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들었나?
1940년 미국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1939년 2월의 갤럽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당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3선에 찬성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성은 31%에 지나지 않았다(반대 69%).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후 여론은 급속히 변하기 시작한다. 1940년 3월의 조사에선 “루스벨트가 출마한다면 그에게 투표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47%가 찬성했다(반대 53%).
처칠의 ‘믿는 구석’은 미국이었나
유럽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새로운 영국 수상이 된 1940년 5월 10일 새벽,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서유럽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3일만에 독일군이 프랑스의 세당(Sedan) 전선을 돌파하자 네덜란드는 항복하고, 벨기에는 포기 상태에 들어갔다가 5월 27일 항복했다. 프랑스 북부의 됭케르크(Dunkerque)에 포위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50만 명을 안전하게 영국으로 철수시킬 가능성도 희박했다.
영국에선 독일과의 화평 교섭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칠은 독일과 화평 교섭을 벌여야 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노골적인 히틀러 숭배자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를 자신의 내각에 입각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외무장관 헬리팍스(E. F. L. Wood, 1st Earl of Halifax, 1881~1959)는 무솔리니의 중재를 통해 히틀러와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 교섭을 벌이자며, 구체적인 안을 내놓았다.
5일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결단의 시간이 임박했다. 5월 28일 오후 5시, 처칠이 결단을 내렸다. 화평 교섭을 물리치고 끝까지 싸우기로 한 것이다. 6월 19일 프랑스마저 항복함으로써 처칠의 결단은 어리석은 듯 보였지만, 역사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역사가 존 루카치(John Lukacs)는 [세계의 운명을 바꾼 1940년 5월 런던의 5일(Five Days in London, May 1940)](1999)에서, 만약 그때 영국이 독일과 화평 교섭을 갖기로 했다면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0년 11월 14일 밤에 독일 공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된 코벤트리 대성당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1940년 5월 히틀러는 서유럽 침공을 개시했고, 파죽지세로 서유럽을 집어삼켰다. 이에 맞서 영국을 이끈 처칠은 5일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교섭이 아닌, 끝까지 싸우기로 결단을 내렸다.
처칠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미국이었다. 1940년 6월 처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가 패한다면 대통령께서는 나치의 지배하에 통일된 유럽과 맞서야 합니다. 그 유럽은 신세계보다 훨씬 인구가 많고 훨씬 강력하며 군비를 훨씬 더 잘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미국의 유권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남북전쟁 중에 치러진 대선에서 시종일관 “강을 건너는 중에는 말을 갈아탈 수 없다(It is best not to swap horses while crossing the river)”고 주장한 걸 상기했던 것일까? 1940년 8월 파리가 히틀러 군대에 함락되자, 여론은 더욱 루스벨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에 루스벨트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유권자가 51%로, 최초로 과반수에 이르렀다.
3선에 성공한 루스벨트, 무기대여법 카드를 꺼내들다
루스벨트가 3선 도전에 나선 1940년의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는 인디애나 주 출신으로 과거 민주당원이었던 웬델 윌키(Wendell Wilkie, 1892~1944)였다. 윌키는 미국의 참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이때까지는 루스벨트 역시 중립론을 역설했다. 루스벨트는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10월 30일 보스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공약했다.
“이 나라의 어머님과 아버님, 여러분의 자제는 외국의 전쟁에 파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몇 번이든지 거듭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제들은 오직 막강한 군대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을 것이고, 막강한 군대가 존재한다면 전쟁의 위협은 이 나라의 해안에서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가 군비를 준비하는 목적은 오로지 방어에만 그칠 것입니다.”
루스벨트도 반전(反戰) 무드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립주의는 미국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강한 반전 무드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강한 환멸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관련, 역사가 칼 베커(Carl Becker, 1873~1945)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해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의 안전과 번영을 수호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독재자에게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 경제적으로는 악성 부채로 고통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1940년의 대선에서 맞붙은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왼쪽)과 공화당의 웬델 윌키(오른쪽). 미국의 오랜 전통인 고립주의 원칙에 따라 두 후보 모두 미국의 참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루스벨트는 1940년 11월 5일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웬델 윌키를 ‘27 대 22’의 비율로 꺾고, 세 번째로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다. 민주당도 하원에서 267 대 162, 상원에서 66 대 28로 압승을 거두었다. 루스벨트가 대선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그때,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더 이상은 현금으로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무기와 탄약 부족을 또 한번 호소했다.
