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고백(5회)-국민그룹 god·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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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을 잘 타는 나는 1979년 12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 났다.태어날 때도 난 뭐가 그리도 쑥스러웠는지 크게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난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였다.누군가 말이라도 걸면 부끄러워 엄마의 치맛자락 뒤에 숨던 그런 아이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LA로 이사했다.지금 기억으로는 2 층집에 수영장이 딸린 근사한 곳이었던 것 같다.유치원시절을 그곳에서 보내 고 일곱살 때 아버지가 한국으로 발령받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옮겨왔다.
한국으로 온 나는 더욱 내성적으로 변했다.당시 한국말을 못했던 나는 초 등학교에 입학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친구들을 사귈 수 없었다.언제나 혼자였다.다행히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말을 익힐 수 있었고 친구들 도 하나둘 늘어났다.성격도 점차 활발해졌다.초등학교 5학년 때는 반 대항 야구경기에 내가 빠지면 안될 정도로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한참 고국생활에 재미를 붙이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초등 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누구보다도 행복했던,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던 우리 가족이었는데….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유하고 단란했던 우리 집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아버지는 어딘가로 떠 나셨고 엄마와 누나,그리고 나는 갈 곳이 없어 외가로 옮겼다.모든 걸 잃었 기에 그때부터 우리에겐 어두운 그늘뿐이었다.큰 충격을 받은 엄마는 쓰러졌 고 사춘기였던 누나는 갑자기 바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정말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정리 정재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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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쓰러진 엄마를 챙기랴, 방황하는 누나를 챙기랴, 공부하랴…. 졸지에 가장이 돼버렸다.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춘기 시절을 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투정 부리고 사춘기에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여 있을 나이에 내 앞에 닥친 일은 너무도 컸다.
그리고 내가 포기한 게 한가지 더 있다.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미술.1주 일에 한두 번은 점심값이 없어 친구들 몰래 굶어야 했기 때문에 화실에 다닌 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 다 해주셨던 엄마 에게는 거짓말을 했다.미술이 싫어졌다고….엄마가 마음 아파할까봐….
고민이 많았다.머리가 터질 만큼 생각도 많았다.하지만 난 그걸 혼자 짊어 져야만 했다.친구들한테 털어놓기도 부끄럽고 그렇다고 힘든 엄마와 누나한 테는 더더욱 표현하지 못했다.그럴 때마다 음악을 들었다.헤드폰을 끼고 아 주 크게….아마 그때부터 음악과 친해진 것 같다.내 고민을 음악에 털어놓았 다.그리고 그게 가장 편했다.
어느날 밤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다가 엄마가 우는 걸 봤다.난 그때 태어 나서 처음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어두운 거실에서 정말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 엄마 뒷모습을 봤다.그런데 다가가 엄마를 달래드릴 수가 없었다.내가 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기 때문에….
그때 난 결심했다.내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기로.내 가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건, 제일 자신 있는 건 음악뿐이었다.그때부터 가 수가 되려고 연습을 시작했다.오디션도 여러 차례 봤지만 실력이 없던 난 계 속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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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시던 난 친구를 통해 (손)호영이를 알게 됐다 .무척 착하고 순수한 외모에 춤도 잘 추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인연이었는지 우리 둘은 마음이 잘 맞았다.연습도 같이 하면서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 다.그렇게 한참 호영이와 오디션을 준비하던 중 미국에 살고 있던 ‘쭌이형 ’(박준형)한테서 연락이 왔다.함께 그룹을 하자고.
그리고 호영이와 셋이서 열심히 준비했다.마침내 오디션에서 합격통보를 받았다.정말 이 세상을 온통 다 가진 기분이었다.엄마를 편하게 해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리고 (윤)계상이,(김)태우가 들어와 god가 탄생했다.정말 우린 배고픔과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멤버 각자 꿈 과 목표가 있었기에 그런 고생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었다.
얼마 뒤 (박)진영이형을 만났고,99년 1월 13일 KMTV ‘쇼 뮤직탱크’에서 ‘어머님께’란 곡으로 god의 첫발을 내디뎠다.그 때 내 나이 스물한살.god 의 일원으로 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함께 땀 흘리고,함께 자고,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고….데뷔를 준비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6개월 동안의 1집 활동을 마치고 난 얼마되진 않지만 내가 번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엄마에게 드렸다.엄마와 난 통장을 움켜쥔 채 몇시간 동안 울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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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의 성공적인 데뷔 덕분에 몇년전 스스로 다짐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서 난 정말이지 하늘을 날 듯 기뻤다.‘행복 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잠깐 동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2집이 나오기 전 또 한번의 좌절이 내게 찾아왔다.10년 동안 너무 나도 늙어버린 엄마가 이제 편안해질 수 있는 시기에 덜컥 암에 걸린 것이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차라리 엄마 몸 속 한편에 도사리고 있는 암을 내가 가져오고 싶은 심정이었다.하늘이 원망스러웠고 건강한 내 자신이 싫어 졌다.지금 3집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엄마는 아직도 치료를 받고 계신다.다행 히 엄마의 몸 상태가 계속 좋아지고 있다.그리고 정말로 많은 사람이 god의 3집을 사랑해줘 행복하다.
얼마 전에는 어릴 적 꿈인 미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단국 대 분당캠퍼스 산업디자인학과에 합격했다.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공부를 다 시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god 덕분이다.또 god를 사랑해준 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지만 이제 나 자신만큼 음악을 사랑 하게 된 나를 위해,나에게 언제나 힘을 주는 하늘색 친구들과 모든 팬을 위 해,내 형제 god를 위해,우리 가족을 위해,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사 람을 위해 난 계속 달릴 것이다.그것이 이제 나의 행복이니까.
정리 정재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