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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1)
요 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 13:1-11 /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세상에서 지내실 마지막 밤인 것을 알고 계셨다. 2-3) 마귀는 이미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때를 이용해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꾀어 그 밤 안으로 예수를 배신할 계획을 진행하도록 일러두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알고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층 더하셨다. 4) 그래서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5)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 6) 이렇게 하여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을 네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훗날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8)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은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우겨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내 친구가 될 수 없다.' 9) 시몬 베드로가 소리쳤다. `그러시다면 제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이제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11) 예수께서는 이미 배신할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으므로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은 13장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요한복음 후반부의 핵심은 가장 위대한 표적인 십자가를 통한 복음의 계시와 십자가 수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실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의 내용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 행하신 고별설교와 대제사장으로서 드린 중보기도인데, 13장은 그것이 시작되는 장입니다. 유월절 직전 고난주간의 제 5일인 목요일 밤에 마가의 다락방이라 추정되는 곳에서 최후의 만찬이 열립니다. 이 만찬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 예표했던 구원의 진리와 대속의 원리, 겸손과 섬김의 도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사건으로 생생하게 계시됩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제자 중 하나는 예수를 배신하기로 이미 결심한 상황입니다. 다른 제자는 다음 날 아침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밤 모든 제자는 예수를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제자들의 형편 없는 모습 때문에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 때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자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는 아시고(2-3)마귀가 자기 할 일을 합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가 걸어야 할 길, 그 길을 걸을 때 보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동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4-5) 왕의 위격을 가진 신적인 존재가 천한 행동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합니다. 이 행동은 내가 죽을 때만 할 수 있는 겸손과 섬김을 상징하며, 예수의 대속을 계시합니다. 왕과 종의 행동이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만왕의 왕이요, 주(主)가 가져야 하는 참된 덕목이 구체적으로 계시됩니다(마 20:28; 눅 22: 26-27; 롬 12:3; 빌 2:3-4; 약 4:10; 벧전 5:5).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6-11) 세족은 예수의 죽음을 뜻합니다. 참된 겸손과 섬김은 그리스도에 의해 씻기고 깨끗해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깨끗해진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겸손히 참된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씻기고 깨끗해진 경험과 그것에 관한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신 죽으신 그 역사야말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심”의 표현이고 증거입니다. 이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예수께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마지막으로 하실 그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신 행위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신 일이고 십자가를 지시려는 그의 뜻을 천명하신 일입니다.
< 설 교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윤영택 목사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쓰여지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 얼마나 더 많이 있을까요? 사랑에는 다양한 의미와 내용이 있지만 이 세상에 변함이 없는 사랑이란 가능할까요? ‘사랑’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고 시와 노래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는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이 항상 아름답고 애틋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온 천지를 불태우려는 듯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사이에 그 기운을 잃고 매캐한 연기만 내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죽기살기로 좋아하다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실망스런 부분이 드러나면 금새 시큰둥해지고 언제 사랑한다고 했더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엉터리 사랑도 많습니다. 대단히 충동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고 변질되기 쉬운 사랑입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거짓이 없는 사랑은 뭐니뭐니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들 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깊고 지속적입니다. 혹시 아니라고 반대하는 아버지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머니 사랑이 아버지들보다는 더 애틋하고 희생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모성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사랑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영국에서는 Mother’s day라고 합니다. 5월에 어버이날이 있지만 여기서 어머니 은혜를 한 번 더 감사하는 것이 그리 번거로운 일은 아니겠지요?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는 날이 되기 바랍니다.
부활절을 3주 앞두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는 오늘 아침에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끝까지 변함 없는 사랑이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더 간절하게 표현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오늘 본문 한 절의 말씀 속에 충분히 담겨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21장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주님의 생애 마지막 한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제자 요한은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신 주님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마음 쓰심과 행동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3세쯤 되셨을 때 세상을 떠나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젊고 아쉬운 연령입니다. 평균 연령을 살거나 그보다 더 긴 세월을 살다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는 마음은 여전히 섭섭할 것입니다. 그래도 인생을 살만큼 살다 가시는 분들은 우리가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자 하며 이 땅에 남은 자들을 생각하며 삶을 정리할 여유를 가질 수 있겠지만, 30대 초반의 젊은이로서는 남겨두고 갈 사람들보다는 못 다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집중하다가 떠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하루 앞둔 주님의 행적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큰 은혜가 됩니다.