선거 결과에 고무된 루스벨트는 점점 자신의 공약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1940년 12월 17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처칠의 호소에 부응하는, 이른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의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곳이면 어느 나라든 원조할 수 있으며, 탱크, 전투기, 전함을 대여해주고 전쟁이 끝나면 현금이 아닌 현물로 돌려받자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무기를 살 돈이 없는 영국에 무기를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령, 이웃집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웃집 주인이 우리집 정원의 호스를 가져가 자기 집 수도에 연결하여 불을 끌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도와줄 수도 있겠지요. 자, 이제 나는 어떻게 할까요? 나는 이렇게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봐요, 15달러 주고 산 호스요. 쓰려거든 15달러 내고 가져가시오.’ 그 상황에 거래가 될 말입니까? 나는 15달러 필요 없어요. 불을 끄고 호스를 돌려주기만 하면 그만이요.”
이에 대해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루스벨트의 명석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에게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위험한 것도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같은 소박한 비유를 들어 미국이 10여년 동안이나 회피해온 현실에 한발 가까이 다가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웃집은 불만 붙은 게 아니라 전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어 12월 29일 루스벨트는 ‘노변 담화(Fireside Chats)’라는 이름이 붙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1940년 말 징집령을 발동할 수 있는 군사력 증강 법안에 이어, 1941년 1월 6일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 네 가지 자유를 역설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꼭 방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국가들에게 무기를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무기대여법의 통과와 ‘미국의 세기’의 시작
1941년 무기대여법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무기를 살 돈이 없는 영국에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이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결 시까지 무기 대여 비용에 50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게 된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멍석을 깐 다음, 1941년 1월 하순 무기대여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법안은 3월 8일 상원에선 60 대 31, 3월 11일 하원에선 317 대 71로 가결되었다. 이 법안에 반대한 로버트 태프트(Robert A. Taft, 1889~1953) 상원의원은 무기 대여를 ‘정원의 호스’가 아닌 ‘씹고 나면 버려야 하는 껌’에 비유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이 법안을 ‘독재자 법(Dictator Bill)’이라고 비난했으며, 일부 여성들은 백악관 앞에서 무기대여법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의회의 첫 승인은 70억 달러였지만,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미국은 무기 대여 비용에 50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게 된다.
무기 대여 법안의 의회 통과엔 고립주의 비판 캠페인을 벌인 미국 언론계의 거물 헨리 루스(Henry R. Luce, 1898~1967)의 역할이 컸다. 그는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라는 표제가 붙은 그 유명한 <라이프(Life)>지 1941년 2월 17일자 사설을 통해 미국이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결과를 결정하고 연합국의 승리 이후 세계를 자유와 질서로 선도할 의무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미국을 “인류의 재능 있는 공복(公僕), 선한 사마리아의 사람,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실현의 원동력”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의 세기가 오고 있다”고 단언했다. <라이프>지에 5,000통의 독자 편지가 답지할 정도로 이 글은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스는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내고, 나중엔 자신의 논설과 다른 사람들의 논평들을 모아 같은 제목의 책까지 내면서 ‘미국의 세기’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따지고보면 이런 예언의 원조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인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1722~1803)다. 그는 이미 1775년 “풍요로움으로 인해 미국은 강력한 제국이 될 것이다”고 했다. 그 풍요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적으로는 방대한 국토 사이즈였다. 무작정 넓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당장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좋은 수준의 국토 크기로만 따진다면, 미국은 세계 최고였다.
20세기 동안 프랑스 인구는 52%, 독일은 46%, 영국은 42%가 증가한 반면, 미국의 인구는 270%나 증가한다. 이는 국토 사이즈의 축복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국토 면적의 방대함은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 출신의 어느 지도 제작자는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 거리 감각에 변화가 생겼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 도착한 유럽인은 처음에는 관점뿐만 아니라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제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스케일을 넓히게 된다. 이전에는 300킬로미터 거리가 상당히 멀게 느껴졌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처럼 여겨졌다. 미국의 공기를 마시자마자 이전에 있던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규모로 틀을 세우고 설계를 시작하게 된다.”
사이즈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긍심은 전 분야로 퍼져나간다. 인구도 많지만, 전 세계와 비교할 때엔 ‘비교적 작은 인구 사이즈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정치인 체스터 바울스(Chester B. Bowles, 1901~1986)는 “우리 미국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7%에 지나지 않지만”이라고 전제한 뒤, 1940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각 분야에서 누리는 사이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과시했다.
“우리는 세계 자동차와 트럭의 70%, 세계 전화의 50%, 세계 라디오의 45%, 세계 철도의 35%를 갖고 있으며, 세계 석유의 59%, 세계 비단의 56%, 세계 커피의 53%, 세계 고무의 50%, 세계 설탕의 25%를 소비하고 있다.”
