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7-22 빌라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두 명의 유대인 무장항쟁 독립투사들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그들의 우두머리 바라바의 자리인 가운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은 뒤 “그 위에 예수,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대제사장들이 자칭 왕이라고 쓰라고 항의했지만 빌라도는 쓸 것을 썼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전 말씀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줄 방법을 계속 찾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신분을 이용해서 협박하며 빌라도의 급소를 찔렀고 빌라도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존심을 찔러 공격했다. 하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조차도 버리고 로마황제만이 왕이라며 치워버리라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떠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은 빌라도가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그리스어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써서 다는 내용이다.
17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곳이라는 데로 가셨다” 라고 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다고 했는데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지고 가셨다고 하나? 마태복음 27:32절은 예수를 끌고 나가다가 시몬을 만났다고 했다. 마가복음 15:16절도 끌고 나갔다 라고 했다. 끌고 나갔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문 밖까지 나갔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23:26절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라고 했는데 원어는 멀리 끌고 갔다 라는 뜻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한참 동안 가셨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9:17절을 원어대로 번역하면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곳이라는 곳을 향하여 나가셨다” 라는 뜻이다. 역시 그 목적지인 해골의 곳을 향하여 예루살렘 성문을 나섰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최소한 예루살렘 성문을 벗어날 때까지는 예수께서 스스로 지고 가셨다는 뜻이다. 마태 마가 누가는 성문을 나서서 한참 가다가 구레네 시몬을 만난 것을 초점을 맞춘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성문을 나서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께서 스스로 택하셔서 고통을 당하시고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증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을 증언한 것이다.
왜 요한은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강조할까? 구레네 시몬이 중간에 대신 지고 갔다는 사실을 증언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생략한 이유가 무엇일까? 2세기 교부인 이레니우스가 쓴 이단논박(Against Heresies, 1.24. 4)에 보면 영지주의자라는 이단들과 논쟁한 내용이 나온다. 이단들은 “예수가 죽음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라 예수 대신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구레네 사람 시몬이 겪은 것이다. 시몬은 예수의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예수라고 생각되어져서 무지와 실수로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예수는 시몬의 모습으로 변해서 옆에 서서 그들을 향해 웃고 서 있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2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단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1세기 말에도 이처럼 예수의 죽음을 부정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사람들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구레네 시몬 이야기를 넣는다면 요한의 공동체는 부활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생략했을 것이다.
18절을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거기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여기에 또 여기에, 그러나 가운데에는 예수” 라고 되어있다. “여기에 또 여기에” 라는 말은 칠십인역 구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출 17:12; 민 11:31; 22:24; 삼하 2:13; 단 12:5)다니엘 12:5절에서도 하나는 “강 이 편에 또 하나는 강 저편에”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이는 요한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손으로 가리키듯 설명하는 말이다.
“그러나 가운데는 예수” 라는 표현은 본래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라고 했다. 그 자리는 본래 바라바가 달렸어야 할 자리였기에 요한은 “그러나 가운데는 예수” 라고 증언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라바의 부하 두 명을 좌우에 두고 그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바라바 대신 그 둘 가운데에 달리신 것이다.
19절은 빌라도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19절에서 빌라도는 “예수,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이라고 명패에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고 했다.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넘겨 주었다는 뜻으로 조롱한 것이다. 게다가 그 왕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심한 욕이다. 유대지방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했었다. 더구나 메시야가 그런 반쪽 유대인 지역 같은 변두리에서 나온다는 것은 정말 심한 모욕이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도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한 말이 나온 것도 나사렛이 멸시받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빌라도는 그것을 알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20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수,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이라고 명패를 붙였으므로 라는 뜻이다. 원어에서 20절은 많은 유대사람들이 이 명패를 읽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많은 유대 사람들이 읽은 이유를 두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곳인 유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성문 밖의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읽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브리 말이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람어이다. 라틴어는 로마 군인들이 쓰던 말이고 그리스 말은 당시 로마제국의 공용어이다. 먼 나라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다 읽을 수 있게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쓴 것이다. 게다가 로마 군인들도 읽고 유대인들을 조롱하게 하려고 라틴어로도 쓴 것이다. 빌라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아람어로 제일 먼저 쓴 것은 유대 사람들이 주된 독자들이기에 그들을 조롱하려는 것이다.
21절은 그래서 속이 상한 유대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들의 왕이다” 라고 쓰라고 했다. 그러자 22절에서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나는 내가 써야 할 것을 썼다” 라고 했다. 빌라도가 멋지게 마지막 복수의 주먹을 날린 것이다. 빌라도의 카운터 펀치를 한 대 맞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K.O. 패를 한 셈이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과 빌라도는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모두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용하여 예수가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던 것이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려고 유대인의 왕이라 고소했고 빌라도는 가야바와 그 일당들을 망신 주려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저들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선전 도구가 된 것이다. 그것도 그 당시 로마제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세가지 언어로 예수님이 진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신 왕이라고 알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