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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이 오십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중개사
욥 3장 25~26절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은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임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인 이유이신지 사단의 참소를 받아들여 욥에게 연단이 주어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욥을 향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었기에 허락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로 3장 25~26절의 대목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 줍니다.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욥은 1장에서도 보신 것과 같이 자녀들이 혹시나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을까 염려되어 대신하여 제사를 드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진정한 믿음이 아닌 두려움에 드렸음을 우리는 이 곳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욥은 포도주를 즐겨 마시던 자녀들이 각종 집안 행사에서 놀고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자녀들과 집안에 환난이 오지 않을까 늘상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심리적으로 그 두려움을 위로받고자 제사를 드리기도 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몸에 악창이 나는 고통가운데 가만히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보니 이건 영락없이 늘 자신이 염려하고 두려워했던 일들이 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범죄하여 집안에 환난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염려되고 두려웠는데 진짜로 그 두려워했던 것이 실제로 임하였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나의 무서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라는 것은 이것으로 볼때 욥은 하나님께서는 복도 주시지만 형벌도 주신다는 것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형벌을 내리시면 감히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사망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음을 은근히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곤 하였는데 실제로 자기 몸에 그 무서움이 표현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의 믿음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로서 믿어온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 복도 주시지만 형벌도 겸하여 주시는 심판의 하나님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나 성도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나는 믿음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 고백하며 입술로는 사랑의 주님 찬송을 그토록 하지만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격하시는 것으로 오해들 하십니다.
특히 자신에게 무언가 안좋은 일들이 일어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득죄하여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는구나, 내게 고통을 주시는구나, 이런 나를 버리시는구나 생각하곤 하지요.
저는 주변에서 이런 신앙의 주소를 갖은 사람들을 곧잘 보곤 합니다. 분명 겉으로 볼때는 믿음이 대개 좋아 보이는데 심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 친밀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무언가 지키지 못한 계명이 있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형벌과 연단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주일 예배를 지켜야 하는데 그 날은 너무 몸이 아파서 주일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은 주일을 지킨것이 아니라고 주변에서들 말하니 이 한주간에는 어떤 안좋은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노심초사 하면서 스트레서를 무척이나 받는 것을 보곤 하였습니다.
우리들 신앙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해 보면 율법의 신앙과 은혜의 신앙이 있습니다.
율법의 신앙은 겉으로 볼때 믿음이 무척이나 커 보입니다. 신앙생활을 대개 잘 해 보입니다. 율법의 신앙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무언가를 잘 지키는 것으로 힘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들 합니다.
무슨 말이냐. 무언가 자신이 잘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들 한다라는 것입니다. 주일 지키기. 성가대 참여하기. 봉사하기. 바자회 나누기. 꼬박꼬박 그 시간에 기도하기. 성경 읽기. 십일조 드리기 등 이렇게 자신이 지키는 어떤 계명들이 있기에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이런 것들을 잘 그리고 많이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 온전해 지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때 은근히 판단이 나오고 답답해 집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싶고 이렇게 저렇게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때 믿음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하나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지키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며 일주일에 두번이나 금식생활하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떳떳히 들며 기도를 합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하나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그래서 기도를 하여도 자기 받고 싶은 복도 많이 구하였을 것입니다.
반면, 그 옆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세리는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래나 저래나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하였고 자신은 죄인이라는 마음을 떨칠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로 기도하였지요.
주님께서는 하나님 계명을 잘 지키는 그 바리새인이 의롭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자신은 저 세리와는 구분된 삶을 살아간다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것에 급급하고 있다면 그는 점점더 틀에 박힌 사람이 되고 자기 의에 높아진 사람이 되어갑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식의 계명 지키기를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어 하는 판단과 정죄의 신앙이 빠져들게 된다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신앙생활상인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알고 그래서 그 계명들을 지켜 나가고 있는 자기의 잘한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형벌의 무서움으로 인하여 제사를 드리는 하였고, 그러한 제사를 드리면서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기도 하였지만 실상은 중심의 제사는 아니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26절에 보시면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라는 고백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육적인 신앙태도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서두에도 말해왔습니다. 우리가 욥과 같은 연단을 받는다면 과연 누가 욥처럼 그래도 감사 찬송할 사람 있는가. 오늘날 욥기를 가르치면서 어떤 목회자가, 어떤 교역자가 욥과 같은 연단을 받아서 승리하여 가르치고 있는가.
그래서 욥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26절에 들어 있습니다.
육적인 신앙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바로 이렇게 육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될 때에는 안온도 없고 평안고 없고 기쁨도 없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시면 그는 노예로 팔려가 머나먼 외국땅에서도 온갖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리하였기에 범죄하는 것에 늘 경계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미혹을 하였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 범죄할 수 없다하여 뿌리쳤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였다면 당시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아리땁고 관능적이며 고운 옷을 입었겠습니까. 한순간 육신의 생각이 발동된다면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길을 열어주시는 것일지도 몰라 하면서 받아들였을 달콤한 죄의 미혹이였습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음에도 일체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저 사람대 하나님이 아닌, 인격대 인격으로서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였다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러한 영적인 실체의 믿음과 체험을 갖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반면, 욥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한 욥이였지만 그리고 욥은 선진들의 가르침과 풍문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익히 들은 지식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분을 믿고 나름 제사를 드리곤 하였으니 그 믿음은 영적인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그는 육적인 고통과 어려움 안에서 이내 불평과 원망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하늘의 실체를 알지도 못하였고 그 소망도 크지 않았던 욥은 이내 그 믿음의 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욥의 고백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안에서도 보면 응답이 있으면 좋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기도응답이 없거나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이내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또 하나는, 꼬박꼬박 십일조 내고 교회를 다니고 주일예배를 간다해도 어느덧 종교행위가 되어 있고 습관과 상투적인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이 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갖고서 결코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주님 믿습니다 이 고백 하나로 구원받는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욥의 말이 끝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바스가 한마디 합니다.