‘미국의 세기’는 새로울 것은 없는 말이었다. 이미 1899년 바티칸 교황이 ‘미국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한 이래로 그간 수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의 세기’를 역설해왔다. 물론 비판적인 어조로 말이다. 즉, ‘미국의 세기’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관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루스의 ‘미국의 세기’론은 미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강한 언론 권력자가 정색을 하고 긍정적 어조로 ‘미국의 세기가 도래한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미국의 세기’는 20세기에서 멈추었나
지를 통해 ‘미국의 세기가 오고 있다’고 단언했으며, 이후로도 ‘미국의 세기’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data-src="http://ncc.phinf.naver.net/20140912_28/1410487556139uvOYH_JPEG/Clare_Boothe_Luce_and_Henry_Luce_NYWTS.jpg"> 아내와 함께한 헨리 루스. 미국 언론계의 거물인 그는 1941년 <라이프>지를 통해 ‘미국의 세기가 오고 있다’고 단언했으며, 이후로도 ‘미국의 세기’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미국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에게 값싼 무기를 공짜로 줄 수 있는 미국의 풍요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이야말로 ‘미국의 세기’를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일까?
루스는 이미 미국이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미국의 전쟁 목표를 미국의 이상인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구현한 개방된 자본주의 세계 시장경제를 창출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비전을 전파하고자 했다. 저널리스트 퀸시 하우(Quincy Howe, 1900~1977)는 “루스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전 인류, 그리고 도덕 법칙의 이해관계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대담함(또는 뻔뻔함)을 보였다고 논평했다. 훗날 피터 J. 테일러(Peter J. Taylor)는 “50여년 전 발표된 루스의 이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미국에게 나머지 세계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 그의 엄청난 확신에 놀라게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확신은 전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국수주의적 허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루스의 말은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읽고 나서 그의 헤게모니 개념을 세계 무대에 투영하려 한 것처럼 보이는 말이었다. 즉각적인 승전보다 훨씬 더 큰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 글은 루스의 헤게모니적 기질을 잘 드러낸 글이었다. 그람시의 말을 빌리자면, 이 글의 등장은 미국의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확립하려는 국제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헤게모니(hegemony)’란 이탈리아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가 “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제기한 개념이다. 헤게모니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지배계급이 국가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인 방향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강압보다는 문화적 수단을 통해 사회적·문화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루스는 ‘미국의 세기’는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소프트 파워’에 의해 지속되리라는 걸 예고한 셈이다.
훗날의 역사는 루스의 예언이 적어도 반은 옳았음을 입증한다. 미국이 “인류의 재능있는 공복, 선한 사마리아의 사람,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실현의 원동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이 모든 걸 지배하는 ‘미국의 세기’가 도래한 것은 분명했다. 다른 건 제쳐 놓더라도 1940년대 전반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생산량을 합한 것보다 많았으니, 이 어찌 ‘미국의 세기’가 아니랴.
무기대여법에 의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155mm 곡사포(왼쪽)와 화약 등의 각종 군수물자들(오른쪽). 미국은 유럽에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이상인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구현함과 동시에 전 세계에 지적ㆍ도덕적 지도력을 확립하면서 확실한 ‘미국의 세기’를 구축했다.
1940년대 후반에 가면 ‘미국의 세기’라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진다. 예컨대, 미국은 1946년 연간 350만대의 자동차를 팔아치우고, 1949년 최초로 500만대를 넘어서는 자동차 생산량을 기록한다. 이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감히 미국의 이런 풍요에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게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과는 확연히 다른 미국식 제도의 성공에 힘입은 게 아니었던가. 이와 관련, 에밀리 로젠버그(Emily S. Ros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의 팽창은 군대의 무력과 정부의 주도에 의하지 않고, 민간 산업의 조직, 전문가의 재능, 박애주의자들의 선의를 발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이상에 대한 루스의 비전 제시는 1893년 컬럼비아 박람회의 그것들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루스를 비롯한 여타의 합리주의자들은 19세기 자유주의와 미국의 특수한 사명이라는 독단적 신화에 빠져, 세계의 여러 국가에 대해 오도되고 왜곡된 강요를 함으로써 나타나게 된 문제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그런 문제점들은 불가피하다고 보면서 ‘소프트 파워’로 그걸 상쇄하거나 누그러뜨리려는 생각을 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미국의 세기’라는 구호 자체가 그런 ‘소프트 파워’의 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무기대여법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의 세기’라는 표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상시적으로 인용되면서 덕분에 루스의 명성까지 불멸의 왕관을 쓰게 된다. 그게 부러웠던 건지는 몰라도 훗날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은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미국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미국화된 세기’의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속가능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