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는 어부”들을 그리는 심성보 감독의 <해무>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때 빛나는 영화다.
가장 표면화되어 있는 상징은 아마도 ‘배’일 것이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척의 배와 그 속에 탄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는 언제나 ‘사회’ 혹은 ‘국가’를 상징한다.
사회에서처럼, 배 속의 집단은 철저히 계급화되어 있으며,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동포’를 들먹이는 조선족 밀항자를 두들겨 패면서 선장은 외친다.
“이 배에서는 내가 대통령이고 판사고 느그들 아버지여!”
그 이름처럼 ‘강철 같은 주인’의 모습을 한 철주(김윤식)는 배의 소유자이자 선장이므로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
배는 선장의 권위가 신성에 맞먹는 권력을 행사하는 권위주의적 공간이다.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가 보여주듯 배의 질서는 권리, 진실, 심지어 생명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 영화는 권위를 가진 선장 철주의 선택이 다른 모든 선택을 압도하는 상황을 그린다.
선원들은 그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수동적 인물들로 그려진다.
오직 자신과 관련 없는 타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두 선원만이 선장의 결정에 저항한다.
잔인한 결정을 내리는 선장보다 그 결정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선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끔찍함을 느낀다.
성찰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질 때 인간과 괴물의 차이 역시 사라진다.
선장의 여러 선택은
“배를 버릴 수는 없지 않으냐”
는 언명에 근거를 둔다.
배를 국가의 표상으로 본다면, 선장은 ‘국가를 버릴 수는 없지 않으냐’는 말을 하는 셈이다.
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존엄성은 버릴 수 있다는 선장의 논리는 국가란 절대적인 실체이기에 국가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이들은 제거될 수 있다는 논리와 통한다.
노동자의 파업, 시민들의 시위 앞에서 ‘경제’를 들먹이는 자들, 가령 투명하고 강력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과 시민들의 저항을 비난하는 자들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를 버린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장되는 <해무>의 결말은 이런 국가주의적 논리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띤다.
이 배의 이름이 ‘전진호’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선장은 배를, 대통령은 국가를 언제나 ‘전진’시키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98년 10월, 곧 아이엠에프(IMF) 직후의 엄혹한 경제적 상황은 희생을 감수하고 ‘전진’해야 한다는 당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시간적 배경에 익숙하다.
경제적 상황 앞에서 경제적 논리에 따라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들로 바뀐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언제나 ‘전진’하라고 명령한다.
돈을 벌기 위해 밀항업을 선택한 선장과 선원, 돈을 벌기 위해 밀항을 선택한 밀항자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어쩌면 자본주의의 그 ‘전진’ 명령 탓에 비극을 맞이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끊임없이 ‘전진하라’는 그 명령을 거부하기 힘들어하는 중이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진보나 발전이나 전진은 없다.
바다에서 언제든 시야를 가리는 ‘해무’가 드리워질 수 있듯이, 전진과 발전은 언제든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 위기 속에서 전진의 환상을 성찰하지 못할 때 파국은 찾아온다.
이 영화는 권위와 돈, 혹은 그 둘의 결합(선장)에 저항하지 않은 채 전진해가다 파국을 맞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또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정확한, 가장 통렬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