4:1~5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찌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엘리바스는 지금 감정이 뒤틀려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짜증이 나고 욥이 한심해 보였습니다.
욥 너는 예전에는 여러 사람들을 교훈하였고. 그러니까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잘 가르쳐주었고 네게 지식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도 잘 가르치던 너가 아니냐.
또한 손이 늘어진 자 다시 말하면 삶에 의욕을 잃고 비전과 소망을 잃어버려 정처없이 방황하는 이들도 붙들어 주었으며,
넘어져 가는 자. 다시 말하면 자기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낙심과 좌절감에 빠진 자들에게도 물질적으로나 심령적으로 도움을 주던 너 욥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너가 이젠 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너가 좀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해서 너 스스로가 답답해하고 무너지는것이냐 하면서 욥에게 뒤틀린 감정어린 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주위에서도 보시면 평상시에는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잘도 들이대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나님 말씀에는 이렇게 하라고 씌여있다면서 구절들을 마구 제시해가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받아들이든 말든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위로하였고 가르쳤고 행동하였다고 그래서 자신은 진리를 행한 것에 대한 뿌듯함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 막상 어려움이 오니 그들 자신도 매 한가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하고 가르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자신도 똑같은 어려움을 당하니 똑같이 낙심하고 슬퍼하더라는 것이지요.
엘리바스는 지금 욥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껏 너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가르침과 교훈, 그리고 도움은 도대체 어디 갔느냐. 너도 결국 매 한가지로구나
그러면서 욥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4:6~7절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무슨 말입니까. 욥 넌 평상시에도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을 생명과 같이 여기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고자 하였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살고픈 그런 소망이 네게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재산과 자녀를 잃었고 몸이 좀 아프다고해서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도 되는거야. 이건 정말이지 너 답지 않어. 너 옛날 모습을 함 생각해봐.
이어 엘리바스는 진리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죄를 가진 자는 종말은 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지 못한 사람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종말은 영원한 사망이요, 이 땅에서도 그 부귀와 권세는 오래 못갑니다.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하고 그 때가 되면 또 병들고 힘없어 노약해지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가 때로는 자기 생각속에서 말들을 하고 있지만 또 때로는 진리의 말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말들을 잘 구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엘리바스의 영적 교만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욥이 강건하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라면 감히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런 말을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상태가 이러하다보니 엘리바스는 과감히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말들로 욥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데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하면서 욥 너에게 죄가 있음을, 너에게 정직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어여 실토해보아라 라는 짐작하는 판단을 토로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시면 더 명확해 집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엘리바스가 진정 욥을 위로하는 선한 마음으로 말을 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에 감정이 뒤틀린 엘리바스는 지식적인 믿음과 가르침으로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멀쩡하다가도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안좋은 일이 있는 것은 다 하나님과의 담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러니 너 혹시 우리가 모르는 죄 짓은거 있지? 어서 말해. 어서 회개해. 이런 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을 한수 더 가르치고자 합니다.
10~11절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엘리바스는 도대체 뜬금없이 사자의 생활을 비유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인생사는 돌아가는 이치가 있음을 욥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자도 목소리가 그치는 초라한 상태로 가기도 하고, 힘센 젋은 사자도 이가 부러져서 초라한 꼴이 되기도 하고 늙은 사자도 잡았던 먹이도 놓치는 것이요.
다시 말하면 욥 너도 한때는 건강하고 물질이 풍성하여 너의 한마디가 곧 교훈이 되어서 주변인들에게 영향도 끼쳤고 너와 가족들이 때로는 즐거운 식탁에서 마음껏 먹고 누리고 살았지만 때가 되면 또 사람은 이렇게 병들고 아프고 가난해 지기도 하는 것이지.
나는 솔직히 지금껏 말은 못했지만 젋은 사자도 이가 부러질때가 있듯이 사자의 우는 소리도 그치는 때가 있듯이 너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이런것이 인생이다. 좋은 날이 있으면 슬픈 날이 있고 슬픈 날이 있으면 좋은 날이 있고...
그러나 엘리바스의 이 말은 진리의 말은 아닙니다. 육적인 경험과 삶의 연륜에서는 이 말이 옳아 보이나 진리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네 삶을 이럴때 저럴때 임의대로 들었다 내렸다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신앙에서도 곧잘 그럽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잘 했다 못했다 반복하는 것이 신앙인것처럼 가르치고 또 그러하게 생각들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충만함이 떨어지면 영적인 원인을 찾아보고 자신을 발견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나 너나 신앙하다보면 다 그런것이여. 원래 그런것이여. 안그런 사람 어디 있나. 그리고 우리 사람 그렇게 잘난게 아니야.
이런식으로 위로하며 상대를 일으켜 세워주려는 마음은 좋으나 결코 진리의 전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속에서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쳇바퀴 도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라는 것은 누누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신앙 잘했다 못했다 이런 반복가운데 어느덧 마음도 무디어져 이제는 낮은 레벨의 신앙생활로 접어들면서 타성에 젖은 종교생활로 만연해 가지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욥기편에서 계속해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더 가관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겪었던 영적인 체험을 한가지 간증하면서 욥에게 다시 또 가르쳐주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