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6일 월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수도회] 삶의 중심과 우선관심사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11,29-36
† 복음 루카 14,12-14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선한 행위를 할 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선한 행위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내가 어떤 일을 했으니 그에 따르는
보상을 기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는 상대방에게
대우해 준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청원 기도가
아닙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청원 기도는 인간 마음의
어쩔 수 없는 표현이지요. 그렇지만 기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청할 것은 청하되,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난 직전 처절하게 고뇌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할 일을 다 하고, 모자라는 것은 주님께 청하고,
그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 나갈 때, 언젠가
주님께서 당신 방법대로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17년 가해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1,29-36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어떤 신부님께서 예전에 제가 드렸던 예화모음 파일을 다시 좀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모아놓았던 자료인데,
같이 공유하려고 몇 년 전에 그 신부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신부님께 다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료를 저 혼자 쓰기 위해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의 실수로 이 파일을 컴퓨터에서 삭제해서
아예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 당시에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그리고 정말로 많은 자료를 주제별로 모았기
때문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복원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더한 일도 있는데 뭘
신경 써.’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넘어갔습니다.
지금 현재 제가 모아놓은 예화집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어지길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모로 편할 수는 있겠지만, 이 예화의
틀에 갇힐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예화집이 없다보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그마한 것에도 관심과 관찰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새로운 생각과 다양한 묵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화집이 없는 편이
훨씬 더 이롭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떤 것에 갇혀 있을 때, 그곳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갇혀 있을 때, 이웃을 향한
사랑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도 힘들게 됩니다. 즉, ‘내 것’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주님의
것인 ‘사랑’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초대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를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쉬울까요? 또한 내게 별 이득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초대해서 대접한다는 것 역시 이 세상의
상식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않아야 하늘에서 보답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우리들이 이 세상의 것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갈 때,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벌거벗은 빈 몸으로 왔듯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아무것도 없는 빈 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뜻에 맞게 한 사랑의 행위들이 인정을
받아 가장 큰 보답을 받는 순간이 하늘나라에서입니다. 그곳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것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철학은 열심히 흘린 땀에서부터 생겨나며, 마음은 매일의 노동을 통해
연마된다(이나모리 가즈오).
예전에 있었던 본당에서의 본당잔치에서...
밥 한 그릇을 보면서....
우리가 매 식사 때마다 만나게 되는 ‘밥’ 한 그릇을 생각해봅니다. 매일
먹다보니 너무 쉽게 생각하지만, 밥이 제 앞에 놓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또한 밥이 놓이기까지 도움을 준 것들 역시
어마어마하지요. 비, 햇살, 흙, 물, 구슬땀을 흘린 농부, 그리고 밥을
정성껏 지은 이 역시 있습니다. 이 정도만 있으면 밥이 제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니지요. 더 많은 것들이 그리고 더 많은 도움을 통해서 밥이
우리의 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감사할 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 우리,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 ‘사랑’을 늘 힘주어서 강조하셨나 봅니다.
밥 한 공기.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삶의 중심과 우선관심사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 14,12-14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삶의 중심과 우선관심사는?
예수께서는 자신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행복하기 위하여 지녀야 할 관점과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식사를 베풀 때 잘 아는 이들과 힘이 있고,
나에게 도움을 줄 법한 이들을 초대하지 말라 하십니다(14,12).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14,13). 거기에 행복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14,14).
그리스와 로마의 부유층들은 보통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어느 정도 존경받는 이들을 초대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 농부 같은 힘없는 이들은
초대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인들이나 잘난 이들보다는
죄인들이나 고통 받는 이들, 못난이들을 먼저 선택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은 돈과 힘, 명예의 달콤함에 젖어 살아갑니다. 또 그에 따라
인관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남도 행동도, 심지어 생각이나
표정도 그런 현대의 우상에 끌려다니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난한 자의 우선 선택’은 무의미한 일로 보이고,
패배나 비굴함이나 실패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관심 밖의 사람들, 곧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14,13)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힘에 기대고 힘의 흐름을 좇는 그 습성을 거슬러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마음의 중심을 이동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곧
나와 별 관계도 없어 보이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베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방식은 자신도 모르게 힘 있는 이들 가까이 가고
그들과 어울림으로써 힘없는 이들을 소외시키는 그 습성을 거스르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의 시선은 늘 인간다운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살아가는 주변인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분의 행동방식은 타자
중심적이었으며, 그분의 눈길은 늘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그들과 함께 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변두리로 밀려나 고통받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려야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더불어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신체적·
정신적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둘 때 행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보답이나 대가를 바라지
말며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너그럽게 베풀라 하십니다
(14,14). 사람들은 자신이 힘과 재물을 많이 지니게 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곤 하지요. 선행이나 봉사, 기부를 하면서도
‘내가’ 했다고 하며, 대가나 인정을 기대합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소유와 애착에 매여 있음을 말해주며, 교만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마음과 눈길, 몸짓을 변두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에게로 돌리고,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선과 재물과 재능 등 온갖 것을 기꺼이 그들과
공유하고 나누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빛이신 주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6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로써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 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고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 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그러한 기적을 청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바다 거북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바다 거북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바닷가 모래 위로 나온다고 합니다. 모래를 파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다시 모래를 덮어놓고 바다 거북이는 바다로
돌아갑니다. 이제 모래 속에 있는 알은 스스로 알에서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애물인 모래를 뚫고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도 48시간을 바다 깊이 수영해서 들어갑니다. 그래야
새끼 바다 거북이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이렇게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한걸음씩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면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깨닫기 전에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랐다면
깨달은 후에도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라야 합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깨달았으니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니
일상의 삶에서 깨달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초월적인 삶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나눔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겸손으로 뿌리를
내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분의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한분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고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그분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숭고한 삶과 사랑은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른 한분은 꽃동네를 만드신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이야기하신 오 신부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버려진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따뜻한 삶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꽃동네를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작은 정성을 통하여
나눔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7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들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 14,12-14)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 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에로 나설 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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