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리스(2)-브레임(9)
글쓴이 그라테우스
그날 이후 난 사냥을 나가는 것이 껄끄러워졌다.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 괴물 소굴을 활보할 생각은 당연히도 없었다. 내가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브레임은 일정 크기 이상만 되면 아무 것이나 잡아오라고 말했고 몬스터를 잡아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몬스터를 잡아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안전하게 짐승을 잡아오는 방도가 있는데 뭐 하러 위험을 자초하겠는가?
어쨌건 사냥에 나가서 사슴을 추적했고, 거의 잡을 뻔 한 순간을 여러 번 맞이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노골적인 적대감이 담긴 그 시선 때문에 계속 사슴 사냥을 실패했다. 처음 그 시선을 느꼈을 때 난 그것이 전에 봤던 다이어 울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가오지 않고 관찰만하긴 했지만 그것이 보여줬던 능력과 내 등을 노리는 살기는 충분히 위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선가 살기를 뿌리며 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가까스로 사슴을 잡는 것에 성공했을 때 회색 괴수가 몸을 날렸다. 방금 죽은 사슴을 어께에 걸고 있던 난 어쩔 수 없이 사슴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검을 뽑았고, 어쩔 수 없이 검을 잡고 도망쳐야 했다. 몇 개의 큰 상처를 입힌 놈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슴까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기에 한참 후에 혹시나 하고 내가 그곳에 갔을 땐 사슴은 없어진 후였다. 결국 그 뺐어먹는 짐승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내곤 다시 사냥을 할 수 밖엔 없었다.
빠르게.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싶었던 이 거지같은 일은 내 의지와 정 반대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사냥을 나갈 때 마다 첫 번째 사냥감을 놈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만나자마자 놈에게 맞섰던 것은 처음뿐이었지만 부상을 입은 것은 그 뒤로 계속이었다.
화가 나게도 놈은 나보다 강했고 맞설 때 마다 그 강력한 이빨과 발톱에 상처를 입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첫 사냥감을 바닥에 놓고 그대로 도망도 가봤지만 놈은 사슴이 주요 목적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나를 따라잡아 덤볐고, 내가 죽을 뻔한 상황이 되어서야 물러났다.
날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상황에서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놈에 대한 감정은 깊어졌다. 하지만 격한 감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사냥을 나갈 때 마다 상처를 입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난 사냥을 나가지 않을 때는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될 때까지 몸을 혹사시켰다. 내가 지쳐 늘어져 있으면 어느 새인가 다가온 브레임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곤 ‘열심히 하는군.’이라 말하고 자기 할 일을 찾아 사라졌다.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도 아닌 그 행동은 내 감정을 조금 더 깊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어느 순간 그 다이어 울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이미 놈과 거의 비등하게 싸울 수준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또다시 반년이 지나.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 4년이 된 어느 날, 반년동안 보이지 않았던 늑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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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익숙해진 숲속을 익숙하게 나아갔다. 또한 익숙하게 사슴의 흔적을 찾아냈다. 1년 동안 숲을 전전하여 익힌 것이다. 얼마지 않아 사냥감이 보일 듯한 거리가 되었을 때 전방에서 사슴이 후다닥 달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바로 뒤쫓아야 하겠지만 사슴 대신 내게 다가오는 어떤 것의 기척 덕분에 난 그러지 못했다.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회색의 큰 짐승이 녹색 수풀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송아지만한 덩치. 커다란 앞발과 매서운 발톱. 새하얀 파괴적인 이빨. 그와 대조적으로 변한 부드러운 눈빛과 온유한 기세. 빛바랜 회색의 털.
“늙었군.”
그 거대한 늑대를 보며 내가 바로 느낄 수 있던 것은 그가 늙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혀 약해진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한데 왜 내게 온 것일까? 그것도 반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의 결론도 그리 어렵잖게 내릴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을 해서 결론을 내렸다기보다는 그냥 느꼈다.
“죽으러 온 거냐. 나에게.”
놈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난 늑대가 그렇다고 답하는 것을 느꼈다. 환청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이상하게 현실감 있게 느껴졌고, 난 늑대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냥 덤덤하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고개를 끄덕이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늑대가 웃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늑대는 분명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던 갈색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전신에 흐르던 온유한 기운을 찢어발기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야 예전의 그 늑대. 그 괴수로 놈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질긴. 일년에 걸친 악연이 끝나는 거냐?”
