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세계 대회란?
비씨카드배, 춘란배, 후지쯔배,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도요타 덴소배, 동양증권배,
바이링배, 응씨배, 춘란배, 몽백합배, 삼성화재배, 중환배 등
한-중-일 / 3국+@국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를 뜻한다
세계대회의 경우 보통 우승상금이 국내기전보다 월등히 많은 편이며, 64강, 32강 등의 토너먼트 방식이다
세계대회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프로기사로서 명예와 부, 인지도를 모두 얻는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다
단, 'TV 바둑아시아 선수권'의 경우 우승상금도 적고 참가선수도 8명으로 적어 비중이 떨어지는 마이너 세계대회로 평가 받는다.
중국
1. 구리 83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7회
이창호라는 바둑천재를 앞세워 20년 가까이 세계최강국을 자랑하던 한국바둑이
이창호의 쇠락과 맞물려 중국바둑에 차츰차츰 함락 당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세계대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중국 기사들이 수년 전부터 하나둘 우승컵을 가져가더니,
최근에는 한국을 넘어서고 있다. 그 선봉장에는 바로 중국바둑의 핵 구리(古力) 9단이 있다.
한국 바둑의 '최대의 적'으로 떠올랐던 구리 9단은 호방하고 유순하며 소탈한 성격에
호쾌한 기풍, 좋은 매너까지 갖춰 많은 한국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 10번 결승에 진출하며 7번 우승을 차지하였다.
국내 최강인 이세돌 9단과는 결승에서 수차례 만나는 등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하락세지만, 중국 바둑의 정신적지주이며 언제든지 정상으로 올라 설 수 있는 선수이다.
2. 쿵제 82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6회
구리를 필두로 한국 바둑에 반격을 해오던 중국 바둑이
2009년 중순 이세돌이 잠시 휴직기를 갖는 사이 쿵제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당시 쿵제는 막강했다.
참가하는 세계대회마다 승승장구 하며, 결승에 진출 하여 우승을 차지한다.
3. 창하오 76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3회
영원한 2인자라 불릴 창하오 9단..
중국 발음으로 창하오의 이름은 한국의 이창호와 비슷해 '중국의 이창호'로 불렸다.
게다가 1990년대 말 두 이창호는 한국과 중국 바둑을 호령하고 있을 때라 더욱 비교가 됐다.
나이가 동년배 (이창호 9단이 한 살위) 였으니 호사가들이 찧고 까불. 이만한 라이벌 감은 없다.
그러나 '중국 이창호'의 벽은 '한국 이창호'였다.
중국 바둑 랭킹 1위로 올라서는 데까지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질주했으나,
원조 이창호를 만나면서 바둑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이창호를 넘지 못하면 '절대반지'를 손에 쥘 수 없는 시대였다.
녜웨이핑의 뒤를 이어 대륙을 평정했던 마샤오춘 9단이 그러했듯 창하오 9단도
이창호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번번히 우승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2005년 1월까지 6번의 세계대회 준우승 기록은 그에게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를 선물해 주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2005년 드디어 응씨배에서는
최철한 9단을 3-1로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며 콩라인을 탈출한다
4. 위빈 67년생
세계대회 우승 횟수 : 3회
당시 중국의 모든 기사들이 그랬듯, 위빈 9단도 이창호의 벽을 쉽사리 넘지는 못했다
제 4회 LG배에서 유창혁을 꺾고 세계대회에서 첫 우승을 하게 된다.
현재는 중국바둑대표팀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5. 뤄시허 77년생
세계대회 우승 횟수 : 1회
속기가 특징인 뤄시허 9단이 2005년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랐다.
뤄시허 9단은 중국내에서도 20위권 선수로, 결승전에 오른 것 만으로도 큰 이변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지금까지 세계대회 결승에서 외국인 기사에게
단 한 번도 패점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창호 9단이 아닌가..
뤄시허 9단이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예상을 보란 듯이 뒤엎으며 이창호 9단을 꺾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창호 9단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다는 것이
애주가인 그에게 평생 술안주거리 겸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다.
