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제, 아직 멀었다
한국영화들이 상을 싹쓸이한 아시안 어워드까지 포함하면 제31회 홍콩국제영화제는 4월 7일까지 대략 20일 정도 길고 먼 대장정의 일정으로 치러지는 셈입니다. 너무나 긴 일정 때문인지 영화제 게스트들이 초반에 몰렸다가 후반에는 급속히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더군요. 영화 스크리닝 일정이 후반에 지정되어 있어, 저는 3월 30일에 홍콩에 도착했고, 전 지금 막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있을 때 아예 홍콩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여겼던 홍콩국제영화제가 예전의 아시아 맹주 영화제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 선언한, 올 2007년 31회 영화제에 거는 아시아 영화인들의 기대는 사실 여느 해와 달랐을 겁니다. 아시안 어워드도 만들어지고, 또 여러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덧붙여졌으니까요. 저도 처음 가보는 홍콩영화제인지라 기대가 좀 있었더랬어요.
허나 막 홍콩에 도착했을 때부터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더군요. 졸속으로 치러졌다는 ‘아시안 어워드’를 둘러싼 홍콩 언론의 비난과 어디선가 본 듯한 프로그램 나열에 대한 영화인들의 비판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드릴 공사를 해서 잠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나게 하고 창문도 없는 닭집 같은 호텔에 감금 아닌 감금을 해놓은 것이나 함께 간 배우에게 어떤 설명도 없이 장애인용을 내정해서 뭔가 오해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상황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 홍콩에 막 도착했을 때 영화제 측이 보인 어설픈 행사 진행 방식만 봐도 홍콩영화제가 얼마나 성의 없이, 준비 없이 치러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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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Asian Film Awards | | 그 예를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3월 30일 오후에, 전 <후회하지 않아>의 주인공인 이영훈과 함께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픽업 나온 스탭이 있길래, 당연히 픽업용 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더랬지요. 하지만 웬걸, 유치원생들이 붙이고 다니는 노란 스티커 딱지를 가슴에 붙이게 해놓고는 마침내 40분이나 기다리게 한 끝에 호텔로 가는 셔틀 버스에 저희를 태우더군요. 그간 많은 영화제를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크고 작은 여러 영화제를 경유해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게스트에 대한 이런 대우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더군요. 혹시 한국의 인디 영화라서 이런 푸대접을 받는가 싶어 괜스레 오해가 모락모락 제 마음자락에 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초대된 다른 한국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노란 스티커와 호텔 셔틀 버스 때문에 다들 경악 아닌 ‘경악’을 하셨더군요.
제가 지금 감독과 배우는 당연히 삐까뻔쩍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영화제에 초대를 했으면, 최소한 게스트들의 초행길에 대해 최소한 영화제 집행위가 가져야 하는 배려와 관심을 지적하고 있는 거지요. 돈이 없으면, 미안하다 우리 돈 없다 사과하며 지하철을 함께 타도 무방한 노릇이지만, 소위 ‘국제영화제’란 타이틀이 무색하게시리 상황에 대한 개요 설명과 사과도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구는 태도는 아연실색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랄 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죠. 공식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맙소사, 공항에서 호텔로, 그리고 호텔에서 공항으로 이동하는 셔틀 버스비를 바로 본인이 직접 부담해야 했던 겁니다! 3시간 전에야 공식 일정을 알려주는 어설픈 영화제 진행 방식도,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는 통역 문제도, 파티라고 불러다 놓고 거개의 술값을 본인 부담으로 돌려놓는 것도 별로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다만, 왜 사전에 아무 설명도 없이 초대랍시고 떡 하니 불러다 놓고 그런 모욕을 주는지 전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어요. 덕분에 가지고 간 돈을 탈탈 털어주고 간신히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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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Asian Film Awards | | 수백 편의 영화, 수십 명의 영화제 게스트를 단기간 일정 안에서 모두 관장해야 하는 영화제 특성상 종종 어딘가에서 실수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실수 하나로 영화제 전체를 일반화해서 가치절하하는 것은 당연히 온당치 못한 일일 겁니다. 허나 초대된 게스트 입장에서 영화제의 처음과 끝이랄 수 있는 픽업 과정의 어처구니 없는 처사는 이 영화제가 아직 국제영화제로 갖춰야 할 하부구조가 얼마나 부실한지, 부산국제영화제를 뛰어넘겠다 선언한 그 호언장담이 실은 얼마나 ‘뻥’인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랄 수 있겠지요. 무릇 영화제는 리듬입니다. 대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길고 먼 일정 안에서 프로페셔널한 스탭들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부산영화제처럼 훈련된 자원봉사자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와서 대충 가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 어떤 발전이 있겠는지요.