요한은 13장 1절을 기점으로 예수께서 남은 시간 동안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 마치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 생각을 환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처럼 매 장마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겠습니까? 요한의 복음서에 표현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책임 완수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 책임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그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져내어 생명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 또는 책임완수는 사랑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힘들고 무거운 명령이었습니다. 요한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였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그 모진 마음의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참고 또 참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책임완수라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마지막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에 물을 담아오시고는 열 두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모두 씻어주셨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잔치 음식을 먹으러 모이는 집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곤 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런 대접도 받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제자들 중에 누구 하나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선생님의 발조차 씻어주려 나서는 제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서로 논쟁을 하며 신경전 벌이던 제자들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동료의 발을 씻기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눅22:24).
그런데 선생님이신 주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선생님께 자신들의 발을 내 맡긴 제자들은 당황스럽고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으로서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에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였다’ 하셨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사형을 당하실 분으로서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생님을 떠나 보낼 준비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직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내가 높다 네가 높다 서로 힘겨루기나 하고 있는 철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말로서 이해될 상황이 아니기에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으로 참 사랑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단호한 어조로 당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행동을 따라 수련회 같은 모임에서 ‘세족식’을 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의식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형제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그의 허물과 약점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신 형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믿음 좋다 운운해도 예수님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깨끗하고 흠이 없이 완전하여서가 아닙니다. 만일 좋은 조건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과연 몇 사람이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외모가 뛰어나서, 재력이 있어서, 선행을 많이 해서, 남보다 기도를 많이 해서, 믿음이 뛰어나서?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조건들은 그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나의 미모가 출중해도 더 잘난 사람이 있고, 나보다 더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있으며,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 믿음이 더 큰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조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그럴듯한 조건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거하셨다’(롬5:8) 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선하고 기특한 일을 해서 하나님 마음을 나에게로 돌려놓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내 믿음이 남보다 뛰어나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더니 나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착각이고 넌센스입니다. 그 사랑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물론 사람에 따라 연약한 믿음이 있고 크고 든든한 믿음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떤 이에게는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 하고 책망하셨는가 하면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칭찬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큰 믿음 작은 믿음의 분량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음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리고 작은 믿음일지라도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에 저 어린 아이가 뭘 알고 기도하는가 하여 가볍게 여기고 작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참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을 볼 수 없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믿는 부모들은 자녀의 믿음을 위해 신앙훈련을 소홀히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부모는 주일 아침에 교회 나오면서 아이는 교회에 가든지 말든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모들은 꼭 기억하십시오. 나중에 자기들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도록 맡기겠다고 하지 말 것은 그런 방관 자세 때문에 어른이 되어도 예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이 수 십 년을 허송세월하며 살아왔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것은 우리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뜨겁고 확실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 밖에는 나의 소망이 없고 나의 구원이 없다고 겸손하게 낮아지는 작은 믿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유초등부 어린아이들도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음을 무심코 지나치지 마십시오. 아직은 작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어린이를 하나님 자녀로 살게 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천국 시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랍습니다. 그러나 어린 믿음은 자라면서 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적 믿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왜 큰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은 후 계속하여 성장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먹고 그 다음에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더 자라서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맞서는 것처럼, 영적 아기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날마다 성장하여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녀가 아니라 주의 일군입니다. 그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믿음은 그 믿음만큼 반응하고 큰 믿음은 거기에 맞는 삶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밤 모임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제자로 인정받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이기적이고 욕심꾸러기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못되고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성입니다. 맛있는 과자를 주면 한 손에 쥐고 또 한 손을 내밀어 양손에 다 쥐고 두 손이 다 차서 더 이상 움킬 수가 없으면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어린아이의 욕심이고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면 비로소 남을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볼 마음이 생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어린 믿음은 언제나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삽니다. 나만 좋으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기분 내 감정이 우선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형편은 그 다음이다.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도 다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물론 가족들 사랑도 독차지 하고 이웃으로부터 나 혼자 사랑 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조금 성숙하면 그제서야 옆에 있는 형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그 사람의 아픔과 고민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성숙함을 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누가 더 위에 있고 더 높은 사람이며 영향력이 있는가 그런 것 내세우지 말고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라고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남보다 믿음 좋다고 자랑하면서 어리고 연약한 믿음의 형제를 무시하거나 우쭐댈 일은 없습니다. 큰 믿음은 그 믿음의 분량만큼 일을 하고 내 앞에 닥친 고난과 싸워 이기며 성숙한 믿음의 본을 보여줘야 진짜 큰 믿음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정말 큰 사랑은 움켜쥐고 독차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께서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누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큰 믿음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보여지며, 그 사람에게 있는 사랑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알아보게 됩니다.
