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나 무
지구상에는 수백 종의 수목들이 자라고 있지만 저마다의 생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습지에서도 삶을 버티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사막 같은 건조지에서도 목마르게 사는 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추위에 떨면서 견디는 나무도 있다. 밝게만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들 마냥 전나무가 그렇다.
전나무의 모습은 짜증스럽지가 않다. 언제 보아도 늠름하고 넉넉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어 있는 우람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안아 보고 싶어진다. 의젓한 청년의 딱 바라진 가슴이기라도 한 듯 미덥게만 느껴진다. 밋밋하고도 흠집 없이 곧게 자란 아름드리 나무를 대하게 되면, 부잣집 대문 안을 들여다보는 마음처럼 흐뭇하기만 하다. 아래로 처지는 듯 하면서도 사방을 균형 있게 죽죽 뻗어나간 가지는 은근히 마음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심산 구곡으로 청아하니 자란 푸르름을 자랑이라도 하듯 조용히 서 있는 나무. 수많은 세월을 안고 묵묵히 아름 벌도록 연륜을 늘여 온 나무 앞에 서면 헤프게 살아온 지난날의 시간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선조들은 우람한 나무를 대하면 신성시하여 신으로 모셔 왔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나무를 베어다 돈으로 만드는 생각 뿐 이다. 그러나 훗날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할까.
전나무 숲은 걸으면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의 인생을 떠올릴 테고 젊은이들은 연인과 함께 사랑의 언약을 하고 싶겠지. 어린이들은 전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할거야.
식물학자는 나무의 생활사를 추정하고 싶어질 테고, 임업인은 수형목(秀型木)으로 지정하여 종자를 받아다 파종을 하고 싶겠지. 화가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길게고 건축가는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거야.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웅장하게 자란 전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가 질려 갔다.
골고다의 언덕에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그때 만들어진 십자가의 널판은 전나무이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후 교회의 내부에 십자가를 전나무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지방에서는 크리스마스때는 전나무에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정성스럽게 길러놓은 육, 칠년생의 귀엽게 자란 전나무들을 화분에 담아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든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채 죽어 가는 전나무를 대하게 되면 너무도 안타깝다.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여 오면서 모든 일을 쉽게 생각하기도 하고 매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전나무만은 그렇게 물들지 않는다.
구중심산에서 청청하니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과거시험을 준비를 하며 때를 기다리는 대쪽같은 선비같기만 하다.
언제인가 독일에서 있었던 이야기라 한다. 세 젊은이들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가다보니 아름다운 숲이 있어 그 숲속을 가고 있자니 산책을 나온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다. 세 젊은이들은 푸른 전나무 숲속을 걸어가는 아가씨의 아리따운 모습에 그만 모두 반해버리고 말았다.
세 젊은이들은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며 서운한 마음을 안은 채 손에다 들려 준 전나무가지를 들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잠시 뿐이었다. 세 사람은 여행을 하는 도중 얼마 아니가서 전나무가지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중의 한사람만은 그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못 잊어 전나무가지를 버리지 아니하고 소중히 여기며 들고 갔다.
어느 만큼 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젊은이가 들고 있던 전나무가지가 황금으로 변하여 있었다. 그 황금 전나무를 본 두 젊은이는 그제서야 후회를 하며 전나무가지를 버린 곳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아직도 독일에 있는 노이엔불크의 숲속에는 밤이 되면 전나무가지를 찾고 있는 두 젊은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나무는 행운의 나무로 전하여져 오고 있다. 이같은 전설 때문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전나무로 지은 집에 살고 싶어들 한다. 그러나 나는 전나무로 지은 집에 살기보다는 전나무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뿐이다.
첫댓글 전나무 꽃과 씨앗, 발아 그리고 성장까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