영화제는 아카데미를 벤치마킹하고, 여타 국제 영화제를 흉내 낸다고 해서 발전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다시 와서 영화를 보고 싶어하고, 감독과 배우들이 다시 와서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그 욕망을 잘 다독이고 제어할 줄 알아야 비로소 발전 가능성을 그 씨앗으로 품게 되는 거겠지요. 홍콩영화제, 아직은 먼 듯 보입니다. 영화제에 막 기대를 해서가 아니라, 제 사춘기 시절의 상상력 전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바로 ‘홍콩영화’의 영화제이기 때문에 더 속이 상한 것 같습니다.
홍콩을 걷다
영화제 일정 동안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홍콩 거리를 걸어다녔습니다. 가난한 데다 명품이나 쇼핑이다 하는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저인지라 그리 발품을 팔고 돌아다닌 까닭은 바로 그 옛날 홍콩영화의 흔적들을 눈에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왕가위의 <화양연화>에 나오는 찻집에도 가보고, 또 왕가위의 <중경삼림>에 등장하는 가게에도 가봤습니다. 영화와 달리 작더군요. 그리고 제가 홍콩 영화 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두기봉 감독의 영화에 나올 법한 뒷골목 거리들이 어디에 있을까, 정보도 없이 무작정 작다고만 여긴 홍콩섬을 부지런부지런 돌아다녔더랬지요.
짧게나마 대충 돌아본 홍콩, 정말 번잡한 도시였어요. 좁은 땅덩어리에 깎아지르게 쌓아올린 고층 빌딩 사이로 습도와 열기, 그리고 도시의 냄새들이 잔뜩 고여 있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어요. TV에 자주 나오는 홍콩섬 전경 같은 잔뜩 클리셰한 장소들도 돌아봤지만, 몽콕처럼 홍콩 냄새 자욱한 번잡한 거리들을 더 많이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깜짝 놀랄만한 풍경과 조우하게 되었어요. 일요일이었지요. 어쩌다가 홍콩섬의 빅토리아 파크에 가게 되었는데, 그 주변 길거리 곳곳을 완전히 동남아 여성들이 다 장악하고 있더군요. 그냥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돗자리나 천을 깔고 앉아 삼삼오오 도시락을 까먹거나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전 무슨 종교 행사일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각기 나라도 다 다르고,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도 다 다르더군요. 나중에 센트럴 지역에도 갔는데, 그곳도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어요. 홍콩인들을 제외하고 수 천, 수 만 명의 다른 국적의 여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길거리에 앉아서 놀고 있는 풍경은 정말이지 제 궁금증을 사정없이 부채질하더군요.