순교자 베드로, 요한,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었고 어린아이의 사랑을 가졌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을 내어주며 복음을 전하고 희생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불뚝거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덤벙대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나 살려라 도망하고 멀찍이 따라가며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려고 신분을 감춘 채 기웃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가련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자기 입으로 부인하고 말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뵙고 다시 주님 사랑을 회복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으면서까지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신 말씀처럼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에 고귀한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고, 그 밤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보전하여 주시고,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이 사람들도 우리와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하나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한편, 밤을 새워 기도하신 다음 날 새벽,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군병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리에서 주님은 한 번 더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신 주님은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다. 너희가 잡으려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 하시며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요한의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드디어 십자가에서 그대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신 주님을 보고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것이구나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자기 목숨을 버려 죄의 형벌을 담당하는 책임을 끝까지 다 이루는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고 모자람이 없는 사랑이며 책임을 완수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내가 부름을 받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붙드신 그 사랑의 손을 절대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십니다. 기쁨의 자리에도 고난과 아픔의 자리에도 함께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버지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즐거워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사랑으로 성숙한 제자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의 자녀와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땅한 삶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 – 사랑
요한복음 13장 1, 34, 35절 / 문기택 목사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늘 사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어서 행복하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할 수 없어서 불행을 느낍니다. 우리안에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에게 사랑이 차고 넘쳐 흐르면 그 사랑이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사랑이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요즘 김수환추기경 선종이후 장기기증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죽어서 몸의 전부가 아닌 아주 작은 일부를 기증하는 것도 훌륭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서 당신의 몸을 일부가 아닌 전부를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며 영생을 얻도록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열두시간쯤 앞의 상황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는 장면을 13장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통상 발을 씻기는 일은 집에 처음 들어오는 때입니다. 주인이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제자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저녁을 잡수시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미루고 아무도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기 바빴습니다. 서로 자신은 그렇게 천한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니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만찬 도중에 가룟 유다는 식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가룟 유다가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몰려 올 것 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착잡했을 것입니다. 사랑할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심하고 이기적인 제자들이 밉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런 상황에서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또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만한 여건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움을 감내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허황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손수 세숫대야에다 물을 떠다가 허리를 굽혀서 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철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그냥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에 하신 말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는 13장에 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자기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주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말슴하신 사랑하라는 말씀에 담긴 중요한 진리를 붙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무조건적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희생해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순간 사랑하다가 끝나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표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것도 어렵지만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운 사람을 피하면 되니까요. 억지로라도 그를 생각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제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준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제자훈련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해내는 것은 사랑할 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사랑을 실천해 보려고 애쓸 때 주님은 자기 모습을 밝히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 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손해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감리교 선교사이면서 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박대인 목사가 동남아시아에서 열린 외국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그 모임에서 일본인 선교사를 한 분 만납니다. 일본인 선교사는 드문데 기이하게 여겨져서 '어떻게 선교사로 오게 되었는가?' 물어보았답니다. 그의 대답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도쿄에 살았는데 정부의 지시로 농촌으로 소개를 가게 되었답니다.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고 아는 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외롭고 불편하고 서글프겠습니까? 그런데 남달리 친절과 도움을 베풀어준 지방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달을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절한 사람을 찾아가 작별의 정을 나누게 되는데 그 농촌사람이 그때 비로소 자기는 조선에서 온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헤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헤를 빌겠다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분은 도쿄로 돌아가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그 조선 사람의 사랑이 기억날때마다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크리스찬이 되고 목회자가 되어 일본보다 후진국인 동남아시아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달아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죄를 버리고 있습니다.
