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와 이중섭
한 해가 저무는 즈음이다. 꼭 사흘 지나면 해가 바뀐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선 겨울방학에 드는 날이었다. 고3은 수능 이후 사실상 교실 수업은 종료되다 시피였다. 재학생들은 정기고사와 축제 등 남은 학사 일정들을 마무리 지었다. 방학에 들어도 보름 정도는 다수가 학교에 나아 보충수업이 이루어진다. 아침나절 명목적인 방학식은 독감 전염 우려로 교실에서 방송으로 나갔다.
학생들이 교정을 빠져나간 뒤 교직원들은 워크숍 일정이 잡혔다. 일주 전 교내 도서관에서 전 교직원들이 참석해 금년도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신학년도에 대한 설계가 있었다. 방학식날은 주관 업무부서와 친목회에서 그날 갖지 못한 회식을 하고 여가 문화체험을 기획했다. 사전 의견 수렴으로 정한 행선지가 기장에서 대개를 먹고 해운대를 두르는 일정이었다.
동료들과 학교 운동장에 대기 중인 두 대의 전세버스에 나누어 타고 시내를 벗어났다. 창원터널을 지나 낙동강을 건넌 만덕터널을 거쳐 동래와 해운대를 지나 가장 읍내 전통시장에 닿았다. 우리가 찾은 식장은 사전 예약이 된지라 자리에 앉아 수저만 들도록 되어 있었다. 대게는 평소 자주 접하지 못한 계절 별식 별미였다. 나는 식도락가도 아니고 미식가 축에 끼지 못함이 아쉬웠다.
바다에서 건져져 수족관까진 살아 꿈틀거렸을 대게였다. 녀석은 삶아져 쟁반에 담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대게 다리는 가지런히 잘라 가위로 살을 볼가 먹기 쉽도록 미리 잘 다듬어져 나왔다. 게는 작은 다리가 여덟 개고 큰 다리가 두 개다. 몸통도 게딱지를 벗겨내서 속살만 꺼내 먹도록 해두었다. 친목회에선 연말로 정년을 맞은 행정실 주무관을 위한 간단한 의식을 가졌다.
식탁엔 수저 말고 게살을 파서 뽑아 먹는 특유의 연장이 놓여 있었지만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 접하기 어려운 안주로 동료가 채워주는 잔에 맑은 술을 몇 잔 비웠다. 부담 없는 바깥나들이라 낮에 잔을 비워도 마음 걸리는 데 없었다. 나는 몸통 살을 볼가 먹는 것보다 다리 껍질이 감싼 게살을 까 안주로 삼았다. 밑반찬으로 나온 지역 특산 미역귀무침도 몇 점 집어 들었다.
점심 식후는 기장서 멀지 않은 해운대로 옮겨갔다. 일행들이 타고 간 전세버스는 두 대였는데 한 대는 벡스코 근처 부산시립미술관으로 가고 한 대는 일부 동료가 내리고 해운대 동백섬으로 향했다. 출발 전 주관 부서에서 미리 희망을 받아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회 관람과 동백섬 누리마루 산책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지방에서 관람 기회가 드문 이중섭 전시회 구경을 선택하였다.
나는 2년 전 어느 봄날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아 ‘명화를 만나다 –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을 관람한 바 있다. 교과서나 다른 서책들에서 보아왔던 낯익은 우리 화가 50여 명의 그림들이었다. 그때 전시 작품은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뒤안길을 걸어간 화가들이 남긴 삶의 궤적들이었다. 미술관은 평일이었지만 관람객이 붐볐다. 한 달 한 번 있는 마지막 주 수요일이라 문화의 날이었다.
이중섭이 남긴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한국전쟁으로 원산을 떠나면서 남겨두고 내려온 작품과 부산 피난지 화재로 불타 버린 작품은 어쩔 수 없었지만… 지난번 전시회 때는 무섭게 화난 모습의 ‘황소’와 가장의 책무를 느끼게 한 ‘길 떠나는 가족’만 만났는데 이번엔 그가 마흔 생애 동안 남긴 여러 작품들을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이중섭은 전후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놓고 신산한 나날을 보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도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서울, 부산, 통영, 제주, 대구 등을 전전했다. 그는 구상을 비롯한 문인들과도 교유했다. 양담배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도 여러 점 살폈다. 그 은박지는 궁핍한 화가의 화지 대용품이었다. 당시 대구 주재 미 영사 맥터 카터가 은지화를 뉴욕 화랑으로 보내 세상에 알렸다. 16.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