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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찬가
조지 오웰 지음 | 김옥수 옮김
비꽃
2017년 03월 15일 출간
카탈루냐 찬가 작품해설
세계 3대 르포문학
혁명에서 드러나는 이전투구와 내분까지 그려낸, 가장 인간적인 작품
『1984』가 ‘디스토피아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라면, 『카탈루냐 찬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중국의 붉은 별』과 더불어 ‘르포문학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중국의 붉은 별』이 혁명가를 열광적으로 찬양한다면, 『카탈루냐 찬가』는 그 이면에서 벌어진 이전투구와 내분까지 그려낸,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비판적이며 현실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조지 오웰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억압당하는 인간과 자유 같은 주제에 집착하던 그는 1936년에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뛰어드는 순간, ‘노동자 도시’라는 새로운 희망을 목격하고 감동한 나머지, 스페인 현지에서 ‘파시즘과 싸우고 파시스트를 한 명이라도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내전에 참여한다. 『카탈루냐 찬가』라는 걸작이 탄생한 배경이다.
스페인은 왕당파와 공화파가 끊임없이 갈등하는 가운데, 1874년 군부 쿠데타를 통한 왕정복고 이후 스페인 내전까지 60년에 걸쳐서 군부 독재와 왕정과 민주정부를 거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등, 계급 갈등과 지역 갈등이 첨예했다. 노동자 농민은 교회를 불태우고, 교회는 경찰을 통해 수백 명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1929년에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리베라 군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왕당파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에 밀려서 1931년 4월 12일 총선을 치르고, 공화파가 완벽하게 승리하면서 국왕은 망명한다. 온건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한다. 하지만 극좌와 극우가 공존하면서 사회는 극도로 흔들리고, 다시 치른 1933년 총선에 우파가 승리하면서 군대를 동원한 노동운동 탄압으로 지지율이 떨어진다. 1936년 2월에 다시 치른 총선에선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한 인민전선이 승리해서 의회를 장악한다.
인민전선 정부는 오랜 염원이던 토지개혁을 전면적으로 단행하고 지주, 자본가, 가톨릭 교회 등 왕당파는 불만이 고조되니,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 사령관 프랑코를 중심으로 군부, 가톨릭 교회, 왕당파, 지주, 자본가 등은 마침내 1936년 7월에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 전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도시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시민이 봉기해서 프랑코 세력을 몰아내고 동시에 혁명을 추진하니,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등 세계적 지성과 문호들은 스페인 전선으로 당장 달려가서 총을 들고 파시즘과 싸운다.
한국 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세계적 모순과 계급 갈등이 한반도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면, 스페인 내전은 유럽의 모순과 계급 갈등이 스페인이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에 울린 첫 포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이었다. 내전이라고 해도 독일, 이탈리아, 소련 등이 개입하고 전 세계에서 민병대가 자발적으로 참전해 공화주의를 지키려고 파시즘과 싸웠다는 점에서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그러나 공화파 내부에서 ‘내전이 먼저냐 혁명이 먼저냐’란 논쟁이 벌어져서 스페인 내전 내내 끊임없는 갈등으로 자리한다.
조지 오웰은 노동자 민병대에서 이상 사회를 체험한다. 지휘관과 사병은 모든 점에서 평등했다. 사병이 사단장에게 “담배 한 대 달라”고 할 정도였다. 월급이나 대우는 차이가 없고 체벌도 없었다. 상명하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규율을 정하며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세상을 체험한 오웰은 전선에서 온갖 위험을 자청하며 프랑코 파시스트와 싸운다. 문제는 공화파 내부 분열이었다.
사회주의 혁명과 반파시즘 전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법에 대해 정파별로 이견이 갈리고, 전쟁과 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자는 정파와 전쟁에서 이길 때까지 혁명을 미루자는 정파, 전쟁이야 어찌 되건 혁명 자체를 억누르려고 애쓰는 정파가 공화파 내부에서 본색을 드러내며 반파시즘 전선은 흔들리고, 공화국 정부를 장악한 공산당이 혁명을 막는다는 사실에 오웰은 충격받는다. 공산당은 혁명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억압했다. 노동자 부대가 두려운 나머지 무기조차 공급을 않는 건 물론, 전쟁 승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부르주아식 인민군을 창설해서 노동자 부대를 여기에 편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현대식 무기와 장비는 전선을 지키는 노동자 민병대가 아니라 후방에 있는 경찰과 인민군에게 공급해서 혁명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전선에서 115일을 싸우다가 휴가를 받고 돌아온 오웰은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으로 변한 사실에, “예전에는 바르셀로나 전역에 거지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지금은 거지가 사방에 넘쳐난다는 사실에” 놀란다. 노동자 도시가 부르주아 도시로 돌아오면서 빈부 격차 역시 극심하게 벌어진 거다.