2. '서로' 사랑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서로'란 일차적으로는 제자들 끼리를 뜻합니다.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구를 생각하기에 앞서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 상호간에 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거창한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사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열렬히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전 세계를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동시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남편을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늘 예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증명하신 참된 사랑의 감동에 빠져 살아야 합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본받고자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막연히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알고 믿는데 그쳐서는 불완전합니다. 믿는바를 그대로 실천할 때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시고는 '가서 나도 그와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주간 카작스탄의 신학교에서 교회개척론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강의를 끝내고 난 후 한 학생이 제게 와서 자기의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본래 이슬람교를 믿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슬람종교의 지도자인 이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어려서부터 이맘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이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이 여섯이나 되는데 이슬람신학교에 들어가면 가족을 돌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남인 그는 먼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신학교입학은 가정이 안정된 후로 미루었습니다. 그래서 버스운전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넷이나 낳았지만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밖으로만 돌았습니다. 어느날 날이 추워 버스의 엔진이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 밑에 들어가 불을 가지고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버스의 기사가 그를 보지 못하고 후진을 하였습니다. 버스의 바퀴가 그의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고함소리에 그 기사는 다시 버스를 앞으로 움직여 다리를 또 한번 지나갔습니다. 그는 기절하였습니다. 깨어보니 병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리를 보니 피부가 새까맣게 죽어있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내는 울었습니다. 아내의 입에서 듣게된 놀라운 소식은 그의 딸이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태어난지 3개월된 손자에게 우유를 먹이다가 잘못하여 아기의 식도가 막혀 위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다녀오는중에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이 지나가다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남편은 버스에 다리를 갈려 다리를 잘라야 하고 딸은 유방암 수술을 해야 하고 손자는 위수술을 해야 합니다. 어찌 될지도 모르고 집이 가난하여 세 사람을 수술할 돈도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 하면 좋습니까?" 그 말을 들은 동네 사람은 "나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겠네요. 지금 교회를 가는 중인데 당신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겠습니다. 함께 교회가서 기도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교회를 따라갔습니다. 목사님은 카작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에 전화를 해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에는 수술하지 않는데 상황이 급해 다리 수술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감각이 없던 다리가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수술 준비를 하러 들어온 간호사에게 "내 다리가 이상한데 보시오."했더니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가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의사가 깜짝 놀라며 기적이 일어났다고 썩던 다리가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술하지 않고 아무 이상없이 회복되어 퇴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도 손자도 수술없이 건강이 회복되어 일주일만에 퇴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자녀들을 열심히 예수를 믿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자녀들이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순종적이고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그는 아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는 것을 보고 다그쳤습니다. "네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 아니냐? 연애편지를 쓰는 것 아니냐?" 아내는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은 지금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슬람의 이맘이 될 사람인데 네가 기독교인이 되면 안돼. 당장 그만둬." 그리고 성경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2년동안 무섭게 박해했습니다. 아령으로 내리쳐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고 다리미를 던져서 머리가 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일하던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들은 더 강하게 핍박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는 휘발유 한 통과 술 한 병을 사들고 집에 왔습니다. 술을 반 병쯤 마셨을 때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아내의 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성냥을 들고 위협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불에 태우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냥을 그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성냥이 부러지며 불이 없는 쪽은 아내에게 불붙은 쪽은 반대로 날아갔습니다. 순간 아들이 달려와 그를 안고 울부짖었습니다. "엄마를 죽이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아들이 차라리 교회당을 태워버리겠다고 기름통을 들고 나가려는 것을 아내가 가로막고 말했습니다. "차라리 나를 태워라. 교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순간 아내의 눈을 보니 그렇게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괴로와 울었습니다. 아침에 아내 들어와 그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하셨어요. '네가 승리했다. 네 남편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여보 함께 교회갑시다." "내가 어떻게 교회를 가냐? 하나님을 향해 나쁜 욕을 했고 예수 믿는다고 당신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예수님은 벌써 다 용서하셨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세요." 그는 교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예수르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과 그 사랑을 본받아 자신을 내어주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세상은 밝아지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적을 일으킬 때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다 감수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사랑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부르십니다.