6. 왕쉬 84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세계 바둑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다.
가장 좋은 성적은 제 9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이세돌 9단)과
가장 마이너한 세계 대회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우승이다.
7. 저우허양 76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녜위핑 9단의 문하제자이며, 이름 짓기 좋아하는 중국언론은
창하오, 왕레이, 샤오웨이강, 류징, 뤄시허와 묶어
이들을 '6마리의 작은용' 이란 뜻으로 '6소룡' 이라고 불렀다.
8. 장웨이지에 91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2년 20살의 나이로 LG배를 우승한 장웨이지에는 어린 나이로
현재까지 이룬 것보다 앞으로가 더 무서운 선수라 할 수 있다.
9. 파오원야오(박문요) 88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지원에서 활약했다.
2011년 LG배 우승이 가장 좋은 성적이다.
10. 천야오예 89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인이다.
춘란배에서 이세돌을 꺾고 우승했으며, 현재 세계 최고를 다투는 기사 중에 한 명이다.
스웨, 저우루이양 등과 함께 중국 랭킹 1위를 다투고 있다.
11. 스웨 91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열린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인이다.
LG배에서 원성진을 꺾고 우승했으며, 현재 세계 최고를 다투는 기사 중에 한 명이다.
천야오예, 저우루이양과 함께 중국 랭킹 1위를 다투고 있다.
12. 저우루이양 91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열린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人이다.
바이링배 (백령배)엣 천야오예를 꺾고 우승했으며, 현재 세계최고를 다투는 기사 중에 한 명이다.
천야오예, 스웨와 함께 중국 랭킹 1위를 다투고 있다.
중국 바둑계 (나아가 세계 바둑 지도)는 현재 1위가 계속해서 뒤바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13. 탕웨이싱 93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열린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인이다.
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을 꺾고 우승했으며, 기세가 좋아지고 있는 선수이다.
93년생의 어린 나이로 더 발전하면 굉장한 위협이 될 선수이다.
14. 판탕위 96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열린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인이다.
응씨배(응창기배)에서 박정환을 꺾고 우승했으며, 96년생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계 대회 중 가장 상금이 많은 (40만 달러) 응씨배를 우승하며 신선한 충격을 남겼다.
미래에 이 선수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다.
15. 미위팅 96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2013년 6번 열린 세계대회 우승을 전부 중국이 차지하게 만든 인물 중 1인
몽백합배에서 구리를 꺾고 우승했으며, 96년생 17세의 어린 나이로 우승을 차지했다.
중국 바둑의 미래가 밝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어린 선수들이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대만
저우전쉰 80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대단의 바둑 영웅이자 '붉은 얼굴의 작은기왕' 이라 불린 저우전쉰..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는 붉은 반점 때문에 '장애 아닌 장애'를 느끼던 그는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등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를 대하는 사람마다 무슨 몹쓸 병에 걸린 사람 마냥 그를 기피했다. 그러나 그가 바둑을 알면서 부터 새로운 삶을 이룬다.
그는 고교시절 곧장 대만 바둑계의 1인자로 올라서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보잘 것 없었다.
그가 세계 선수권에 10년 정도 얼굴을 내밀었으나 그다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대만이란 국가도 세계선수권에 끼워준다는 정도로 인식할 뿐, 누구 하나 주목하는 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대상을 찾던 그에게 부친의 바둑 권유는 새로운 삶을 찾는 계기였다. 바둑판을 마주 할 때는 질시도 편견도 없었다.
오직 실력만으로 승패가 갈라지는 바둑이 그토록 좋았던 소년. 6세의 어린 나이에 비로소 놀림과 멸시를 잊을 수 있는 바둑에 빠져 들었다.
20년이 흘러서 지금 누구도 믿지 못할 인간 승리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95년부터 06년 대만 명인전에서 무려 13연패를 하며, '대만의 조훈현'이라 불리운다.