공화파 내부에서 혁명을 갈망하는 세력과 혁명을 억압하고 부르주아 사회로 돌아가려는 세력이 마침내 ‘바르셀로나 시가전’으로 충돌하면서 국면은 새롭게 변한다. 공산당에게 사주받은 경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세력은 일주일에 걸친 시가전을 통해 우세를 점한다. 하지만 반파시즘 전선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혁명세력이 양보하니, 공산당은 경찰력을 증강하고 언론을 통해 혁명세력을 [파시스트]로 조작하면서 본격적인 검거 작전에 들어간다. 휴가 중에 시가전에 참여해서 공화파 내부 갈등을 몸으로 체험한 오웰은 시가전 이후에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공산당의 반 혁명성과 사실 왜곡 및 조작 그리고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싸우던 사람들을 검거하고 구속하고 처형하는 작태에 분노한다.
순수한 이상주의자 조지 오웰은 현실정치와 국제 정세에 눈을 뜬다. 스페인 공산당이 반혁명으로 돌아선 원인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 코민테른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스탈린 파시즘을 이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거다.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 건설’을 목표로 러시아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레닌이 혁명 방법론을 제시했다면, 트로츠키는 탁월한 글과 언변으로 대중을 끌어모으고, 스탈린은 조직을 관리했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노동자가 생산한 건 노동자가 모두 가진다”는 대명제에 따라 노동 계급이 노동에 전념하면서 생산성은 급증하나, 자본주의 열강이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이런 와중에 레닌이 1924년에 사망하니, 스탈린은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보호하라”는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고, 트로츠키는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서 혁명을 일으키라”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후계자 싸움을 벌인다. 결국, 트로츠키는 조직을 장악한 스탈린에게 밀려서 1927년에 출당당하고 1929년에 터키로 추방된다. 이후 프랑스, 노르웨이 등지를 전전하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코민테른은 계급 협조주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제4 인터내셔널’을 창건한다. 하지만 그 세력은 미미하니, 1940년 8월 마지막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조직한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을 통해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혁명 기운을 억누르고, 그 대가로 그 나라 자본주의 정부가 소비에트 공화국에 협조하도록 압박한다. 결국, 각국 공산당은 혁명성을 잃으면서 관료주의 압력조직으로 변신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을 막아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애국주의를 강조하며 항시 전시체제를 구축해,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며 철두철미한 파시즘으로 나아간다.
오웰 역시 언제 잡혀서 구속당할지 몰라, 밤에는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아침마다 목욕하고 이발하고 면도해서 부르주아 관광객처럼 꾸미는 식으로 생활하며 스페인 탈출을 모색한다. 식민지 생활에서 제국주의 병폐와 비인간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스페인 내전에서 겉으로 드러난 ‘파시즘’은 물론, 뒤에 숨어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파시즘’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 파시즘과 싸우다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파시스트]로 몰려서 죽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진실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건 괜찮으나, 왜곡된 죽음까지 받아들일 순 없었다. 진실을 기록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왜곡에 대한 분노, 진실에 대한 열정으로 『카탈루냐 찬가』를 세상에 내놓았다.
한 지식인이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치며 처절하게 추구한 반파시즘 투쟁, 온몸으로 깨달은 진실, 그게 1938년 『카탈루냐 찬가』라는 탁월한 르포문학으로 나타나, 노동자는 목숨을 걸고 혁명 투쟁에 나서나 공산당이 그걸 억누르며 혁명성을 잃는 과정을 고발한다면, 1944년에 발표한 『동물농장』에서는 혁명이 변질하는 과정과 결과를 우화로 묘사한다. 그리고 1948년에 발표한 『1984』에서는 파시즘의 다양한 유형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하는지, 그 구성원은 파시즘에 어떻게 적응하며 파멸하는지 고발한다. 세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동구 공산권 국가 일반이, 아니, 파시즘 전체가 결국엔 자멸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3월 28일 프랑코 군이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면서 파시스트 승리로 끝났다. 60만 명이 죽고 50만 명이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세계 양심의 시험대’라고 불린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사회는 일그러진 양심을 드러내고, 프랑코 정권은 무수히 많은 공화파를 처형하며 1975년까지 장기 독재를 이어나간다.
