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판사분들하고만 인터뷰를 하세요. 사실 고생을 더 많이 하는 건 검사들입니다. 판사들의 업무가 「살인적인 격무」라고 하지만, 검사들은 그 이상이에요. 세상의 온갖 잡범들, 흉악범들, 지능범들하고 싸우는 게 검사 아닙니까? 검사들 얘기 한번 다뤄 주세요』
月刊朝鮮 10월호가 나온 직후 대검찰청 공보관실에서 전화가 왔다. 『李기자가 쓴 李宇根(이우근) 춘천지법원장, 金英蘭(김영란) 대법관 인터뷰를 재미있게 읽었다』며, 검사 이야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이었다.
문제는 누굴 인터뷰하느냐였다.
『검사들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검사다운 분을 추천해 달라』고 大檢에 부탁했다.
大檢이 추천해 준 검사가 金洪一(김홍일·49) 대전지검 형사1부 부장검사였다. 전화를 걸었더니, 金부장검사는 『남의 입에 오르는 게 싫다』며 인터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大檢에 지원을 요청했다.
상당히 강한 「압박」이 진행됐는지, 1주일 뒤 金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추석 전날인 지난 9월27일 밤이었다.
명절날이라 만날 장소가 영 마땅치 않았다.
金검사는 『장소를 하나 긴급 수배해 놓았다』며, 서울 강남에 있는 팔레스 호텔로 나오라고 했다. 그가 수배한 장소는 로비에 있는 흡연실이었다. 작은 탁자와 의자가 몇 개 놓인 두 평쯤 되는 방이었다.
검찰의 취조실과 흡사했다.
생면부지의 강력검사와 좁은 공간에 단 둘이 앉아서 얘기를 한다는 게 좀 서먹서먹했다. 그는 의자를 바짝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준비가 됐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자, 시작하시죠』
金검사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취조가 시작된 것인지, 나의 취재가 시작된 것인지, 어쨌든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호텔 흡연실에서 시작된 인터뷰
金검사는 訥辯(눌변)이었다. 그는 가공되지 않은 싱싱한 언어를 구사했다.
『요즈음 조폭들은 칼질을 하는 게 아니라 돈질을 해대요』, 『조직범죄는 떠오르는 대로 자꾸 쳐내야 해요』, 『그녀석들이 제 버릇 개 주겠어요』
그는 대답을 짧게 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머리 속에서 정리된 언어를 보여주는 판사들과 달리, 검사인 그는 빠르게 질문을 이해하고, 즉각 답을 내놓았다. 어휘와 표현은 간결했다. 판사가 철학적이라면, 세상의 먼지를 보통사람들과 함께 뒤집어쓰고 사는 검사는 通俗的(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金洪一 검사는 강력부 검사로 잔뼈가 굵었다.
「지존파 살인사건」, 「영생교 신도 살인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황수정 필로폰 복용사건」, 「폭력조직 汎서방파 두목 김태촌 사건」, 「슬롯머신 사건」, 「경성그룹 비리사건」, 「서방파·양은파 副두목의 기업형 폭력사건」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그의 지휘 아래 처리됐다.
조직폭력배, 정치인,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金검사의 예리한 레이더 망에 걸리면 자유로울 수 없었다.
金洪一 검사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초대 부장을 맡았던 沈在淪(심재륜) 변호사, 강력부 창설 멤버였던 조승식 大檢 강력부장, 남기춘 서울지검 특수2부장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강력수사통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趙垠奭(조은석) 대검찰청 송무과장은 『많은 범죄자들이 金검사에게 잡혀 囹圄(영어)의 몸이 되었지만, 그를 원망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면서 『범죄에 대해서는 敵愾心(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범인에 대해서는 인간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金洪一 검사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장골이다.
40代 후반의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출생신고가 3년 늦었다』고 말했다.