나는 질문하는 형식으로 놈에게 말했고, 놈은 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전혀 아니었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늑대가 말을 하는 것은 원래 이상한 것이니까.
“와라. 아니, 내가 가지!”
몸을 날렸다. 늑대가 뒤로 몸을 튕겼고 그를 쫓으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땅을 튕기듯 탄력적으로 내게 날아드는 그를 피하며 검을 그었고 피가 붉은 잔상을 남김과 동시에 등이 화끈해졌다. 약한 신음을 뱉어내고 몸을 틀었다. 등줄기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 하나쯤은 잘라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내 일격은 늑대의 옆구리에 선을 그어서 그 부근의 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난 다소 실망했다.
“쳇.”
불만을 토해낸 뒤 앞으로 뛰어들며 검을 내지른다. 그는 앞발을 들어 피하곤 반대 발로 나를 후려치려 했다. 앞으로 다가가 그 위협적인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순간 거대한 입이 다가들었다. 반사적으로 왼팔이 움직였고 팔꿈치가 그의 코를 찍었다.
캥
비명 소리가 들리고 물러서더니 그는 다시 신경질적으로 달려들었다. 검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거대한 머리가 가슴을 들이 받았고, 그와 동시에 검이 움직였다. 피가 솟아오름과 동시에 빠르게 주변이 질주했다. 나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가는 이상한 모습. 그 다음 순간 질주하던 주변이 멈추며 등에 통증이 전해졌다.
등에 있는 상처가 더욱 심해졌을 것이라는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며 가슴 전체를 울리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함께 남아있던 숏소드를 뽑아들었다. 정면에선 등에 검을 꽂고 피로 회색 털을 물들이고 있는 늑대가 보였다. 왠지 그가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크와아앙!”
울부짖음. 거대한 늑대는 한차례 검날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울부짖고는 다시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순간 난 보았다. 스러지기 직전의 촛불이, 불꽃이 찬란히 빛나는 것 같은 환영을. 숏소드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을 가했다. 한번에 끝낸다.
“한번에 끝낸다.”
집중. 집중한다. 서서히 시야가 좁아진다. 이걸 하면 안돼! 스스로가 비명처럼 소리친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무시한다. 시야가 더욱 좁아진다. 나와 검. 늑대와 늑대 등의 검만이 보인다. 미친 짓이야! 될 리가 없어!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무시한다. 시야가 더 좁아졌다. 나와 늑대를 제하면 모두 어둠으로 보인다. 무어라 내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앵앵거린다.
그때 늑대가 움직인다. 등에 검을 꽂고 검은 땅을 밟고 검은 하늘을 가르며 달려온다. 빠르다. 10초면 내게 닿을 것 같다. 아니, 5초면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느리다. 너무나도 느려 그 움직임과 털의 휘날림이 모두 보인다. 검을 움직인다. 70센티의 검이 느리게 움직인다. 느린 듯 빠른 듯 움직이던 늑대는 이미 지척으로 다가왔다.
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벤다
머릿속에 갑자기 증식하는 단어. 늑대가 몸을 날린다. 무서운 발톱들이 번뜩이고 하얀 이빨이 소리 없이 표호 한다. 그리고 그와 맞닿는 순간 몸을 비튼다. 자세를 낮춘다. 하지만 손은 위로. 그리고 하얀 섬광이 번쩍. 붉은 피보라가 타오른다. 미지근한 불이 얼굴로 떨어지고 즉시 몸을 옆으로 굴린다. 데굴 굴러 쓰러지는 늑대를 피해낸다. 바로 일어서선 천천히 비틀거리듯 쓰러지는 늑대를 바라본다. 그리고 늑대가 땅에 침몰하는 순간.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빨라진다.
툭
손에 들고 있던 숏소드가 떨어졌다. 그것을 힐끔 보곤 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부터 배까지 갈라진 이 큰 짐승은 슬프면서 평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점점 숨이 느려졌고, 결국 호흡이 멈췄다. 심장이 멈춘다. 움직임이 멎었다.
“잘 가라.”
1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적. ‘적대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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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 갑자기 시간이 급속도로 흘러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