9세 때부터 정규교육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워 11세 때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추천 케이스로 중국으로 유학, 본토의 송쉬에린의 바둑도장에서 연마했으며, 13세 때 중국의 입단 대회에서 프로 3단 면장을 받는다.
그러다 서서히 강자들과 시합을 통해 점점 강해져, 07년 후야오위를 LG배에서 꺾고 처음이자 마지막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일본
1. 다케미야 마사키 51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6회
우주류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다케미야 마사키라는 일본 프로기사가 있었다. 지금은 늙은 노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도 눈부신 전성기가 있었다.
오다케 히데오, 고바야시 고이치 등 일본 바둑계를 풍미했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다케미야 역시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내제자였다.
1976년 일본 최고(最古)의 기전 '본인방' 타이틀을 획득하여 이름을 날렸고,
1980년대 말에는 세계 최초의 국제기전인 후지쯔배에서 1,2회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하지만, 다케미야가 다른 스타 기사들보다 더욱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이런 성적 때문이 아니다.
그가 창안해서 세계로 퍼뜨린 '우주류' 하는 기풍 덕이다.
도대체 어떤 기풍이기에 우주류라는 광활하면서도 심오한 이름이 붙었을까?
다케미야는 중앙을 중시했다 (그것도 과도할 정도로).
이에 세상에서 '가장 감탄을 잘하는' 일본인들이 바둑판의 중앙을 우주로 비유하고,
중앙을 중시하는 다케미야의 기풍을 우주류라 명명한 것이다.
남들이 열심히 귀의 실리를 탐하고 있을 때, 묵묵히 세력을 쌓아 놓은 뒤, 막판에 이르러 중앙에 손바닥이 척 들어가고도
남을 대형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다케미야의 솜씨는 과연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멋이 있었다.
그렇다고 중앙에 집을 내주기 싫어 뛰어들기라도 하면, 그동안 묵묵히 쌓아 놓은 두터운 세력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다케미야의 중앙은 우주라기 보다는 거미줄에 가까웠다.
실제로 기사 중에는 중앙의 큰 집이 배 아파 뛰어들었다가 대마가 몰살한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프로보다는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기원에 가보면 너도 나도 화점포석에 중앙을 진출하는 우주류를 흉내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라이벌 기사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주류라는 기풍 자체가 꽤 낭만적인 구석이 있어,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장기집권할 만한 '류'는 아니었던 것이다.
2. 요다 노리모토 66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4회
1980년 14세의 나이로 입단하여 그 때부터 일본 바둑계에서 주목 받는 기사였다.
일본 바둑기사 중에서 대한민국에 특히 유명한데,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 이창호 킬러이기 때문.
대회에서 이창호와 만나기만 하면 상대전적이 90%를 넘을 정도로 '이창호 킬러'로 불렸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는 이창호 바둑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강동윤 같은 이창호 잡는 기계가 나오기도 하지만,
1990년대 이창호에 대해 적수가 없던 시절에 요다 9단은 이창호 킬러라 불릴 정도로 이창호만 잡고 다녔다.(...)
서봉수나 조훈현, 유창혁 등한테는 약했지만, 유독 이창호만 만나면 이겼다.(...)
1998년 이창호가 요다 9단을 보고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저 인터뷰 다음 해 춘란배 16강전에서는 이창호가 요다를 반집 차이로 이겼다.
물론, 2013년까지 이창호가 요다를 이긴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지만...
유독 이창호만 잡는 이창호 킬러가 된 방법에 대해 요다가 직접 말하길,
"이창호가 출전한 모든 기보를 어떻게든 구해서 몇 번이고 복기했다."라고.(...)
이창호의 대국은 2000국이 넘고, 이걸 다 복기해서 패턴을 숙지했다고 할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로, 제 7회 농심신라면배에서 불패를 달리던 이창호에게 첫 패배를 안김과 동시에
이 대회 유일한 일본의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쯤 되면 천적 확정.
일본 국내 기전에서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명인전을 4연패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기성전을 3연패
(이후 2009년에도 한번 더 기성자리 차지)하는 등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2010년부터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는지 알려진 프로필이 많지 않다.