金洪一 검사의 목소리는 굵고 깊었다.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氣에 눌리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조직폭력배를 상대하자면, 氣가 세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샌님 같은 사람들이 강력검사일을 더 잘해 냅니다.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이 적임자죠. 조직폭력을 수사하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설렁설렁 조사했다가는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꼴이 돼요. 조직원은 보스가 「칼질을 하라」고 지시해서 살인을 했어요. 살인한 조직원은 피해자하고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이에요. 이 조직원이 어느 派(파)의 조직원인지를 캐내지 못하면, 그냥 술 마시고 시비 끝에 우발적으로 찌른 사건이 돼 버려요. 조직원 잡아서 징역을 1~2년 살리면, 그 친구는 별 하나 달아서 한 계단 올라가고, 組暴(조폭)을 더 키우는 거죠. 「두목이 버튼을 눌러서 범행이 이뤄졌다」는 것을 철저하게 입증해야죠』
벤처·사채·경매에서 돈 버는 조폭들
강력부는 검찰內에서 대표적인 3D부서에 속한다.
강력부는 「폭력조직」이라는 巨惡(거악)과 맞서 싸우고 있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이후 14년 동안 전국 강력부에서 잡아들인 조직폭력배가 7000명을 넘었다. 이 중 金검사가 검거한 강력사범만 300여 명에 이른다.
―최근 열린당이 보호감호를 규정한 사회보호법을 폐지키로 당론을 정했습니다. 보호감호제도가 없어지면 강력범 전과자들이 쏟아져 나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보호관찰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죠. 한번 편하게 사는 맛을 본 사람은 그 생활을 버리기 어려워요. 조직폭력배의 경우 완전히 손을 씻고 조직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재범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발범이거나 격정범은 아무래도 재범의 가능성이 적어요. 계획범죄나 조직범죄는 달라요. 수면에 올라오면 자꾸 쳐내야 합니다. 보호감호 문제는 형사정책적으로 더 검토해 봐야 해요』
전국의 조직폭력배는 199개派, 500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이 검찰의 분석이다. 검찰은 전국 28개 지검·지청을 통해 조직폭력배 162개派 668명을 관리하고 있다. 金검사는 올해 들어 기업형 조직폭력배 100여 명을 구속기소했다.
金검사가 수사했던 조직폭력배로 汎서방파 두목 김태촌(56)이 있다. 김태촌 세력은 「양은파」의 조양은, 「OB파」 이동재와 함께 1980년대를 풍미했던 3대 폭력조직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검찰이 조직폭력배를 검거했다는 소식이 뜸하던데요.
『특별히 문제를 안 일으키니까요. 요즘 조폭은 오직 「돈」입니다. 돈맛을 알아요. 옛날 건달하고 달라요. 돈 되는 일에 깡패가 들끓고 있어요. DJ 정권을 거치면서 조폭들이 경매, 私債(사채), 벤처를 해서 상당한 富를 축적한 거요. 이제는 칼질하지 않아요. 돈질을 하지…』
金검사는 『요즘 조직폭력배들은 칼부림을 하지 않고 「돈질」을 하기 때문에 수사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金검사의 말을 빌리자면 요즈음 잘나가는 조폭들은 「기업형」으로의 전환을 거의 마무리해 가고 있다. 유흥업소나 私債, 건설업 등의 이권사업에서 한발 더 나가 기업 M&A(인수합병)와 株價(주가)조작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인수합병과 私債시장 등에 투자자로 참여, 기업사냥꾼 등과 공모해 불법 폭리를 취하고 있다. 재산은닉의 수법이 神出鬼沒(신출귀몰)하다고 한다.
巨惡이 발 뻗고 못 자게 만든다
『조폭은 음성적인 자금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는 조직을 유지하고 키워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어요. 단순 갈취를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피를 빨아 먹는 거죠. 끊임없이 조폭들을 제압해 잡아들여야 해요. 「너희들이 그렇게 돈 벌어서는 발 뻗고 잘 수 없다」, 「설치다가는 반드시 수사기관에 검거돼 징역을 산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한때 「호남 조폭이 득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요.
