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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의 심판
요 12:44-50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 12:44-50 / [마지막 날과 심판]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45) 나를 보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46) 나는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왔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않게 될 것이다. 47) 내 말을 듣고서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겠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그러나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모두 마지막 날에 가서 내가 말한 진리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49) 이 진리는 내 생각대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말하라고 하신 그대로를 전할 뿐이다. 50) 나는 그 가르치심이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를 말한다'
다시 사람들 앞에 서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자신의 동등성을 선포하시며,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선언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44-45)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성을 뚜렷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니라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거듭 말씀하시며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을 선포하시며,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하시는 일체의 일들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며 그를 믿는 것은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요 그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46-50)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거하지 않게’는 ‘머물러 있지 않게,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어둠은 흑암, 무지, 악, 숨는 것, 눈이 먼 것, 심판 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이런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계속적으로 놓여 있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구원하려 함이로다'고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거부한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으나 그분을 거부하는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그의 말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비난했으며 끝내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무시하고 비난했던 예수의 말씀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여 주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영생입니다.
적용: 진정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자기를 변화시키며, 다른 이를 변화시킵니다. 당신은 예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과 영생으로 듣고 믿고 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역시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고와 심판으로 다가오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약속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 설 교 >
심판과 구원
요한복음 12:42~50 / 하용조 목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표적을 보고도 주님으로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직접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면서도 주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두 가지 이유
성경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분을 거부한 사실에 대해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해 돌덩이처럼 완고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강퍅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려 합니다. 옛날 생각, 고정 관념 등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진리나 기적을 보고도 무시해 버리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불신앙으로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그들의 마음이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 37절에서 40절까지 읽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영혼이 굳어져 버린 완악한 사람을 일컬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가슴이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며,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굳은 마음을 풀고 고정 관념을 깨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기적과 축복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42절과 4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두 번째 이유는 출회당할까 봐, 퇴출당할까 봐, 사회의 조직에서 밀릴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저분은 진짜 메시아구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출회당하고 배척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인 것을 믿고 있었지만 드러나게 표현하진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선 예수님을 잘 믿지만 세상에선 꼬리를 감춰버립니다. 회사에서 술 마시러 가자면 잘 따라가고, 동료들에게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성경책 들고 다니기를 꺼려합니다. 예수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상황에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립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하고 ‘왕따’ 당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에서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떳떳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탁 밑으로 손을 내리고 짧게 ‘하나님 땡큐’하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할 수 있길 바랍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
44절 말씀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짧지만 중요한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설교입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44, 45절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보고 있지만 실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도 이 생각을 흩트려 보신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셨지만,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도, 죽음 앞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밀착돼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중심 없이 우왕좌왕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믿고 때로 안믿으며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46절 말씀에 있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첫 번째 메시지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나는 이 세상에 빚으로 왔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은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왔지만 세상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35절에서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빛 안에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동안에 우리는 어둠의 생각을 갖지 않게 되며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게 되고 어둠의 생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어둠의 자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빛이시며 빛이 있는 동안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를 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기 전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그분은 이미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태양이 떠있는 동안에 천지 만물들이 햇빛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동안에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들이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더러운 생각과 행동들이 떠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빛이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자와 구원자
세 번째 메시지는 47절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하게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7절 첫 부분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심코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17절 말씀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 요한복음 5장 45절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모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소하고 심판한 후 지옥에 넣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심판받고 지옥으로 가는 것을 못 견뎌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해도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48절 말씀에 우리를 심판하는 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는 이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저들은 심판을 받은 것이지만, 나는 저들이 심판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직접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면서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과 형벌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가엽게 여기시며 한 사람이라도 심판과 형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메시아
이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너희들은 나의 말로 심판을 받게 되므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진다. 나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쳐서 너희들이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내가 대신 받겠다. 이제 나는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간다. 너희들이 당해야 할 형벌을 내가 담당하겠다. 나를 믿어라.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어 심판과 형벌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영원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오늘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예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방법도 없습니다. 윤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개나 소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고, 신이 인간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종말을 맞습니다.
둘째,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습니다.