유연하고 발빠른 기풍을 가졌으며, 사석작전을 벌이는데 탁월하다.
3. 오타케 히데오 42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2회
이 선수는 '미학자'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바둑을 두면서 모양을 굉장히 다지고 또한 아름답게 두기 때문.
비록 지더라도 모양이 참혹한 수를 두기 싫어할 정도이다.
어째 국내에서는 뭔가 화초 바둑 이미지가 강한데, '미학자' 라는 별명도 그렇고,
제 2회 응씨배에서 서봉수에게 깨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초반 완착으로 굉장히 유리했었던 바둑을 형세를 뒤집기 위해 서봉수는 강수 일변도로 두었는데
이에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면서 서봉수 9단에게 응씨배 우승을 넘겨주어
화초 바둑이란 인상이 상당히 강하게 남게 되었다.
이때의 결과를 두고 '한국의 실리 바둑이 일본의 형을 중시하는 바둑을 이겼다'라는 평이 나왔다.
기성(基聖)전에서 6연패하며 명예 기성을 칭했다. NHK배 우승 5회 등 속기에 뛰어나 '속기의 신'
명인전 도전기에 통산 12회 출장하며 '명인전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같은 세대의 라이벌 린하이펑과 함께 '죽림(竹林)' 이라고 불린다.
4. 조치훈 56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2회
조치훈 선수를 일본 국적을 가진 한국교포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한다. (저 역시 그랬음)
사실, 일본 기원에서 활약하고 있고 일본 부인을 두었지만, 국적은 한국 선수라고 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프로기사인 그는 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며
1968년 프로 입단 (만 11세 9개월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
1983년 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에 우승하여 대삼관(大三冠) 달성.
1987년 천원전에서 우승하여 최초의 그랜드슬램 달성.
1989년 혼인보 탈환. 이후 10연패 하여, 제 25대 명예 혼인보 (혼인보 치훈) 자격 획득.
2010년 12월 일본 최다승 경신 (1364승)
2011년 9월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 (72회) 기록
위와 같은 기라성 같은 기록들을 세웠다.
조치훈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는 휠체어 바둑이 있다.
평소 '목숨을 걸고 둔다' 고 자신의 바둑을 평가하던 그는
86년 일본 최대의 대회인 기성전 도전기를 불과 10일 남기고 차에 치여 전치 25주 판정을 받았다.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지고 왼쪽 팔, 손목이 부러져 15시간의 대수술을 받는다.
이 상태에서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깁스에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를 탄 채
결과는 2:4로 패배 하였으나.. 바둑에 대한 조치훈의 자세와 집념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명성에 비해 세계대회 우승횟수가 유독 적은데..
일본 바둑은 2일에 걸쳐 바둑을 두기도 하고 생각 시간이 긴데
반면, 세계 대회는 생각 시간이 2~3시간으로 짧음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세계 우승 상금이 일본 내 대회를 우승하는 것과 별차이 없어
(일본 자국 내 우승 상금이 매우 큼) 크게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5. 고바야시 고이치 52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실리를 굉장히 좋아해 3선이고 2선이고 마다하지 않고 실리를 챙기는,
흔히 말하는 '땡기는' -혹은 속어로 '빨대'-바둑을 둬
'지하철 바둑', "3의 3에 두면 바둑돌이 판 바깥으로 떨어질 것 같다" 는 말을 들었다.
현대에도 종종 쓰이는 포석인 '고바야시류' 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조치훈의 라이벌로, 위에서 말했듯 실리를 챙기고 소름끼칠 정도의 냉정함으로
상대의 실수를 정확히 응징해 가면서 승리를 낚아채는 기풍이다.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치훈 때문에 2인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1990~92년 혼인보전에서 조치훈에게 도전했으나 번번히 역전패하면서 대삼관 달성에 실패했다.
고바야시의 전성기는 1984~94년의 약 10년으로
기성(棋聖)전 8연패, 명인전 7연패 포함 8회 우승, 천원전 2연패, 기성(基聖)전 6연패, 십단전 3연패를 기록했다.