『주먹세계가 전국구와 지역구가 있는데 호남주먹은 전국구가 많아요. 서울에 집중돼 있고…. 겉으로는 사업가들이라 표가 안 나요』
―기업형 조폭을 이끄는 보스들은 경제감각이 뛰어나야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조폭의 리더십이란 돈이에요. 아래 애들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돈이고, 문제 생겼을 때 해결해 주는 것도 돈입니다. 「조직이 돈이 많고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면, 애들이 벌떼같이 모여요』
지난 4월, 무일푼이던 양은파 부두목 강모는 기업사냥꾼을 동원해서 인위적으로 한 회사의 株價를 끌어올리게 했다. 그는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거죠. 갖은 수법으로 株價를 끌어올려 재미를 봤지만 자금부족으로 더 이상 매수주문을 못 냈어요. 株價가 폭락하자 작전세력을 협박해 갈취하다 걸렸어요』
―범죄단체를 조직한 경우는 가중처벌을 받죠. 하지만 「조폭」을 규정하기가 애매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범죄단체조직죄」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으로서 내부 규율, 지휘통솔체제가 갖춰져야 해요. 그리고 그것이 계속적이어야 하고요. 그 목적은 폭력범죄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가 돼야 지휘통솔 체제를 갖췄다고 볼 수 있느냐? 재판을 해 보기 전까지 몰라요. 애매한 부분이죠』
조폭들의 협박
―조폭에게서 협박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애들은 잘 있느냐」, 「밤길 조심하라」고 조폭들한테 협박전화가 와서 수일간 경찰관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우리 집 주변을 순찰한 일이 있었어요. 출감한 조폭들이 가끔 전화를 걸어서, 「이젠 바르게 살겠다. 한번 찾아뵙겠다」고 해요. 제가 「오지 말라」고 해요. 괜히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요』
―강력수사를 하다 보면 위험한 일이 많을 텐데, 적성에 맞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정말 잘 하려면 그 일을 즐겨야만 한다. 「해야 돼서 하는 사람」, 「좋아서 하는 사람」, 「즐기면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즐기면서 하는 사람이 제일 잘 할 거예요. 나는 즐기는 정도는 아니지만 좋아는 해요』
전국의 검사는 1474명이다. 이 중 여성검사가 103명이다.
지난 6월에 처음으로 여성 부장검사가 배출됐다. 金검사는 『검사 일이 꼼꼼해야 하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情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성 검사의 증가는 바람직하다』고 했다.
국가 공권력을 최일선에서 행사하는 검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기소권은 검찰에만 있다. 경찰은 모든 수사에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초임 검사가 지방에 부임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감」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검사는 도랑에서 오물을 치우는 역할을 합니다. 맑은 물을 흐르게 할 순 없어요. 공권력은 유일하게 법적으로 허용된 「폭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의 집행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공권력이 치우쳐서 집행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불행한 일이죠』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검찰이 멸시의 대상이 된다』
―『법이라는 그물에는 强者와 富者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너무 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아우성치는 피의자들이 많죠.
『사건의 진실을 정확히 못 밝히면, 죄 없는 사람을 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99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한 사람을 안 만들려고 노력해야죠.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검찰이 멸시의 대상이 됩니다』
金검사는 1992년 발생한 김기웅 순경 애인 피살사건을 담당했다.
「김기웅 순경이 애인을 여관으로 끌고 들어가 목졸라 죽였다」는 것이 사건의 뼈대다. 김기웅 순경은 1심에서 징역 12년, 항소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상태에서 眞犯(진범)이 잡혔다. 김순경은 13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金검사는 이때 옷을 벗으려고 했다.
『경찰에서 부모가 입회한 자리에서 김기웅이 자백을 했어요. 저한테 와서는 끝까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어요. 사건 당시 여관에서 가장 먼저 나간 게 김순경이라는 것이 확인됐고, 여러 정황을 볼 때 범인이라고 확신했어요.
제 손으로 진범을 잡고 난 뒤 사표를 제출했죠. 주위에서 「검사도 인간이고, 인간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며 만류해요. 제가 그때까지 「수사 잘한다」, 「치밀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넘쳤어요. 회의가 밀려오더군요. 형사부로 자리를 잠깐 옮겼지만 너무나 힘들었어요. 「자백에만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고 뼈저리게 느꼈어요. 「왜 내가 김기웅의 항변에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수없이 자책했어요』
―그때 마음 수양을 많이 하셨겠군요.