섬김과 나눔 그리고 드림의 영성
요 13:1-17 / 이기복 목사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과 함께 세 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과 다른 하나는 공관복음에 기록된 것으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들이 꼭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영성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성 고난주간 중 목요일에 행하셨습니다. 세 가지 사건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요, 동시에 제자들과 주릴 믿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형태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나눔의 실천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상에 둘러앉을 때마다 나눔의 공동체가 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미리 제자들에게 자기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우연이거나 피할 수 없는 오해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은 바로 인류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는 새로운 유월절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친히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의 피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요, 그의 살은 인류 속에 새로운 삶을 불어 넣어주는 새로운 영과 생명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결국 성만찬의 깊은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의 생명을 함께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6-57).
우리가 주의 성만찬 상에 참여함으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그 생명의 본질을 서로 나누어 갖는 데 있음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었으며 서로 예수님의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나누어 갖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업주와 사원 사이에 벽을 쌓고 서로의 진실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불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한 자, 소외된 자, 고통을 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누는 생활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여유가 있든지 없든지 항상 나누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마음을 나누며 우리의 물질을 나눌 때 우리는 거기서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남을 배격하고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와 절친한 사람들과만 교제를 하고 나누는 생활을 하는 극히 제한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나누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의 본질인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복음입니다. 다른 것을 다 나누어 준다고 하여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2. 섬김의 영성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을 통하여 섬김의 영성을 배워야합니다. 공관복음서인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유월절에 주님과 마지막 만찬을 마친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다툼과 논쟁의 내용은 누가 제일 높으냐, 크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다시 교훈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처럼 해야 하고 또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왔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길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냥 말로 하는 것 보다 행동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섬기는 종으로 오셨음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하나의 가르침과 교훈을 주기 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인 본문에 보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길 극진히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기에 섬김의 자리에 기꺼이 내려 가셔서 제자들의 말을 씻으실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죄를 씻으신 것입니다. 섬김은 진정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특별히 사탄의 이끌림을 받은 가롯 유다를 더욱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큰 사랑의 손길로 그를 돌이키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가롯 유다는 속으로 당항하기도 하였겠지만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받아 드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는 것에 대하여 이해 할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명분은 스승께서 어떻게 제자의 발을 씻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생각도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섬김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섬김을 받으려는 생각이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서 섬기는 자가 되심으로 이룩한 공동체 안에서 누가 감히 섬김을 받으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섬기는 자가 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세족식을 통하여 베푸신 두 가지 기념비적인 행동은 바로 우리 교회와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반드시 멀리 가서 선교적 과업을 달성하는 것만 아닙니다. 바로 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누고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립시다. 그리고 겸손함으로 서로를 나누며, 서로를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할 때 우리교회가 놀라웁게 변화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 드리는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드리는 영성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인지라 자신을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드림의 최고의 영성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성 금요일 예배에서 십자가 7언을 낭독을 합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드린 7가지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얼마나 성스럽고 위대한 기도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처형을 받는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하는 호소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도 예수님이 정말 자신을 드리는 기도입니다. 마지막까지 흉악한 강도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절규하십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은 이 울부짖음이 원망으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당하는 가장 큰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울부짖음이요 기도입니다.