사위는 조치훈이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고 말한 장쉬 9단.
2012년 만 60세가 되자 명예 기성(棋聖,基聖), 명인을 칭했다.
세계대회에서도 종종 모습을 보였던 일본 기사로 2003년 본인방, 왕좌가 되었다.
2004년 1월 고바야시 고이치의 딸 고바야시 이즈미와 결혼 했는데,
당시 장쉬가 본인방, 고바야시가 여류 본인방이었기 때문에 '본인방 커플' 이라고 불렸다.
데이트 할 때마다 장인 고바야시에게 묘수풀이를 주고 다음 데이트까지 풀어오게 했는데,
이에 대해 고바야시는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치훈에 이어 사상 2번째로 그랜드 슬램 (7대 타이틀을 모두 경험)을 달성했다.
묘수풀이를 만드는 게 취미로, 부채의 휘호에도 마음에 드는 것을 쓰고 있다.
바둑의 보급에 열의가 있어 4로 바둑, 바둑 퍼즐 앱 '장쉬의 검은 고양이 4로' 등을 고안 했다.
담배에 대단히 약해 본인에 의하면 승률 8할 가까이 기록했던 젊은 시절에도
"만약 대국장이 금연이었다면 1년에 2~3패 정도는 줄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고 말했다.
7. 린하이펑 (임해봉) 42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한국에서는 한자 그대로 읽은 임해봉으로 유명하다.
젊었을 때 끈질긴 기풍으로 '이중 허리' 라고 불렸으나 장년 이후에는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같은 또래 라이벌인 오오다케 히데오와 함께 죽림(竹林)이라고 한다.
1952년(10살) 대만을 방문한 우칭위안과 6점 접바둑을 둔 다음 그에게 재능을 인정 받아 일본으로 오게 된다.
1955년 12세에 입단 했는데, 이는 당시 최연소 기록으로 훗날 조치훈이 깨뜨린다.
1965년 명인전에서 사카타 에이오에게 도전 했을 때,
스승인 우칭위안 조차 "좋은 경험이 될 것" 이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전성기였던 사카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예상이었다.
사카타 본인도 1국에서 이긴 다음 "20대 명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린하이펑이 4-2로 역전승하며, 23세에 당시 최연소 명인이 된다.
이는 '타이틀을 따려면 40대가 되어야 한다' 는 당시 일본 바둑계의 통념을 뒤집은 것이다.
이후 1966~67년 명인전에서 사카타의 도전을 물리친 다음,
1968년 본인방전에서 사카타를 4-3으로 이기고 사상 2번째 명인 겸 본인방이 되며
1989~93년 천원전 5연패로 명예 천원이 된 것을 포함해 통산 35개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2012년 4월 당시 1371승 850패 2무승부로 조치훈이 경신하기 전까지 통산 최다승 보유자였다.
이창호가 10대 시절 존경하는 기사를 물으면 '바로 린하이펑' 이라고 대답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이후 세계대회 결승에서 자신을 꺾은 이창호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복기를 해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사람조차도 실수를 할 때가 있게 마련.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1987년 故 가토 마사오 9단과 명인전 제 4국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두 수를 연거푸 두는 바람에 반칙패 당하며 0-4로 명인 도전에 실패한다.
이때 바둑은 린하이펑 9단이 1집 반 정도 우세한 상황이어서 더욱 안타까웠다고 한다.
8. 이야마 유타 89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회
몰락한 일본 바둑의 유일한 희망이자, 유일하게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 받는 선수이다.
현재 일본 바둑계를 씹어 먹고 있지만, 세계 대회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1회 우승한 것도 가장 마이너한 세계대회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이다.
2013년 3월 14일 제 37기 기성전(棋聖戰)에서 장쉬 9단을 꺾고 타이틀을 획득, 일본 바둑계 사상 최초로 6관왕의 자리에 올랐다.
