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 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2]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7월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일주일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날 연해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군을 중국 동북지역의 3개 지역으로 진격시켰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인해 이미 전의를 상실했던 일본군을 상대로 소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않은 채 전후 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재편과정에서 미국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소련이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의 질서 개편에 참여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이 항복하기에 앞서 동북지역에 진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연합국 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의 ‘일반명령 제1호’에서 비롯됐다.
각 지역 일본군이 항복할 대상과 방법을 구체화한 이 명령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와 사할린, 쿠릴열도 등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만주)의 일본군 지휘관들에게는 소련의 극동군 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명령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미국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더 끈질기기 저항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쟁 막바지에 소련 극동군의 대일전 참전을 종용했다
미국의 이런 판단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치른 소련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은 종전 후에도 소련과 함께 세계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 세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또 다른 오판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은 국민당정부군이 일본군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지원하며 관계를 지속했는데,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해방 직후 국민당정부 세력은 중국공산당 세력에 비해 객관적 전력이 크게 우세했다. 더욱이 국민당정부는 소련과의 중소우호동맹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동북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게 되어 국면을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 동북지역에서의 정세는 국민당정부 세력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소련은 중소우호동맹조약 체결에 따라 중국 동북지역의 질서개편과 관련해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일제의 항복을 앞두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지역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88여단의 대일전 참전을 저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연안에 있던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으로 진군하려던 계획을 막고 국민당정부와 협력해 연립정부를 세울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3차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은 해방 초기 국민당정부를 지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보였다. 즉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기본적으로 국민당정부를 지원하면서도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지원을 하는 양면전술을 썼다. 소련의 이러한 태도는 9월 중순 이후부터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이 지역에서 철수할 시점이 다가오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