셋째, 심판의 결과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은 자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명령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심판의 기준인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가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면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심판과 형벌과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을 앞두고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고독하고 안타까우며 절절하십니다. 어떻게 이 마음을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메시아를 믿지 않으면,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모두 심판 받을 텐데….’ 예수님은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인간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형벌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전해야 할 ‘복된 소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내게로 와서 편히 쉬어라. 모든 죄책감과 죄 값에서 해방돼라. 너희들이 짊어져야 할 죄 값을 내가 대신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49, 50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이상이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설교입니다. ‘내가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안다. 이제 나는 사람들이 형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지옥으로 가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를 질 것이다. 그 십자가를 바라 보아라. 그러면 너희들의 죄, 심판, 형벌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사실을 믿어라’.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도처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서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해 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그들이 심판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김영규 목사
요한복음은 12장에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12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요한복음에서 대중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13장 이후는 주로 제자들을 향한 교훈과 사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그동안 전파하신 말씀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메시아의 신분, 메시아를 믿음으로써 얻는 영생, 메시아를 향한 믿음, 불신앙에 대한 심판 등을 언급하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본문의 첫 번째 내용은 메시아의 신분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44)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최근 통일교 교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스스로 세상의 구주로 자처하며 전 세계에서 수 백 만 명의 추종자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등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시려고 성경을 통해 수 없이 예고하신 분입니다. 그 예고대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똑 같이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버지를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내용은 주님께서 일찍부터 반복하여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요7:28-2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5:3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우리는 예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5)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불가견적인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것은 곧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 때에 주님이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9-11)
빛으로 오신 주님
본문의 두 번째 내용은 메시아를 믿음으로써 얻는 영생 천국입니다. 메시아는 무엇을 주시려고 오셨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무엇을 얻는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을 얻습니다. 빛은 영생 천국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여러 차례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11:9)
성경에서 빛은 여러 가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첫 번째로 만드신 것이 바로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빛은 착한 행실을 나타냅니다. 정의를 나타냅니다. 행복과 기쁨을 나타냅니다. 질서를 나타냅니다. 사랑을 나타냅니다. 성결함, 거룩한, 깨끗함을 나타냅니다. 영생 천국을 나타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빛의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영생과 천국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50) 예수님은 빛이시며,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빛을 얻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가지를 얻습니다. 착한 성품을 얻습니다. 정의를 얻습니다. 행복과 기쁨을 얻습니다. 삶의 질서를 얻습니다. 성결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바로 영생과 천국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영생을 얻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5-1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셨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영혼은 이미 하나님 품에 살고 있습니다. 육신은 일시적으로 땅에 묻힐 것이지만,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신령한 몸, 강건한 몸, 썩지 않는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고번15:42-44)
불신앙에 대한 최후 심판
본문의 세 번째 내용은 불신앙에 대한 최후 심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심판을 면하고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앙의 결과가 있듯이 불신앙의 결과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47-50)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비록 구원자로 오셨을지라도 불신앙에 대해서는 심판자가 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 인류를 향해 하나님이 보내신 최후의 사면장(赦免狀)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마다 사면(赦免) 제도가 있습니다. 범죄자를 용서해 주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이 있습니다. 일반사면은 범죄의 종류를 지정하여 이에 해당하는 모든 범죄인에 대해서 형의 선고의 효과를 전부 소멸시키거나 또는 형의 선고를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한 공소권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특별 사면은 이미 형의 선고를 받은 특정인에 대하여 형의 집행을 면제하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사면은 특정한 범죄를 지정하여, 국회의 동의를 얻어 사면합니다. 복수(複數)의 모든 범죄를 사면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사면의 경우, 사면을 받는다 해도 이미 선고 받은 범죄 사실이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형 집행을 면제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완전 사면을 받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법을 어긴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범죄 사실을 무효화시키는 사면입니다. 사면과 동시에 완전 복권이 이루어집니다. 마귀의 자녀, 죄의 자녀가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습니다. 지구상에 이런 사면은 없습니다.
이런 완벽한 사면이라 할지라도 사면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새로운 판결을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습니다. 사면을 받지 않는다면 형은 그대로 집행됩니다. 육체적으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습니다. 마귀를 통제와 지배를 받습니다. 죄악이 지배합니다. 세상 떠나는 날, 완전하게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불신앙자들에 대한 세상 심판의 전부입니다.
둘째로, 심판의 법적 근거입니다. 심판은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닙니다. 명백한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무슨 죄든지 반드시 법으로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강도죄, 상해죄, 절도죄, 사기죄, 혼음빙자 간음죄, 뇌물수수죄, 폭력죄, 공무집행 방해 죄 등등. 분명한 법조항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범죄자들은 항상 법에 없는 죄를 지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법입니다. 성경은 복음의 책인 동시에 재판의 법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법적인 근거는 바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은 그대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믿으면 사면 받고 구원 받는 것도 하나님 법입니다. 믿지 않으면 심판 받고 지옥 가는 것도 하나님 법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48-50)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지켜야 될 법입니다. 법의 정신은 두 가지입니다. 법의 정신의 첫째는 바른 삶의 표준입니다. 성경의 십계명을 보세요. 최소한 행해야 될 일들을 지정합니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또한 최소한 어기지 말아야 될 일을 지정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법의 정신의 둘째는 판결의 근거입니다. 위반자를 처벌합니다. 법조문에는 반드시 처벌 조항이 있습니다. 살인의 정도에 따라 형량이 정해집니다. 고의적인 살인인지, 우발적인 살인인지? 빵 한 조각을 훔쳤는지, 은행을 털었는지? 형량이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 처벌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어겼을 경우의 형량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서 형량이 지정된 것을 보셨습니까? 십계명을 보세요. 이 법을 어긴 자에게 어떤 형벌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물론 신명기 법전에 보면 어떤 죄에 대해서 처벌을 지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회를 위한 시민법입니다. 천국의 법이 아니라 땅 위의 법입니다. 영적인 법이 아니라 육체를 제어하고, 물질을 다루는 법입니다.
