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고백(13회)-국민그룹 god·윤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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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12월 20일 서울 이태원의 한 병원에서 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시작된다.태어난 곳이 그리 평범한 동네가 아니어서 그런지 나는 무지 심 술궂은 아이로 자라났다.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던 나는 다섯살 때 동네 구멍가게 아이스크림통 을 죄다 열어놓았다.나만 먹기 위해,욕심쟁이인 내가 다 못 먹으니까 다른 사람도 못 먹게 하기 위해 그랬다.또 재민이보다 조금 더 컸을 때는 장난 감 자동차를 타고 나가 동네 전신주 밑에서 잠들어 밤새 부모님을 몹시 애 타게 한 적도 있다.워낙 장난꾸러기였던지라 우리 가족은 나 때문에 동네 에서 쫓겨나듯 이사를 가기도 했다.
확실히 내 인생의 시작은 그리 평탄하지 않은 것 같다.아니 평탄하지 않 았다는 말로는 좀 설명하기가 어렵다. 신기한 일을 많이 겪었다는 게 들어 맞을 듯하다.유치원 시절 합주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연습도 한번 안하고 그 럴싸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흉내냈다.
부모님은 실제로 내가 멋지게 연주한 걸로 착각하셨다.그래서 합주대회가 끝나자마자 “우리 아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네”라며 몹시 기뻐하셨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은 사실 좀 창피하다.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글을 전혀 몰랐다.1학년 첫 받아쓰기 때였다. 고작 두세 개만 맞고 몽땅 틀렸다.그 일로 심한 충격을 받고는 두 달 만에 한글을 깨쳐 나중에 당당히 100점을 받았다.과연 이런 사실을 믿을 사람 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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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별났지만 내 주위에도 괴팍한 사람이 많았다.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발표를 못했다는 이유로 내게 뼈 아픈 한마디를 던졌다.“이름은 계상하게 생겨서 괴상한 짓만 하네.” 정말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었다.그런 데 다음날 담임선생님은 청소를 안한다는 이유로 또다시 “너 정말 계속 괴 상한 짓만 할래”라고 하셨다.이 말 때문에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겨 지 금까지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도사인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식중독에 걸려 “너무 아파 집 에 가겠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4시간 동안 기도를 드렸다.난 기절한 채로 집에 갔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중학생이 됐다.중학교 때 농구를 무척 좋 아한 나머지 여름방학 때 혼자 학교운동장에서 열심히 농구를 했다.그런데 실수로 내가 던진 농구공이 한 아이의 머리에 맞았다.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나를 무지하게 때렸다.정말 아팠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는데 그렇게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글쎄 그때 나를 때린 아이가 나보다 한 학년 아래 아닌가.창피했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 그 아이를 피해 다녔다.
이 사건 때문에 난 그 후로 싸움 같은 것에 관심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누나가 플루트를 전공해 레슨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집안형편도 조 금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입학한 지 이틀 만에 큰 패싸움을 일으켰고 유치하지만 난 일명 ‘노는 아이’로 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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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정말 방탕하게 세월을 보냈다.하지만 집에서는 정말 착한 아들로 행 세했다.밤새 논 날은 밤새 공부한 것처럼 둘러댔다.이중생활을 한 셈이다.이 렇게 시간이 지나고 학교에서 몇차례 경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학생부 선생님에게 들켜 드디어 학 교에서 부모님을 호출했다.부모님은 학교에 가시기 전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다.어머니는 담임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린다며 과일 한 박스까지 사가지 고 가셨다.그러나 담임선생님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충격을 받으셨 다.울면서 교문 밖으로 나오신 어머니는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는 한마디 만 던진 채 가버리셨다.부모님께 큰 불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잡은 나는 서클에서도 빠지고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했다.그런데 같 이 놀던 친구들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고3 체육대회 날 그 친구들은 날 빈 교실로 데리고 갔다.나는 죽도록 맞았다.그 뒤 고3 같은 반 친구인 재섭이 를 만나게 됐다.지금은 호주로 유학간 재섭이와 친해지면서 고3 말에는 취업 해 꽤 괜찮은 월급을 받으면서 돈도 제법 벌었다.
그렇지만 계획 없이 돈을 쓰고 다니는 아들을 아버지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셨다.중앙대 부속 전산원에 보내 공부를 더하도록 권하셨다.
재섭이와 함께 전산원을 다니면서도 조금은 방황했던 것같다.몇달 후 MT를 갔는데 노래대회에서 재섭이의 권유로 얼떨결에 노래(당시 나는 약간 록에 도취돼 있었다)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아버님과 친분이 있던 학장님은 지금 의 날 키워주신 정훈탁이사님을 소개시켜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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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정훈탁 이사님을 만났을 때는 성함도 잘 몰랐다.김지호를 키운 매니 저라는 이야기는 전해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명동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아르 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나보고 다시 한번 정 이사님에 게 연락해보라는 것이었다.아버지께 또 다시 거부의사를 밝혔는데 며칠 뒤 정 이사님으로부터 직접 연락이 왔다.주위 친구들은 그냥 만나보라고 권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난 양재동에 있는 기획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약간 평수가 넓은 사무실이었고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계신 이사님을 보고 는 말단 직원으로 착각했다.그럭저럭 이야기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모퉁이를 도는데 당시 한창 ‘잘 나가던’ 김지호 박신양 정우성 한재석 장혁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사진을 보고 돌아온 나는 정 이사님으로부터 “내가 키운 애들인데 ‘god six’라는 그룹을 만들 예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다시 이것저것 물어본 뒤 사진까지 찍었다.바로 그 자리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에메랄드 캐슬의 ‘ 발걸음’을 불렀다.
다음 날 바로 난 연습실로 갔다.거기서 ‘쭌이형’(박준형)을 처음 봤다. 정말 그 때는 흑인만큼 까맸는데 쭌이형은 날 보며 춤을 춰보라고 권했다.그 전까지 록만 즐기던 나는 그제서야 내가 준비할 그룹이 댄스그룹인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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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데뷔앨범 준비작업이 진행됐고 진영이 형에게 ‘어머님께’라 는 곡을 받았다.그 때까지 록을 부르다가 갑자기 랩을 맡게 돼 난 또다시 시 련에 부딪쳤다.견디다 못해 팀을 나가려고 했다.“나가도 좋은 데 후회할 거 면 그냥 있어”라는 ‘쭌이’형 말에 다시 힘을 얻어 연습에 몰두했다.다른 멤버들도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그 때 내게 그렇게 애써준 멤버들이 고 마울 따름이다.
방송 데뷔에 앞서 우리는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우리는 크게 망신했다.한마디로 연습부족이 었다.그 뒤 두 달 동안 안무연습에 더 매달렸다.
드디어 99년 1월 13일 첫 방송을 하게 됐다.다행히 ‘어머님께’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우리의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져 무척 기뻤다.덕분에 2집을 준비할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녹음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는 3집 활동을 하고 있다.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god란 그룹이 ‘만들어진 가수’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가수’란 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god의 꾸밈 없는 색깔을 보여주고 싶다.
하늘색 풍선이 흔들릴 때마다 저 파란 하늘만큼 큰 사랑을 느끼게 해준 팬 들에게 감사한다.god 멤버들과 절대 변치 않는 우정을 키워나가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정리 정재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