그리고 최후로 자신을 맡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로 십자가 위애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 위에서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모두 드렸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드리는 영성입니다.
섬기는 사람
요 13:1-15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섬기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고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요 우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이 종을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이상스럽게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주인이 종을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실천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본론>
1. 섬기는 삶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보면 요한복음 13장 1절로 5절에“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주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시간이 점점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페스티벌이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하다가 해당되어 나온 그날을 기념해서 유월절을 지내는데 유월절 지날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거의 통상적으로 섬기는 것을 주님께서 거역하시고 주님이 특별히 섬기는 새로운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주인이 종을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이 데리고 있는 동안 가르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발은 삶의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먼지 일어나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발이 더럽습니다. 당장 밖에 나가면 먼지투성이입니다. 진흙탕을 샌들을 신고 나가니 발이 먼지투성이가 되고 냄새가 나고 더럽습니다. 이것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사람치고 발이 더럽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인데 상징적인 것입니다. 발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더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행위가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합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씻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했고 이사야 59장 12절에“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세상 사는 사람치고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인간의 행위가 더러운 먼지와 티끌을 발로 더럽히는 것과 같아서 주님이 발을 씻겨 준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인간 행위의 죄악을 씻어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인간의 두 종류의 죄를 씻으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제물이 두 가지가 있는데 속죄 제물이라는 것이 있고 속건 제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속죄 제물은 무엇이냐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속죄 제물인 것입니다. 속건 제물은 무슨 제물이냐면 여러분과 내가 허물 짓는 것 욕하고 싸우고 도둑질하고 폭행하고 방탕한 행위의 죄를 씻는 것이 속건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얻는 것이고 속건 제물은 거룩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로 14절에 보면“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또는 한 제사를 드리고 영원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시대는 매일 같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제사장이 매일같이 성전에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렸는데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단 한 번에 영원히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 육신을 쓰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그 보혈로 과거의 죄, 미래의 죄, 합쳐서 영원히 우리의 죄를 청산한 제물이 되고 말았으므로 한번 예수님 제물 드렸으니 더 이상 제물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한번으로 완성되고 오직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보혈이 여러분 영원히 씻어버린 것입니다. 한두 번 씻는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 그런 것을 발견하면 굉장히 돈벌거에요. 매일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세수할 필요 없이 한번만 하면 영원히 깨끗할 것이다. 아무리 먼지가 와도 붙지 못하고 떠나가 버리고 깨끗해져 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가능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속죄 제물, 속건 제물을 늘 드리고 하나님께 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깨끗케 해주신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성소가 둘러 갈라졌었어요.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에서는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때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고 못 들어갑니다. 그곳에 두꺼운 천이 드리워 있어서 지성소는 못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년마다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했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이루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 손을 안대었는데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게 돼버렸습니다. 예수님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지금 하나님 앞에 와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막힌 담이 없어졌어요. 헐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제물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우리의 허물을 영원히 청산해 버려서 영원히 의롭고 영원히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의롭게 되고 영원히 거룩하게 되었다. 