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올레길 따라 외치는 그 날의 함성
지난 26일 효창공원에서 열린 만세우동 재현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행사 모습
함께 서울 착한 경제 (94) 99주년 삼일절 3·1 올레길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부 외신 오보가 이어지며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1901년부터 1945년까지 강점했지만, 모든 한국인은 일본이 문화·기술·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본보기였다고 말할 것”이라는 NBC방송 평창올림픽 개막식 망언에 이어, 미국 경제 전문지인 ‘포춘’이 이를 두둔하는 칼럼을 실어 국민적 공분을 샀다. 뿐만 아니라 영국 더 타임스는 한반도기의 제주도를 가리켜 ‘일본 섬인데 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고 소개해 빈축을 샀다.
문제는 이러한 외신들의 오보 사태가 일제 강점기부터 지속해온 역사 왜곡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 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한반도기의 독도 표시를 문제 삼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연상된다. 이는 그동안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온 일본의 역사 왜곡과 외교적 노력이 전 세계적으로 통하고 있단 얘기 아닐까?
3·1 운동 99주년을 맞아 ‘3·1 올레길 – 독립선언서의 길·만세운동길’을 걸으며,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 세우는 시간을 가져보자. 일제 강점기 선조들 독립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며, 일제 만행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울에는 일제 강점기 국권 침탈, 식민통치의 흔적과 항일 독립운동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3·1운동 관련 유적지일 것이다. 3·1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배포하고 만세 운동의 시작을 연 곳, ‘3·1 올레길 – 독립선언서의 길·만세운동길’을 찾아가 보았다.
① 의암 손병희 집터
안국역에서 헌법재판소를 지나 가회동 길을 오르다 보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의암 손병희 집터’가 나온다. 가회동주민센터 옆 북촌박물관 건물 앞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손병희는 동학 제3세 교조다. 동학혁명 후 극심한 탄압 속에서 교조에 오른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다. 교리와 체계를 확립하고, 항일 독립운동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3·1운동 준비 초기에는 천도교, 기독교 장로교계와 감리교계 등 종교계와 학생들이 제각각 독자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중에서도 천도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일찌감치 독립선언과 독립청원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1919년 1월 하순 무렵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하여야 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곳은 1919년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 33인 중 20여 명이 마지막 준비 모임을 진행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참석자들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을 하기로 한 애초 계획을 수정하여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한다. 당일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모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경찰과의 무력충돌을 염려하여 급히 민족대표만 따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중앙고등학교 숙식실을 복원한 ‘3·1 기념관’
② 중앙고등학교
다음으로 찾은 곳은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서면 낯익은 교정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연가’, ‘도깨비’ 등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교정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한 역사의 현장이다.
1919년 1월 상순경,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를 방문하여 교사 한상윤, 교장 송진우에게 동경 유학생의 거사 준비 상황을 알리고, 2·8 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그 현장인 숙직실은 현재의 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강당을 지으며 철거했다가 1973년 중앙학교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강당 뒤쪽에 ‘3·1 기념관’으로 복원하고, 앞쪽 교정엔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웠다.