2013년 6월 30일 제 25회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박정환 9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제 38기 명인전에서 야마시타 케이고 9단을 꺾고 타이틀을 획득, 조치훈 9단에 이어 사상 2번째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
9. 왕리청 58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2회
대만에서 태어나 일본 기원에서 활동한 선수로
제 24기 기성전 우승 (4-2 조치훈 9단)
제 48기 왕좌전 우승 (3-1 조치훈 9단)
제 2회 춘한배 우승 (2-1 마샤오춘 9단)
주요 경력은 이와 같다
한국
1. 이창호 75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23회
별명 : 석불 (돌부처), 신산 (신통한, 영묘한 능력자)
지난 십수년간 바둑은 몰라도 이창호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창호 = 바둑 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전세계 모든 기사들의 큰 행운이며 또한 그렇게 커다란 재난이다.
"이창호와 직접 대국을 해보지 않으면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한다" 고 평가를 받았다.
조훈현의 제자로 조훈현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견고한 기풍과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표정과 차분한 성격으로 돌부처라는 별명을 얻은 이창호는
무난하고 평범하게 두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기에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내며 상대를 제압하곤 했다.
세계대회 우승횟수가 가장 많은 선수로 기록이 말해주듯 전성기의 이창호는 정말로 대단했다.
2. 이세돌 83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6회
별명 : 쎈돌, 비금도 소년
이세돌의 등장은 센세이션이었다. 그는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은 느낌을 주었다.
천재적인 기재도 그랬거니와 유연하고 기발한 수와 톡톡 튀는 성격과 행동으로 바둑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무적의 포스를 자랑하던 이창호를 두고 '이창호는 공격이 약하다' 고 평하기도 하는 등
기풍도 성격도 이창호와는 정반대였다. 이창호는 차분한 성격에 두텁고 차분한 기풍이었고
이세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톡톡튀는 성격에 공격적이며 예측불허의 기풍이었다.
'이창호는 물이고 이세돌은 불이다.', '바둑의 신이 이창호를 내려 보내자 질투한 악마가 이세돌을 내려 보낸 것이다'
이세돌은 개성 넘치는 기풍과 성격에 엄청난 바둑 실력으로 이창호와의 한동안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세계대회에서도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이창호의 뒤를 이어 세계대회를 제패해 나간다.
3. 조훈현 53년생
세계대회 우승횟수 : 11회
별명 : 전신 (전투의 신), 바둑황제
조훈현은 일본에서 바둑을 마치고 병역문제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그의 스승 후지사와 슈코는 '진주가 진흙 속에 뭍혔다' 라며 안타까워 했다.
세계 바둑계의 흐름을 일거에 우리나라로 돌려 놓은 일대 사건이 있었다. 응씨배 우승 !
김포 공항에서 종로를 지나 한국 기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질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1989년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바둑 수준은 후진국 취급을 받았다.
국내 대회를 휩쓸어오던 조훈현은 이 대회 우승을 필두로 세계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며
(그의 제자 이창호가 급부상하기 전까지) 바둑황제라는 별명을 얻는다.
4. 유창혁 66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6회
별명 : 일지매, 세계 최고의 공격수
한 때, 조훈현 - 서봉수 - 이창호 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큰 세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돌을 공격하는 기풍.
과거에는 공격형 기풍의 대명사라 할 정도로 전투에 능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왔으나
최근에는 때에 따라서 실리를 챙기는 등 상당히 유연해진 모습이다.
1984년 입단 이후 신인 대회 수상을 시작으로 세계대회 우승 6회 등 세계 대회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5. 서봉수 53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3회
별명 : 잡초, 야전사령관, 고추장 바둑
당시 바둑계에서 정상권 선수들은 전부 일본에서 바둑 유학을 다녀 온 기사들이었다.
당시 일본의 바둑 수준은 우리나라에 바할 바가 안 되게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봉수는 길거리, 기원에서 내기 바둑을 두며, 마땅한 스승도 없이 혼자 바둑을 배웠다.
그런 그의 바둑을 사람들은 순 한국산 된장 바둑이라 칭하기도 했다.
