도시를 향한 발판 마련은 신의 한 수로 볼 수 있다. 장차 스마트염전으로의 전환뿐만 아니라 문화적 기억을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때 품격있는 세계 문화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세계 자연유산인 고창갯벌까지 확대하여 ‘소금꽃 세계 자연유산 비엔날레’의 개최를 행정당국에 제안한다.
고창문화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세미나가 끝날 때 시민 한 분이 아픈 역사를 소환했다. 이곳은 친일의 흔적이고 수탈의 역사이며 그 현장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장차 문화공간으로 변모하더라도 정문 간판에는 아픈 역사의 기억을 새기라고 당부했다. 다른 한 분은 아픈 역사일지라도 고창군민을 먹여 살리는, 특히 해리와 심원면민이 경제 활동을 했던 일터였다는 거다. 맞다. 이곳은 힘없는 국가의 애환과 함께 활기찬 문화적 터전이었다. 두 분 다 일리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애잔하다 못해 쓰라렸다.
과거에만 매달려서 살 수는 없을 터. 세상은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다. 세계는 메타버스 시대다. 인공지능에 기반한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예술, 교육, 복지, 가치관 등 모든 영역에서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국제미래학회장 안종배 박사는 메타버스 메가 트랜드로 ‘글로벌 4.0, 바로 개인의 세계화’ 시대를 말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글로벌 1.0시대로서, 강대국이 누가 질세라 땅따먹기에 열중했다. 전쟁까지 일으켜 영토를 확장하던 때였다. 조선도 비껴가지 못했다. 나라를 잃고 일제 식민 통치라는 통한痛恨의 시대를 겪었다. 그런데도 친일 프레임이나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은 코로나19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고 아픔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메타버스로 혁신해도 역사와 문화는 남는 것. 김구 선생은 외세침입을 받지 않을 만큼의 국격을 유지하고 높은 문화의 힘을 원했다. 우리의 기억은 갯벌에 핀 소금꽃, 근대역사 문화로 만발해야 한다. 문화의 힘은 자신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소금꽃 피는 역사의 현장에 서서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우리의 선택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