만해 한용운의 거처이자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유심사 터
③ 유심사 터
중앙고등학교에서 계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왼쪽 골목 안으로 보면 또 다른 3·1운동 유적지가 있다. 유심사 터(계동길 92-3)이다. 게스트하우스 대문 옆 벽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유심사는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장소이며 만해 한용운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919년 1월 말 천도교 측의 최린이 유심사로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2월 20일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 받으면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은 이곳에 모인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게 독립선언과 거사 준비 경위 등을 설명하면서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학생들은 서울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 사찰, 지방의 사찰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지역별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로 인해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 폐교까지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성사터 – 건물 옆에 있던 회화나무만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남아 있다
④ 보성사 터
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조계사. 정확히 얘기하면 보성사 터다. 보성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다. 1910년 말 창신사와 보성학원 소속 보성사 인쇄소를 합병하여 만든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로, 현재의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각 종교, 학생들은 민족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기 위해 함께 하기로 한다.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을 선정하고, 거사 일자를 3월 1일로 정하였다. 이는 국장일인 3월 3일과 주일인 3월 2일을 피하고, ‘삼위일체’라는 의미도 지녔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식에서 사용할 선언서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의 열국 대표에게 보내는 건의서,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과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청원서의 작성은 최린이 주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고, 기독교와 천도교의 인사들이 검토하고, 한용운이 공약 3장을 첨가하여 완성되었다. 2월 26일 최남선이 신문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조판하였고,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이 넘겨받아 보성사에서 27일까지 21,000여 장의 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이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게 발각되었으나 이종일 사장이 손병희 선생에게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하여 위기를 넘겼다 한다. 또한, 인쇄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옮기던 중 일본 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인쇄된 족보라 속여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보성사는 그해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당시 보성사 건물 옆에 있던 회화나무만이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남아 있다.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 수송공원에는 독립선언 기념비와 조형물, 이종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교인들의 성금은 3·1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
⑤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으로, 1918년 짓기 시작하여 1921년 준공되었다. 교인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때 모은 성금 일부가 3·1운동을 앞두고 진행된 각종 비밀 회합과 인쇄비용 등 3·1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1919년 당시 조선 인구 1,800만 명 중 천도교인이 300만 명이었다고 하니, 천도교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수운회관 정문 오른쪽 보도에는 ‘독립선언문 배부터’라는 표석이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인쇄된 선언서는 이종일의 집으로 옮겨 보관했다가 28일부터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⑥ 태화관 터
이제 삼일운동의 진원지인 태화관 터를 찾아가 보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이다. 이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생략하고, 한용운이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기념사를 하고, ‘독립 만세’를 삼창했다.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알렸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현재 태화관 터에는 태화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에는 3·1 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1층 로비 오른쪽 옆 작은 카페 벽에는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⑦ 승동교회
태화관 터에서 나와 탑골공원으로 가는 길, 잠시 승동교회에 들렀다. 승동교회는 3·1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3·1운동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이기도 하다. 학생단은 이곳에서 3·1운동 학생조직 체계 정비, 3월 1일 학생동원 최종 점검,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했다.
기민년 학생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1월 28일 기독교계 학생들의 ‘학생청년단’은 관수동에서 모여 청년 주도의 독립선언에 합의했다. 또한, 이곳 승동교회에서 ‘전문학교 학생 간부회의’를 개회 독자적인 운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만들려던 차에 종교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참여하기로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탑골공원 안 3·1운동 벽화
⑧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학생, 시민 5,000여 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후 3시, 학생 대표 정재용이 중앙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시가행진을 했다. 때마침 국장으로 전국에서 올라온 이들이 합류하여 종로에서 대한문, 광화문, 명동, 돈화문, 동대문 등으로 퍼져나갔다. 이날 서울 시내 각국 영사관 앞과 골목골목에는 독립 만세의 물결이 이어졌다.
현재 탑골공원 안에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의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탑골공원 정문에는 삼일문이란 명판 붙어 있다.
3·1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퍼졌고 몇 달간 그칠 줄 모르고 지속하였다. 석 달간 서울에서만 57회, 전국적으로 모두 1,393회가 열렸다고 한다. 참여 인원은 195만4천여 명, 당시 인구가 약 1,800만 명이었다고 하니, 10%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삼일운동 첫날 일본은 만세운동이 커질지 몰라 진압이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심각성을 느끼고 진압하며, 석 달간 7,509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1만5,800명, 구속자 4만6,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동참하며 전국적으로 나아가 해외 곳곳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그동안 ‘한국민은 총독부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던 일제의 선전이 사기였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일제는 그동안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어야 했다.
또한 민족 지도자들은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조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내에서는 4월 23일에 한성 임시정부가, 상해에서는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는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가, 간도에는 군정부가 조직되었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미주, 중국, 러시아의 교포 대표자들이 상해에 모여 논의한 결과,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성임시정부로 계승하고, 위치는 상해에 둔다고 결의하였다. 1919년 9월 15일, 비로소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내년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남은 1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3.1 올레길을 걸으며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