1971년에 명인전에서 우승하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 만 18세로 당시로서는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다.
명인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바둑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그러나 국수전에서는 조훈현에게 늘 패배하여 제 2인자에 머물곤 하였는데,
당시 국내에서 조훈현은 무적이었다. 서봉수가 아니었다면 조훈현이 모든 타이틀을 독식 했을 것이다.
서봉수는 간간히 조훈현에게 번번히 패배하고 밟히면서도 잡초 같은 근성으로 때때로 조훈현을 꺾으며
'조-서 시대'를 열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조훈현과의 관계는 아직도 김연아와 마오의 관계처럼이나 서먹하고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잡초 같은 승부 근성으로 세계 대회에서도 3회 우승하게 된다.
6. 박영훈 85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3회
별명 : 소신산 (이창호는 신산, 박영훈은 小신산)
최철한, 원성진과 더불어 '송아지 삼총사'의 일원으로, 가장 먼저 국제기전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정확한 형세 판단으로 이창호의 뒤를 이은 '신산(神算)' 이라는 별명이 있다.
고스트 바둑왕의 캐릭터 고영하의 롤모델이다.
7. 최철한 85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2회
별명 : 독사
박영훈, 원성진과 더불어 송아지 3총사라 불린다.
적극적인 전투 기풍으로 '독사' 하는 별명이 있다. 부인인 윤지희도 프로 기사이다.
세계 바둑 대회인 응씨배, 중환배 우승 경력이 있다.
8. 백홍석 86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2회
별명 : 돌주먹
2001년에 입단하였으며, 2006년에 SK가스배에서 우승하였고, 2007년에는 바둑대상 신예기사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에는 BC 카드배를 우승하면서 생애 첫 국제기전 타이틀을 보유하게 되었다.
현재는 군복무중이다.
9. 박정환 93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1회
별명 : 사활의 신, 공부 벌레
2006년 13세의 나이로 입단 하였으며,
2010년 아시안 바둑 게임 종목에 출전, 금메달 2개를 획득하여 9단으로 특별 승단하였다.
2011년 후지쓰배에서 추쥔 8단을 꺾고 우승함으로써 주요 세계 기전 첫 우승을 이루었다.
10. 강동윤 89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1회
별명 : 깡통
어려서부터 바둑에 두각을 나타내어 세계 청소년 바둑 주니어부 우승을 비롯하여,
이창호배와 오리온배, 삼신생명배 등 여러대회를 우승한 경력이 있다.
2009년 제 22회 후지쓰배 세계 바둑 선수권전에서 이창호를 누르고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개최 된 제1회 World Mind Sports 대회 바둑 부문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2010년 아시안 게임 바둑 종목에 출전하여 남자단체 금메달을 획득했다.
11. 원성진 85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1회
별명 : 원펀치
서울에서 태어나 권갑용 도장에서 배웠다. 1998년 13세의 나이로 입단하여, 2007년 9단으로 승단했다.
소띠 동갑내기인 최철한, 박영환과 더불어 '송아지 삼총사' 라 불린다.
2011년삼성화재배에서 구리를 꺾고 생애 첫 국제기전 우승을 이루었다.
12. 박정상 84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1회
별명 : 정상의 기사
2000년 입단 하였으며, 2004년 SK가스배 신예프로 10걸전에서 우승하였고, 2006년에는 바둑 세계 대회인 후지쓰배에서 우승했다.
현재는 바둑TV 해설도 하고 있다. 부인은 아마 6단 겸 바둑TV 해설자 김여원씨
13. 양재호 63년생
세계 대회 우승 횟수 : 1회
별명 : 반상의 과학자
1979년 입단하였고, 1989년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했다. 1990년 9단으로 승단하였으며, 현재 한국 바둑리그 KIXX의 감독이다.
2010년 아시안 게임 바둑 종목에서 감독을 맡았으며,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2011년에는 한국기원의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출처) 아이러브사커 사단주임원사임.ㅇㅇ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