이것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선물로 받고 그 다음에는 진짜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의 발을 씻길 때 차별 없이 씻겨주신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열두 명 중에 착한 제자도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같이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큰 소리하고 예수님을 시인했다가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이 시험당할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나는 그 사람을 절대 몰라요. 나와는 상관없어요. 그렇게 변화무쌍한 제자도 있는가하면 예수님이 먹이고 가르치고 사랑하고 돌보아준 가룟 유다 같은 제자는 예수님을 종의 돈을 받고 팔아먹은 사람이고 도마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했다 해도 나는 안 믿는다. 그의 손에 손가락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고 불신앙한 제자도 있고 희한한 제자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다 알고 계세요. 그런데 좋은 제자만 발을 씻겨준 것이 아니라 착한 제자, 좋은 제자, 의심하는 제자, 배반하는 제자, 팔아먹는 제자까지 다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5절에“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죄인을 찾아가서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병든 자를 찾아가서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시고 외롭고 슬픈 자에게 위로해 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시고 가는 곳마다 인류의 고통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건져주고 소망을 주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인 것입니다.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제물이 되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러한 모범을 따라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의인이 죄인을 섬기고 먼저 믿은 자가 나중 온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섬기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 섬길 수가 없어요.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나 너희들은 차별두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2절로 15절에“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랑하는 사람의 발 씻겨 주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든지 씻겨줄 수 있지요. 그러나 미운 놈 발 씻겨 주는 것 발이 냄새나고 구린내 나는 미운 놈의 발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씻어서 타올을 닦아준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것은 좀처럼 하기 힘들어요. 제가 하루 저녁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좋은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는데 좋은 사람의 발은 얼마든지 씻겨 주겠는데 미운 놈이 와서 발 씻겨 달라고 하면 내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못하지. 그럼 안 해도 괜찮지요? 천만에. 어떻게 합니까? 나를 품에 품으면 할 수가 있다. 나를 품에 품으면 할 수 있지만 나를 떠나서는 못한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까지도 발을 씻겼는데 나를 마음속에 모셔드리고 의지하면 너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뿐 아니라 섬기는 모범으로 마음에 모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생각하니까 남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이 되더라구요. 미운 사람들도 예수님 섬긴다고 생각하니까 괜찮더라구요. 미운 사람이 안보이고 예수님이 보이더라구요. 내가 섬기는 이 사람이 미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수님 섬기는 것같이 섬기니까 섬길 수가 있잖아요. 서로 사랑하고 주님께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발에 침을 뱉지 말고 씻어주라. 이웃의 발에 미운 사람은 아이 더러워 퉤 아이 보기 싫다. 그러지 말고 미울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발을 씻어주라. 여러분, 부부간에 서로 싸우는 사람 많잖아요. 어떤 신앙상담 온 50대 자매님이 남편을 좀 착하게 사랑해주라고 하니까 목사님, 모르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은 목사 생활했기 때문에 주여, 주여 하고 서로 사랑했겠지만 안 믿는 사람들, 우리 세상 사람들은 50이 넘어서 서로 다정하게 사랑하는 부부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세요. 나만 나쁜 것 아닙니다. 그래서 자매님, 남편을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미울 때도 많지요. 돈도 안 벌어오고 큰소리만 하고 자꾸 봉사만 하라고 하니까 밉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은 남편을 남편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품에 안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 품에 안겨서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고 보니 남편을 그냥 따라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다 예수님께 의지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용서도 할 수 없고 봉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섬기지 않고는 예수님 의지하지 않고는 내 희생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나 앉으나 먹으나 마시나 다 예수님께 의지해서 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먼저 나를 섬겨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통 섬기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죽어서 여러분을 섬겨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섬겨주신 예수님을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원수를 섬기니까 안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은 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고 원수를 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계시지요?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저주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절로 7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섬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윌리암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윌리암 부스는 구세군을 창설하신 영국 사람인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영국으로 모여 왔습니다. 