『「수사는 인간을 상대로 한다」, 그걸 그때 알았어요. 그 이후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겠다」, 「사람 냄새가 나는 검사가 되자」고 생각하게 됐죠. 동정과 연민을 가지고 수사를 해야 해요. 피의자들은 누구나 변명을 해요. 검사는 변명이라고 무시하죠. 그 사건을 계기로 피의자들의 이야기에 많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金검사는 자신의 수사 철학을 이렇게 얘기했다.
『자백을 기대하지 말아라. 승복하는 수사를 하자. 철저하고 입체적으로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해 놓으면 설사 부인하더라도 공소유지를 해서 유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다. 취조하면서 절대로 욕하고 반말하지 말아라. 서로 기분만 나쁘다』
―『검사실에 가면 검사는 못 만나고, 검찰 직원이 검사 행세를 한다』고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초임 검사의 경우, 오랜 경험이 있는 검찰 직원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초임 검사에게는 쉬운 사건을 맡겨요. 도로교통법, 음주 측정 거부한 것 몇 쪽짜리 사건들이죠. 검사생활 1년은 지낸 뒤에야 구속할지, 불구속할지 제대로 판단이 섭니다』
쉽게 살려고 하는 순간에 죄를 짓는다
검사 한 사람이 한 달에 처리하는 사건은 371건이다. 평검사 한 명이 하루에 열 두 건의 사건을, 부장검사는 한 달에 1500건의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 金검사가 지휘하는 검사는 모두 11명이다.
―趙武濟(조무제) 대법관께서 한번은 재판정에서 『검사가 「야단쳐야 할 놈」, 「혼내야 할 놈」, 「잡아넣어야 할 놈」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구속기소하고 있다』고 검사를 나무랐다고 하더군요.
『趙판사님은 검사들한테 「구속을 남발한다」고 종종 그러세요. 요즈음은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수사관행이 바뀌고 있어요. 제가 다룬 사건의 10% 정도가 구속 사건이었는데, 요즘은 3% 정도 돼요. 혐의가 상당부분 입증돼도 불구속으로 재판을 해요. 유죄가 인정되면 법정에서 구속하면 되니까…. 피해자가 있는 사건일 경우에 합의가 안 되면 구속해요. 피해자가 있어서 어쩔 수 없죠』
金검사는 한 달에 1500여 건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난다. 그가 범죄를 다루면서 느낀 인간의 본성은 어떤 것일까? 범죄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많은 범죄가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조직폭력은 자본주의의 근간인 공정한 질서를 파괴하는 거죠. 범죄는 순간의 어려움을 손쉽게 모면하려는 행동입니다. 가족의 병원비를 구하려다 안 되니까 회사 돈을 횡령하는 그런 행위죠. 요즈음 카드 사기·횡령사건이 너무 많이 늘었습니다. 그만큼 서민생활에 주름이 깊다는 얘기겠죠』
사람 마음속의 야수와 천사
金검사는 18년 검사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지존파 사건」을 꼽았다. 1993년 4월부터 1994년 9월까지 공범 6명이 부유층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그 가운데 5명을 살인한 사건이다.
『인질로 돈을 벌겠다는 게 지존파 아이들의 생각이었어요. 제가 주임검사를 맡았습니다. 추석 다음날, 그 아이들의 범죄 아지트인 전라남도 영광의 한 주택 지하실에 갔습니다. 시체를 소각해서, 사람 태운 냄새가 그대로 나요. 참,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한 거예요』
―10代에서 20代 초반의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나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야수와 천사가 함께 들어가 있어요. 사람에 대해 속단을 못 하겠더라구요. 한번은 현양이(지존파 범인 중 한 명)가 꼬리곰탕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시켜 줬어요. 먹고 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다」고 해요. 말을 잘 안 하더니, 나중에는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해요. 어린아이 같았어요. 꼬리곰탕 한 그릇, 따뜻한 말 몇 마디에 마음을 연 거예요. 꼭 내 동생 같았어요. 수사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사람은 겪을수록 모르겠어요』
―최근에 영생교 교주 살인사건을 수사하셨죠. 보통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이비 종교에 잘 빠져드는 겁니까.