미국은 트럼프 당선과 취임 이후에 『1984』가 ‘아마존’ 1위에 오르는 등, 조지 오웰 작품에 새로운 관심을 보인다. 파시즘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한 거다. 우리나라는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과 이명박과 박근혜를 통해 민간독재와 군부 독재를 다양하게 겪었다. 유신체제라는 파시즘은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박근혜까지 이어지며 우리 정신을 갉아먹었다. 해방되고 72년이 지나도록 일제 식민지 잔재조차 청산을 못 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을 우리는 파시즘을 몰아내고 건강한 사회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민주사회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회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공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판하는 조지 오웰 삼부작 『1984』, 『동물농장』, 『카탈루냐 찬가』가 여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의 말
번역은 원문에 담긴 내용과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글로 옮기는 과정이어야 한다. 찰스 디킨스 작품은 다양한 인물을 풍자와 유머와 화려한 문장으로 재미있게 묘사하는 특징이 탁월하다. 따라서 문장은 어렵고 복잡한데, 지금까지 번역한 작품은 한글 어법을 무시한 영어 사대주의에다 오역까지 넘쳐서 극히 어렵고 난해했다.
고전문학은 다양한 경쟁과 도전 속에서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감동을 주며 백 년 이상 살아남은 작품이니, ‘재미와 감동’은 물론 ‘술술 읽히는 느낌’ 역시 어느 작품보다 탁월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기능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엉터리로 번역해서 독자를 괴롭히며 쫓아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문학은 독서가 시작이다. 고전문학을 제대로 해석해서 한글 어법에 정확히 담아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가꿀 원형을 제시해야 한다. 광복 35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일본어 중역 몰아내기 운동’을 했다. 35년이 또 지났다. 이제는 ‘우리말 살리는 번역운동’을 할 때가 왔다.
‘도서출판 비꽃’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어 어법에 합당한 번역을 추구하며, ‘찰스 디킨스 선집’을 필두로 고전문학을 새롭게 담아내,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면서 공동체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 책속으로 추가
부대가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하사로 ? ‘카보’로 ? 승진해, 보초 열두 명을 지휘했다. 쉬운 업무가 아닌데, 처음에는 특히 심했다. [센투리아]는 훈련을 조금도 못 받은 오합지졸로 대부분 십 대 청소년이었다. 민병대 여기저기에서 열한 살이나 열두 살짜리 어린애도 툭하면 마주치는데, 파시스트 지역에서 피신해 가장 손쉽게 먹고사는 방법으로 민병대에 입대한 아이들이다. 후방에서 쉬운 일을 맡는 게 보통이지만 교묘하게 빌붙어서 전선까지 오는 사례도 가끔 있으니, 이들은 전선에서 정말 커다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조그만 녀석이 “장난삼아서” 참호 모닥불에 수류탄을 던진 기억도 난다.
포세로 산에는 열다섯 살 이하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평균 연령은 스무 살을 한참 밑도는 게 분명하다. 이런 어린애는 전선에 보내면 절대 안 된다. 참호전에서는 잠이 항상 모자랄 수밖에 없는데, 어린애는 그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밤에 진지에서 보초를 제대로 세울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분대에 속한 아이들은 가련하게도 발을 잡고 참호 밖으로 질질 끌어내야 잠에서 겨우 깨어나다, 지휘관이 등을 돌리는 순간에 위치에서 벗어나 잠잘 곳으로 찾아들거나, 끔찍하게 추운 날씨에도 참호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잠들기 일쑤였다. 적군에게 모험심이 많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이스카우트 스무 명이 공기총으로 무장하고 달려들어도, 아니, 걸스카우트 스무 명이 빨랫방망이만 들고 달려들어도 우리 진지를 단숨에 휩쓸어버릴 거란 생각이 밤마다 떠올랐다.
우리가 보유한 낡디낡은 소총은 그 자체로 위험했다. 개중에는 개머리판으로 땅을 툭 치기만 해도 총알이 나갈 정도로 어설펐다. 그래서 손바닥을 관통당한 병사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사방이 어두울 때는 신병이 자기편에게 총을 쏘아대기 일쑤였다. 한번은 어스름 녘에 보초 하나가 20m 거리에서 나에게 총을 쏘아, 총알이 1m 차이로 빗나갔다. 스페인 사람들 사격 실력이 떨어진 덕분에 내가 목숨을 구한 게 몇 번인지 모른다. 한번은 안개가 자욱한 상태에서 정찰을 나가느라, 보초 지휘관에게 미리 세심하게 주의 준 적이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덤불을 밟는 순간, 놀란 보초는 파시스트가 쳐들어온다며 소리치고, 덕분에 나는 보초 지휘관이 내 쪽을 향해 발포하라고 모두에게 명령하는 소리를 듣는 기쁨을 누렸다. 당연히 나는 바닥에 바싹 엎드리고 총알은 공중을 스치며 날아갔다. 총기는 위험하니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스페인 사람은, 최소한 스페인 젊은이는 알아듣질 않았다. 한번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건이 있고 얼마 뒤에, 내가 기관총 사수를 사진에 담는데, 기관총이 나를 향했다. 그래서 나는 카메라 초점을 맞추며 농담으로 말했다.
“쏘지 말게.”