그러다 결국 밤에 통역을 도와주는 분한테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홍콩의 ‘식모들’이라는 거였습니다. 일주일 내내 보모로, 식모로, 하우스키퍼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일요일만 되면 공원이나 큰 건물 주위에 친구, 친지들과 나와서 하루를 즐긴다고 합니다. 그들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대략 50만 원 정도의 저임금이고, 맞벌이 부부가 많은 홍콩의 가사일과 관광 도시의 서비스를 그들이 도맡고 있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홍콩이 그 옛날 고대 그리스 같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시민 민주주의가 화려하게 꽃 핀 그리스였지만, 그 영예는 오롯이 그리스 시민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실제 그리스의 경제를 담당한 것은 노예였어요. 인구의 2/3를 차지하고 있지만 ‘도구’나 진배 없던 노예들이 광산에서, 도심 바깥 일터에서 노동을 제공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리스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처럼, 명품 진열대가 차고 넘쳐나서 ‘쇼핑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 홍콩 역시 그림자 경제를 담당하는 저 ‘식모들’ 때문에 그 화려한 위용을 갖출 수 있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물론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4월 1일, 장국영을 만나고 오다
이번 홍콩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만다린 호텔이었어요. 사실 ‘인상적’이다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센트럴 역에서 내려 건물을 돌아 만다린 호텔로 접어드는 순간, 그리고 추모의 꽃들이 하얗게 수놓아진 호텔 구석을 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으니까요.
함께 간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 감독, 그리고 저와 이영훈은 아무 말 없이 각자 사진을 찍었어요. 추모 사진과 꽃들, 호텔 지붕 모서리와 만다린 호텔, 그리고 바로 그 자리를 찍었어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던 것 같습니다. 바로 만다린 호텔은 4년 전 4월 1일, 장국영이 몸을 던져 자살한 곳이었기 때문이에요.
공교롭게도 4월 1일에 홍콩에 체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 장국영을 바로 그 자리에서 추모할 수 있었습니다. 3월 31일, 그리고 4월 1일에 두 번에 걸쳐 그곳을 찾아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꽃을 놓았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리고 사진을 찍더군요. 4년이 지났지만, 위대한 아시아 배우였던 장국영,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몸을 던져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장국영을 기리는 마음은 모두가 같았겠죠. 사실 전 이틀 동안, 영화의 거리에 가서 장국영의 <영웅본색> 주제가를 부르는 무명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잔뜩 우울해졌고, 그 날 밤에는 평소 장국영이 자주 놀러 갔다고 알려진,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바 ‘프로파겐다’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어요. 그저 그렇고 그런 디스코 클럽이어서, 체취를 감지하겠단 애초의 제 희망과는 달라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뭐랄까, 이 날 만큼은 장국영, 그와 함께 하고 싶었으니까요.
제게 영화의 매력을 알려주고, 어떤 청춘의 낭만을 가르쳐주었던 80년대 말의 홍콩영화들, 수업 중에도 학교를 도망쳐 극장으로 달음박질하게 했던 제 고삐리 시절의 그때 그 홍콩스러운 영화들은 장국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게는 홍콩의 상징 그 자체였어요. 만다린 호텔 앞, 바로 장국영이 자살한 곳에 서서 그가 추락한 건물 모서리와 하늘을 가만 올려보고 있자니, 다시금 한 시대가 마감한 듯한 느낌이 들어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홍콩영화제에 실망하고, 홍콩 도시의 이중성을 깨닫고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홍콩에 갔다온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장국영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홍콩 야시장마다 걸려 있는 각양각색의 이소룡 티셔츠 앞에서는 씽긋 웃을 수 있었지만, 아직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탓인지 장국영과 대면하고 있을 때 매연 가득한 복잡한 홍콩의 길목마저도 아스라한 추억의 이미지처럼 제 눈에서 다르게 채색되는 걸 보면, 제게 홍콩영화와 장국영은 그리 단단히 엮어진 마음의 의지처인 모양입니다.
영화감독 이송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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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송희일 씨는 전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립영화창작집단 ‘젊은영화’를 결성하였으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단편 <언제나 일요일 같이>, <슈가힐>, <굿로맨스>, <마초사냥꾼>, <나랑 자고 싶다고 말해 봐>를 연출했으며 옴니버스 장편 영화 <동백꽃>의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그 중 <동백아가씨>를 연출하였습니다. 현재 장편 데뷔작인 저예산 디지털영화 <후회하지 않아>를 개봉하고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호평받고 있습니다. | |
첫댓글 홍콩 가고싶다 ㅠㅠ
장국영..............ㅠㅠ
ㅜㅜ
장국영 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희일감독님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