『洗腦(세뇌)라는 게 별게 아니에요. 똑같은 말을 끊임없이 들으면 생각이 바뀌어요. 「주님(영생교 교주)이 태풍을 막았다」, 「기도를 해서 태풍의 진로를 바꾸었다」 이런 걸 신문에 써서 붙여 놔요.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영생교에 빠졌어요. 머리를 가진 의대생이 그런 터무니 없는 얘기를 어떻게 믿게 됐느냐? 간단해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예요. 100번 들을 때까지 「이 자식 돈 놈 아니야. 어떻게 태풍을 막아」 하다가, 100번을 더 들으면 「주님이 혹시 막으려고 어떤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하게 돼요. 100번을 더 들으면 「틀림없이 막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주는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겠죠.
『물론이죠. 교주는 「이 바보들 그런 얘기를 다 믿냐」며 자신의 사기극을 즐겼어요』
화성 연쇄살인事件 2件 수사
金검사는 자신이 지휘했던 사건 이야기를 들려줬다.
『1995년 대구에서 일어난 상인동 도시가스 사고… 이게 기막힌 사건이에요. 굴착 작업하던 기사가 땅 밑을 뚫는데 뭐가 잘 안 들어가…. 그럼 내려서 뭔지 확인했으면 됐을 텐데, 안 뚫리니까 더 힘줘서 뚫은 것이 가스관이에요. 가스관에서 흘러나온 가스가 약한 지반을 타고 지하철 공사장으로 스며들어 지하철 공사장에서 폭발해 300명 이상 사상했어요』
―도시가스 배관이 그려진 지도가 그때 없었나요.
『규정상 땅 밑을 파려면 누구든지 동사무소에 비치된 지하 배관망 지도를 보고 확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한 거예요』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한 未濟(미제) 사건이죠.
『제가 9차, 10차 살인사건을 지휘했는데 참 어렵더라구요. 좁고 제한된 공간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현장에 증거물이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이건 확 열린 야외에서 그것도 잔디밭에서 살인이 발생하니까, 증거를 찾을 수 없었어요. 「미제사건이다」라고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9차, 10차 살인사건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을 확보해서 DNA 분석을 해놓았어요. 당시 우리는 DNA 분석을 할 능력이 안 돼서 일본 경찰연구소에 의뢰를 했어요. 화성 연쇄살인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DNA 감정을 도입하게 됐습니다. 공소 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DNA의 주인공을 검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검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고소·고발의 남발이다.
고소·고발사건은 2000년 55만4000건이던 것이 2001년에는 57만6034건, 2002년에는 58만5930건, 2003년에는 64만3012건으로 증가했다. 지난 상반기에 접수된 고소·고발사건만 하더라도 33만6400건이다. 검찰이 전체 취급하는 사건에서 고소·고발사건이 30%를 차지한다. 이 중 불기소 처분이 60% 이상이다.
『살다 보면 친구에게 투자하고 돈 꿔 주는 게 人之常情(인지상정) 아닌가요? 돈 꿔 주고 못 받으면 다 「사기」라고 해요. 그러나 사기는 구성요건이 맞아야 돼요. 돈을 빌릴 당시에 변제할 의사가 없었다든지, 능력이 없었다든지…. 조사해 보면 그 뒤에 사정이 바뀌어서 못 갚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도 피해자는 「사기꾼을 왜 구속하지 않느냐」고 펄펄 뛰어요』
초임 검사 때 60회 이상 부검 立會
金검사는 1986년 대구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대구지검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하면서 부검에 60번 이상 들어갔어요. 부검이란 게 의대에서 하는 해부하고는 달라요. 사람 내장을 몇 cm 간격으로 잘라내서 그걸 관찰하는 거라… 참 끔찍한 일이죠.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검사의 임무가 「억울한 죽음이냐, 아니냐」를 가려 줘야 하는 일이니』
우리나라는 시신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서, 가족들이 부검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검사는 「강제 부검」을 실시한다. 사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죄수가 숨이 끊어졌는지 최종 확인을 하는 것도 검사의 몫이다. 공권력의 집행관이 검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형 구형을 몇 번이나 했습니까.
