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구황음식이었던 묵이 ‘웰빙 음식’ ‘다이어트 음식’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각종 조미료에 찌든 사람의 혀가 묵의 투박함과 심심함을 신선하게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또 밥상의 조연(반찬)으로서 주로 등장했던 묵이 이제는 주연(주식)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묵밥, 묵국수 등이 한 끼 식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묵요리는 식당을 벗어나 찜질방에서의 야식으로까지 인기가 높다. 회사원 김정아씨는 “찜질방에서 땀을 흘린 뒤 야식 메뉴로 묵밥, 묵국수만큼 칼로리 부담이 적은 음식도 없다. 씹을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기 때문에 소화도 잘 된다”고 말했다. 서울 광진구 ‘해피데이’ 찜질방의 박혜숙 대표는 “묵국수가 하루 100그릇 이상 팔리는 스타상품”이라며 “묵국수를 먹기 위해 일부러 찜질방을 찾는 손님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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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들이 묵요리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
메밀묵의 사전적 의미는 ‘메밀, 녹두, 도토리 따위의 앙금을 되게 쑤어 굳힌 음식’이다. 19세기 서적 ‘명물기략’을 보면 ‘녹두 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이라 하는데 속간(민간)에서는 이를 가리켜 묵이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사류박해(만물의 명칭을 풀이한 어휘집)’에서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았는지 ‘녹두부’라고 했다.
묵은 재료에 따라 도토리묵, 메밀묵, 녹두묵, 올챙이묵(옥수수로 만든 묵) 등으로 나뉘는데 대개 간장, 파, 참기름, 고춧가루, 깨소금 등을 넣어 무쳐서 먹고, 배추김치를 썰어 넣어 먹기도 한다. 지금은 계절에 관계없이 먹지만 도토리묵은 가을, 메밀묵은 겨울, 청포묵은 봄, 올챙이묵은 여름에 먹어야 제격이라고 여겨졌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눌린 자리가 바로 원상태로 돌아오는 차진 묵을 좋은 것으로 친다.
저칼로리 알칼리성 식품인 묵은 주재료가 도토리, 메밀, 녹두 등 곡류나 견과류이기에 단백질, 식물성 지방 등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풍부하다. 특히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 등이 많아 피로회복에도 좋다. 묵의 열량은 100g에 40㎉ 정도라 서 다이어트 건강식으로 안성맞춤.
묵으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묵밥이 있다. 묵밥은 가지런히 썬 묵에 멸치육수나 닭육수 국물을 붓고 밥을 말고 김치를 송송 썰어넣은 것이다. 묵부터 건져먹은 뒤 밥을 말아먹거나 국처럼 밥을 말아 함께 즐긴다. 묵국수는 묵을 보다 가늘게 썰어 냉면처럼 찬 육수에 말아낸 것이다. 고명으로 김치, 삶은 계란, 오이채 등을 올리고 김가루도 얹는다. 묵볶음은 묵을 채썰어 햇볕에 2~3일 정도 말려두었다가 야채와 함께 볶아낸 것이다. 이외에도 묵보쌈, 묵탕, 묵케이크 등이 있다.
또 대형마트의 묵 코너에서는 도토리묵, 메밀묵, 청포묵, 올챙이묵뿐만 아니라 밤묵, 칡묵, 쑥묵, 녹차묵, 흑임자묵(검은깨), 토란묵(토란), 우무묵(우뭇가사리) 등 다양한 묵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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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국수 |
요즘 같은 가을철에는 역시 도토리묵이 제철이다. 도토리묵에는 인이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 B₁, B₂ 등이 함유돼 각종 채소를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주재료인 도토리는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열매로서 타닌(tanninㆍ떫은맛을 내는 물질로 잉크나 염료의 재료로도 쓰인다) 성분이 많아 소화가 잘 된다.
도토리는 이 타닌 성분 때문에 너무 떫어 날 것으로 먹기가 불편해 지금처럼 묵을 만들어 먹게 됐다. 묵을 만드는 과정 중 많은 양의 타닌 성분이 없어지므로 적절하게 타닌 성분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타닌 성분이 들어있는 묵을 먹게 되면 모세혈관이 튼튼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에 의하면 늘 배가 부글거리거나 혹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에게 처방을 내렸던 음식이 바로 도토리묵이다. 타닌 성분이 설사를 멎게 하고 장을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는 코피, 축농증, 치질, 월경통, 여드름 등에 도토리나뭇잎을 사용한다.
열매는 주로 치질, 하혈 등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 또 도토리 속의 아콘산이라는 성분은 인체 내부의 중금속과 유해물질을 흡수,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 노화와 각종 만성질환의 원인이 되는 활성산소의 작용을 억제하고, 성인병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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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말랭이 샐러드 |
도토리묵을 만드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가을에 주운 도토리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여러 번 우려낸 다음 맷돌 등으로 갈아 무명자루에 넣어 짠 후, 소금을 넣어 앙금을 가라앉힌다. 이어 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부어 잘 저으면서 끓이면 풀처럼 된다. 이때 넓은 그릇에 퍼서 식히면 묵이 된다.
메밀묵은 겨울철에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요즘엔 듣기 힘들지만 겨울밤에 “찹쌀떡 사려, 메밀묵”이라는 외침을 들어본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메밀은 강원도에서 많이 재배됐고 특히 봉평이 유명하다. 매년 봉평에서는 9~10월 초 메밀꽃 축제를 연다. 사실 밥상에서는 도토리묵보다 메밀묵이 대접을 받았다. 조밥(조에 쌀을 섞어 만든 밥)과 메밀의 궁합이 잘 맞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메밀에 들어있는 루틴(rutin)이라는 성분도 모세혈관을 강화시켜 뇌출혈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메밀의 검은 겉껍질은 이뇨 작용을 도와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 피를 맑게 해주므로 혈관을 부드럽게 하고 혈압을 안정시켜 준다.
또 메밀에 포함되어있는 콜린이라는 성분은 간에 좋아 술을 즐기는 사람에게 권할 만하고 쌀이나 밀가루보다 아미노산이 풍부해 예로부터 여성의 피부미용에 좋다고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