영적이고 일반적인 성경의 처벌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사형, 혹은 저주입니다. 사형이나 저주는 내용은 같습니다. 모든 죄는 사형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사기, 폭력, 거짓, 우상 숭배, 무신론, 다신론, 범신론, 모두 같습니다. 결과는 사형입니다. 에덴동산에 법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법조문도 하나요, 처벌도 하나입니다. 이 법조문은 달리 해석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라! 위반하면 죽는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죽임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법을 어겼을 때 세 가지 처벌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셋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죽도록 고생하는 형벌입니다. 그 결과 오늘 모든 인류가 이 처벌 아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죽도록 고생합니다.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세요. 하나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저주로 맹세하게 하셨습니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5-26)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에게 여지없는 저주가 있습니다.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신28:16-18)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렘1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저주는 곧 사형입니다. 이것이 성경 보편의 처벌입니다.
셋째로,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내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최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전 인류가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완전한 사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심각한 심판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하신 말씀 하나하나가 다 심판의 법조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정죄되고 주님의 말씀대로 지옥에 던져집니다. 둘째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역사의 종말보다 개인의 종말은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길어야 100 년을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반드시 떠날 날이 있습니다. 언제 불현 듯 떠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면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여러분 이것은 최후 통첩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 – 계시
문기태 목사
"엽기 고사성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동문 서답-동쪽 문을 닫으니 서쪽이 답답하다. 군계 일학-군대에서는 계급이 일단 학력보다 우선한다. 박학다식-아는 것은 없고 먹는 것만 탐한다. 희노 애락-희한하게 놀다보면 애가 태어난다. 새옹지마-새처럼 옹졸하게 지랄하지 마라.] 이런 유머의 특징은 예로부터 전래하는 같은 단어를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머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잘못으로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고 전달되는 경우도 제법 많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색깔을 감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땅에 사시는 동안 철저하게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33년동안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자기의 감정도 접으셨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피하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행하신 놀라운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힘써 자신을 절제하셧을까요?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힘쓰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씻기 위해서 하나님을 최대한 열어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겟나이다." 예수님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어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른ㄴ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귀신들린 자들을 만나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고 힘없는 백성들을 짓누르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등을 통하여 종말에 있게 될 일들을 상세하 말씀해 주셧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주시고자 애쓰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성품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정말 오래 참으시며 한없이 자비로운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 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웃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을 이해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며 묵묵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저런 분이었나보다 하며 예수님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예수님께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가는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정말 의로우신 분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들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 설명해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예수님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삶을 통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맛없는 세;상에 소금이 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지 않지만 날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묵묵히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야 합니다.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입니다. 빛만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 뜨겁게 불타며 엄청난 열을 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달은 스스로 뜨겁게 불타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착륙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기도 합니다. 태양만큼 밝지는 않아도 보름때는 제법 밝게 빛나기도 합니다. 태양빛을 많이 받아 반사하면 환한 달빛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뿐 아니라 옛날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달빛은 늘 밝게 빛나지 않습니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면 반달도 되었다가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아주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구가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의를 행할 능력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성품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의롭게 살 수 있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의지도 약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불이 전혀 없는 저 달도 환하게 세상을 비추지 않습니까? 해의 빛을 받아 반사하면 저렇게 밝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으나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삶을 살면 얼마든지 아름답게 빛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구가 해를 가릴 때 깜깜해지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예수님은 가리우지 못하게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심이 내 안에 빛나는 예수님을 가리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이, 허영심이, 정욕이, 시기심이 예수님을 가리우지 못하게만 한다면 언제나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얼굴을 통해 밝게 빛날 것입니다.
경기도 성남에 아주 가난한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 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수십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되어 교회를 오는 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은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가난이든, 실패든, 고난이든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가운데서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건강하고 성공하며 부유할 때는 누구든지 행복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어려워지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너그럽던 사람들도 짜증이 많아지고 화를 잘 냅니다. 불행하게 생각하고 어쩔줄 몰라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때에도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안에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질병과 싸웁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난을 견딥니다. 실패속에서도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고난가운데 있을 때에도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새 힘을 예수님으로부터 계속 공급받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전히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삽니다.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솟아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속으로 부러워합니다. 그 비결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꽃이 향기를 발하면 벌과 나비가 몰려오듯이 우리가 모든 환경속에서 변함없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면 사람들은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끌리게 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께 끌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짧은 생애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전생애동안 예수님을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