『구형으론 많은데 사형이 확정된 피고인은 열여섯 명입니다』
金검사는 사형 얘기를 하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회방위라는 차원에서 사형을 구형하지만, 가슴이 아프죠. 흉악범들이지만 수사를 하면서 정이 들어요. 사형폐지론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겠지만, 누군가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저는 사형장엔 안 가봤어요. 주로 공판검사들이 사형장에 갑니다. 사형장에 갔다 오면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는대요. 귀신이 따라온다고, 여관에서 자고 들어간다고 해요』
사형장은 수형자들 사이에서 「넥타이 공장」으로 불린다. 絞首刑(교수형)이 집행되기 때문이다. 사형집행관은 사형수의 다리를 포승으로 묶고 흰 천으로 눈을 가린 후 목에 밧줄을 놓는다.
가로 세로 1m 정도의 마룻바닥이 밑으로 쑥 꺼지면 「덜커덩」 소리가 나면서 교수형이 시작된다. 「死相을 검시하고 10분 정도 지나서 검사와 監獄醫가 청진기를 대고 사형수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다」고 行刑法(행형법)에 규정돼 있다.
산더미같이 쌓인 사건 서류, 밤낮없이 계속되는 조폭과의 전쟁, 부검과 사형집행 입회…. 이렇게 험한 일을 하는 검사의 월급은 얼마나 될까?
검사들은 급여수준이 외부에 알려지기를 꺼려한다. 金검사도 마찬가지였다.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초임 검사(3호봉)가 月 평균 310만원, 金검사 같은 18년차는 月 평균 550여만원 상당의 급여를 받게 돼 있다. 수당, 상여금을 합한 금액이다.
金검사는 연봉 6000만원에 한도액 100만원인 법인카드를 갖고 있는 월급쟁이다. 金검사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검사들의 상당수는 自費로 판공비를 쓰고 있다. 포항지청장을 지낸 金佑卿(김우경·49) 변호사는 『큰 사건 하나를 끝내고 나면, 식사대만 600만원이 나온 경우가 있었다』며 『수사하느라 수천만원씩 빚을 져, 이걸 갚느라 허덕이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金洪一 검사는 충남 예산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지금까지 장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金검사는 『가난보다 더한 고통이 부모의 不在였다』며 『거기에 비하면 삼복더위와 엄동설한은 견뎌낼 만했다』고 했다. 金검사는 어머니를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고등학교 2학년 때 여의었다.
흔들리지 않는 소년家長
金검사는 열여덟 살에 집안의 家長(가장)이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 동생들을 제가 맡게 됐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르겠어요. 동지섣달 대밭을 울리며 불어대는 찬바람을 견디면서 살았어요. 주위에 일가분들이 20호 살았는데, 「밥은 먹었나」, 「불은 안 꺼졌나」 하면서 돌봐 주셨어요』
金검사는 『난관에 봉착해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대구 상인동 폭발사고, 서울 마포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대형사건 현장에 그가 파견돼 수사지휘를 맡게 된 건 그의 이런 강점이 검찰 안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검찰청의 鄭東敏(정동민) 검사가 그를 『서두르는 법이 없고, 항상 느긋하게 상황을 장악하는 검사』라고 소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산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3년 동안 농사짓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입학금을 모으느라 1975년에 충남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 유학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병으로 제대한 직후인 1982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아버지가 짓다 만 농사를 짓고 다른 집 농사도 지어 주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3년 동안 돈을 모아 입학금을 마련했어요. 저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는 걸 믿어요. 부모님은 가셨지만 친척들이, 동네 어른들이, 은사님이 저와 형제를 돌봐 주셨습니다. 내가 삶을 지탱하고 견딜 수 있었던 힘이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나면 神父가 되고 싶다
―家長 노릇하느라 많이 힘들었겠어요.