“맙소사, 당연히 안 쏘지.”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총성과 함께 총알이 얼굴을 스치며 연속으로 날아가는데, 얼마나 가까운지 코르다이트 폭약 알갱이에 뺨이 따끔할 정도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기관총 사수들은 그 일을 무척 재미있게 여겼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에 노새를 몰던 사람이 총에 맞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정치위원이 자동권총을 가지고 바보처럼 장난치다가 그 허파에 총알 다섯 발을 처박은 것이다.
당시에 군대에서 사용하던 복잡한 암호 역시 색다른 위험 요소였다. 한쪽이 한마디 하면 상대는 다른 말로 대꾸하는 이중 암호라서 짜증이 저절로 치밀었다. 암호는 혁명적인 내용으로 사기를 북돋는 단어가 일반이었다. 예를 들어, ‘쿨투라(문화)’라고 하면 ‘프로그레소(진보)’라고 대답하고, ‘세레모스(될지어다)’라고 하면 ‘인벤시블레스(무적)’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글자를 모르는 보초는 거창한 단어를 암기하는 자체가 불가능할 때가 많았다. 하루는 밤에 암호가 ‘카탈루냐’라고 물으면 ‘에로이카(영웅)’라고 대답하는 건데, 자이메 도메네시라는 농촌 총각이 둥그런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에로이카…… 에로이카가 무슨 뜻인가요?”
나는 ‘발리엔테(용기)’와 같은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잠시 후에 농촌 총각이 어두운 곳에서 참호로 다가가자, 보초가 소리쳤다.
“알토(정지)! 카탈루냐!”
“발리엔테!”
농촌 총각이 소리쳤다.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탕!
하지만 보초는 농촌 총각을 못 맞췄다. 이 전쟁에서는 누구든 상대를 제대로 맞추는 경우가 없었다, 의지 하나로는.
전선을 벗어나고 8~9일 만에 나는 상처 부위를 마침내 진찰받았다. 늑골이나 빗장뼈 등이 부서진 병사는 전선 후방 야전 병원에서 다친 부위에 석고로 가슴받이를 만들어 씌웠으니, 새로 도착한 환자는 진료소에서 커다랗고 지저분한 가슴받이 구멍 사이로 일주일이나 못 깎아서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더러운 얼굴로 불안하게 쳐다보고, 의사는 커다란 가위를 들고서 석고를 잘라내기 일쑤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잘생긴 얼굴은 서른 살가량으로 보이는 의사가 나를 의자에 앉혀, 거친 가제 조각으로 내 혀를 잡아서 최대한 기다랗게 당기더니, 치과용 거울을 목구멍으로 들이밀고 나에게 “아!” 하는 소리를 내라고 말했다. 의사는 혀에서 피가 나고 눈에서 눈물이 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살피더니, 성대 하나가 마비되었다고 통보했다.
“그럼 목소리는 언제 돌아오나요?”
내가 묻자, 의사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요? 아, 목소리는 절대로 안 돌아옵니다.”
그런데 의사 판단이 틀렸다. 속삭이는 이상으로 한동안 말할 수 없었으나, 한두 달이 지나면서 목소리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온 거다. 다른 성대가 “보정”하는 식으로 말이다. 팔에서 일어나는 통증은 총알이 목 뒷덜미 신경 가닥을 끊어서 생긴 거였다. 신경통처럼 쿡쿡 쑤셔서 한 달가량 아팠다. 밤이면 통증이 특히 심해서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오른손 손가락도 절반은 마비되었다. 다섯 달이나 지난 지금도 검지는 여전히 감각이 없다. 목을 다친 결과가 참 신기하다.
늘 바뀌는 소문에 불안감은 묘하게 치솟고, 신문은 검열당하고, 무장 병력은 거리를 꾸준히 감시하는 악몽 같은 분위기를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전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 비유할만한 상황이 당장은 영국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정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소하게 박해하는 형태는 존재해, 광부가 사장에게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는 걸 걱정할 순 있으나, 스페인 정치에 폭력적으로 등장하는 “훌륭한 정당인” 같은 하수인은 여전히 드물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제거”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서는 그런 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스탈린주의자”가 권좌에 오르니, [트로츠키주의자] 모두가 위험에 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엔 안 일어났지만, 사람마다 시가전이 다시 일어나서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다. 어디에선가 시가전을 알리는 총성이 두 귀에 들리는 것 같을 때도 종종 있었다. 거대한 생명체가 도시 전체를 사악하게 내리누르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느낌으로 한마디씩 뱉어냈다. 모두가 하나같이 “이곳 분위기는 정말 끔찍해. 정신병원에 들어온 것 같아”라면서 비슷한 느낌을 드러내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모두”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스페인을 스치듯 지나간 영국인 다수는, 호텔에서 호텔만 옮겨 다닌 방문객 다수는 일반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못 느낀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