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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과 사랑의 시 원문보기 글쓴이: 우련
꽃잎으로 돌아오다 글 / 정채봉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안주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수첩이다. 곧 포켓 다이어리인데 일일 약속이며 중요사항, 그리고 나한테 꼭 필요한 전화번호가 적혀져 있기 때문에 상의 왼쪽 심장편의 안주머니는 이 수첩의 지정 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이 수첩의 알맹이가 중요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수첩 갈피에 아름다운 표징이 있어 더더욱 소중하다. 12월25일 크리스마스 주간에 다소곳이 잠자고 있는 꽃잎 한잎. 큰 것도 아니다. 손톱만한 벚꽃잎이다. 이 벚꽃잎을 나한테 건넨 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았어요.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책을 펼쳐들고 받았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나한테 수첩을 펴들게 해서 자기 수첩에 있던 것을 입바람으로 살짝 건네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벚꽃잎 이전에는 그 자리에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베낀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바로 그 앞에는 어린 종이학이 들어있었으며, 이들이 그동안 바뀌고 바뀐 사연은 이렇다. 몇 해 전 나는 출장길에 충청도 괴산의 야산길을 걷고 있었다. 가을날이었지만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는데는 더운 날씨였다. 점퍼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고갯마루에 올라 땀을 들이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앳된 목소리의 성가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 하느님 크시도다’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나는 노랫소리를 좇아 가만가만히 내려갔다. 성가를 부르는 주인공은 오솔길 가의 도토리나무 아래에 있었다. 아기를 업고서 풀섶과 낙엽 속에서 도토리를 찾고 있는 그 아이는 초등하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였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나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나님 나는 박수를 쳤다.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난데없는 나의 출현에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본명을 댔다. "나는 프란치스꼬라 한다. 네 본명은 무엇이냐?", "아녜스예요." "너 성가를 아주 잘 부르는구나." "아냐요. 우리 주일 학교에서는 마리아와 엘리자벳이 잘 부르는 걸요." "물론 그들도 잘 하겠지. 그러나 오늘 이 산밑에서는 너가 그야말로 그랑뿌리감이다." 나는 가방을 뒤적였다. 마침 나의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한권 있었다. 나는 그 책의 속표지 여백에 이렇게 썼다. - 아녜스에게. 성가 ’주 하나님 크시도다’를 푸른 하늘 아래 풀과 나무와 새들 앞에서 기가 막히게 잘 불렀으므로 이 상품을 줌.
정 프란치스코 아저씨- 아이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선생님앞에서 상을 받는 것처럼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책을 받았다. 나는 아이의 머리와 등에서 잠 자고 있는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그 자리를 떴다. 그런데 한참 내려가는데 아이가 "아저씨! 아저씨!"하면서 달려왔다. 콩밭언덕에서 기다리고 있자 아이는 다가와서 어린 종이학을 내밀었다. "지난 주일에 성당에서 접은 거예요. 전 이것밖에 드릴 게 없어서…." 아이는 말을 맺지 못하고 도망치듯 돌아갔다. 나는 어린 종이학을 소중히 수첩 갈피에 넣었다. 그리고 많은 날들이 지났다. 해가 지나 수첩이 바뀔 때는 어린 종이학을 전화번호와 함께 새수첩으로 옮겼다. 재작년에 주위의 권유로 난생 처음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두 군데에 재검사 지시가 떨어졌다. 지정받은 날에 긴장하여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그야말로 성냥개비처럼 마른 분이 검지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는 그날도 나의 본명을 먼저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요셉이라고 한 그분은 자신이 "이만큼이라도 담담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위로의 말은 해야겠는데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문득 수첩 속의 어린 종이학이 생각나서 그것을 꺼내어 건네며 말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어린이가 접은 겁니다. 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분은 포켓 속에서 작은 성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거기에 내가 준 어린 종이학을 조심스럽게 넣고는 다른 갈피에서 메모지를 꺼내어 내한테 주었다. "내가 요즈음 자주 읽고 있는 시입니다. 부끄럽습니다만 가지시겠습니까?" 이내 간호사가 나타나서 그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분과 나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종이학이 나가고 없는 수첩 갈피에 알프레드 테니슨의 ’모래톱을 건너며’를 넣었다. 해 지고 저녁별 나를 부르는 소리 나 바다로 떠날 때 모래톱에 슬픈 울음 없기를 무한한 바다에서 온 것이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소리나 거품이 나기에는 너무나 충만한 잠든 듯 움직이는 조수만이 있기를 황혼 그리고 저녁 종소리 그 후에는 어둠 내가 배에 오를 때 이별의 슬픔이 없기를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물결이 나를 싣고 멀리 가더라도 나를 인도해 줄 분을 만나게 되기를 나 모래톱을 건넜을 때 그리고 또 많은 날들이 지났다. 하루 저녁에는 친구집에 들렸다가 늦은 시간에 화곡 전철역에서 전철을 탔다. 그런데 건너편 의자에 앉은 승객이 내 얼굴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외면을 했다. 다음 역에서 내 옆자리의 승객이 내리자 앞자리의 그녀가 자리를 옮겨와 "정선생님이시죠?"하고 물었다. 내가 얼버무리고 있는데 "서울주보에서 간장종지를 잘 보고 있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말 상대가 되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그녀는 그날 오래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녀를 달래느라고 나는 수첩 속의 시를 건네주며 어린 종이학과 시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슬픔이 걷힌 얼굴로 말했다. "동화 속 얘기 같네요. 염소를 팔러나간 영감이 바꾸고 바꾸어 썩은 사과를 들고 들어오는 동화말예요." 그러면서 그녀가 나한테 건네 준 것이 지금의 이 벚꽃잎인 것이다. 다음에는 어떤 이의 무엇과 바뀔른지...
첫댓글 새야새야 파랑새야 어디갔다 인제왔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