『혼자 주문을 외웠어요. 「조금 늦고, 조금 뒤처지더라도 끝까지 가자. 힘들어도 끝은 있다」 결혼하고 동생들을 다 데리고 살았어요. 이제 막내가 마흔을 넘겼어요. 집사람이 11남매의 막내딸이라 동생들을 흔쾌히 맡아 줬습니다. 고맙죠』
金검사는 「부검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게 뭐가 힘들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월급이 적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 정도면 많죠』라고 대답했다. 소년家長으로 살아온 오랜 세월이 그를 세상사에 담대하도록 만든 모양이다.
―성격이 서글서글하신 것 같아요.
『좋아도 싫어도 슬퍼도 감정을 절약하게 돼요. 감정의 기복이 심하면 안 돼요. 살아 보면 좋을 때보다 안 좋을 때가 많은 거 아니겠어요? 검사생활도 마찬가지예요. 감정이 헤프면 私感(사감)이 들어가는 수사를 하게 돼서 위험해요』
金검사는 대전 판·검사 가톨릭 교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내가 알면 섭섭해할 소린데,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별탈 없이 검사생활을 해온 데는 신앙의 힘이 컸다』고 했다.
―좌우명이 있으세요.
『거창한 건 아니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거예요. 농촌의 삶이란 게 그런 거죠. 게으르면 배 고프고, 좀 일하면 거둘 게 있고…. 부모님에 대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유일하게 물려받은 게 그거예요』
─미안한 질문이지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검사 이전에 자존심 문제 아닐까요.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받아요. 어렵게 살던 때 주위 분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들이 제가 검사가 됐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돈을 받으면, 결국 들통이 나고, 신문에 나고 할 것 아니에요. 나를 도와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부정한 돈을 받을 수 없죠』
─업무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 푸세요. 가족들하고는 떨어져서 사시죠.
『대전에 내려온 지 이제 3개월 됐어요. 서울보다 조용하고 공기가 좋아요. 후배들하고 퇴근해서 삼겹살 집에서 폭탄주 몇 잔 마시면 기분이 쫙 풀려요. 부담도 없고….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 1인당 1만 5000원이면 뒤집어쓰잖아요. 한 달에 술 값, 기름값이 100만원이 좀 넘게 나오데요』
―취미생활은 있나요.
『골프는 가끔 쳐요. 다음주에 은사님 모시고 가려고요. 고등학교 동기들끼리…. 집에서 쭈그리고 있기가 뭐해서 예전에는 테니스를 좀 쳤는데…. 공 오는 방향으로 계속 뛰어가야 하니 격해서 힘들더라고요. 요즘은 등산을 많이 가요』
金검사는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웠다. 미안했는지 그는 이런 변명을 했다.
『갑자기 하던 짓 안 하고, 안 하던 짓 하면 안 돼요. 우리 면역체계가 주인을 알아본대요. 수십 년 해오던 걸 안 하면 인체가 알아요. 저는 담배를 끊으면 면역체계에 이상이 올 것 같아서…. 담배를 줄이면 안 걸리던 감기에 잘 걸리더라고요(웃음)』
金검사는 1982년에 부인 曺光子(조광자·48)씨와 결혼했다. 考試(고시) 준비를 할 무렵, 친구의 소개로 만나 考試에 합격하던 해 결혼했다.
주위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으니, 돈 많은 집안의 딸과 결혼하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부잣집 딸들을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金검사는 『내가 고시 합격한 거 빼고 내세울 것 뭐가 있느냐』며, 사귀고 있던 여인과 결혼했다.
金검사는 요즘의 결혼 세태에 대해 비판적이다.
『열쇠 들고 시집가겠다는 사람이나, 그걸 받아야 결혼하겠다는 사람이나 다 문제 아닌가요. 사람 냄새가 나야지, 결혼이 무슨 장사입니까. 집 한 채 마련하는 데 13년쯤 걸렸어요. 대출 많이 받아서 샀습니다. 이 정도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金검사는 딸만 셋이다.
오후 8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이제 추석이다.
金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추석인데 고향에 내려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인터뷰 때문에 아직 못 내려갔다』고 하자, 金검사는 이렇게 얘기를 했다.
『자식 노릇 하는 게 사람의 기본 아닌가요. 인터뷰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집에 안 내려갔어요. 빨리 내려가세요』 ●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