한때 주교가 되려고 꿈꾸던 사무엘 브렝글이라는 미국의 훌륭한 목사님이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부스 사령관은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구세군에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깨에 힘을 주고 나는 미국에서 그래도 종교적으로 아주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인데 구세군에 들어왔으니 나에게도 높은 계급을 주고 높은 자리를 주어야 될 것을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세군 윌리암 부스 대장이 브렝글을 불러가지고서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지도자로서 군림해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당신은 우리 구세군에 맞지 않는데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구세군 사관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뭡니까? 당신 처음 할 일이 뭐냐면 우리 구세군 사병들 구두를 닦는 일을 하십시오. 내가 구두를 닦아요? 내가 미국에서는 존경받는 목회자인데 여기 평신도 사관들의 흙 묻은 구두를 닦으란 말입니까? 구두를 닦을 수 있을 때 당신은 구세군 사관이 될 수 있고 구두를 닦지 못하면 구세군 사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는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꿈을 쫓아왔단 말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하니까 환상 중에 그 거칠고 무식하고 냄새가 나고 구린내가 나는 제자들의 발을 환상 가운데 봤어요. 잠시 후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꿇어앉더니만 그 냄새나는 발을 가슴에 안고 물로써 씻어서 닦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스 대장이 자기에게 왜 사관들의 구두를 닦게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잠시 내가 환상 가운데 보니까 그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닦더군요. 그렇다면 저도 이 구두를 못 닦을 리가 있겠습니까? 구두를 닦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 의지하니까 구두를 닦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브렝글은 기꺼이 사랑으로 동료들의 더러운 군화를 닦았습니다. 그때마다 청지기의 사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성도 여러분은 높으신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씻겨주신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발을 한번 내려다보세요. 예수님이 여러분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발이 아닌 영적인 발은 더 더럽지 않습니까?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썩은 발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씻어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이 씻어준 발을 가지고 교회 와서 앉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인 <레 미제라블>을 보고 굉장히 제가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주인공인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잡혀서 죄에 죄를 보태고 탈옥을 하다가 잡혀서 무려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만기 출소하여 사회에 나왔으나 모두 전과자라고 외면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배고 고파서 교회 목사님의 집에 찾아갔는데 신부가 그를 청해다가 은그릇과 은숫가락을 가지고서 맛있는 음식을 담아서 대접을 해주고 그날 목사님 집에서 주무시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밤에 일어나서 은그릇을 훔쳐 가지고서 은대접을 훔쳐 가지고서 자기 마대기에 넣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경찰에 잡혔어요. 잡혀서 확증하기 위해서 목사님 집에 끌려왔는데 목사님이 반가워하면서 아니, 내가 우리 집에 와서 당신 저녁 먹고 난 다음에 가서 팔아서 돈에 쓰라고 촛대도 은그릇도 다 주었는데 그것을 왜 그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느냐고... 경찰관보고 이것 내가 준것이라고... 이 사람이 너무 순진해서 그 말을 못해서 그런가보다고... 경찰관이 그래요? 그러면 그런말을 하지 왜 안했느냐고.. . 그래서 감옥에 안 들어가고 놓여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을 느꼈던지 자기가 훔쳐간 은그릇과 은촛대를 내게 선물로 줬다고 변명을 해서 안 잡혀가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 변화 받아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조그마한 도시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파헤쳐서 멸망시키려는 형사가 있었습니다. 그 형사가 그 시까지 따라와서 끊임없이 그의 뒤를 파헤치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불란서혁명이 일어나서 군중들이 정부를 점령하게 되었을 때 이 형사는 독재자의 앞잡이라고 잡혀서 총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장발장이 나가서 막았습니다. 이 사람 총살하지 말라고... 장발장은 군중들의 지지를 받는 시장이기 때문에 청년들이 안 죽이고 놓아 주었습니다. 그 형사가 장발장에게 와서 나는 당신을 잡으려고 한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당신의 죄과를 들췄는데 어째 당신은 나를 이렇게 놓아줍니까 하니까 장발장이 하는 말이 땅보다 바다는 넓지 않습니까? 땅보다 하늘은 더 넓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 넓은 것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 소설을 읽고 상당히 마음에 감동을 느낀 것은 사제의 용서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시장까지 하게 한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그 용서의 마음이 그 마음속에 역사해서 자기를 죽이려는 형사를 총살현장에 가서 건져내어서 용서하고 살아날수록 만들어준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마음은 여러분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도저히 우리 힘으로 청산할 수 없어요. 용서해 주는 것 이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내가 용서받기는 좋아도 용서해주라면 좀처럼 용서해주지 못합니다. 복수는 복수로써 끝나지만 용서는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구체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내가 칼을 쓰면 다른 사람도 내게 칼을 씁니다. 내 칼에 피를 묻히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칼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복수와 저주를 중지시키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지 않고는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쓴물이 달아지는 것처럼 원한의 쓴물이 십자가를 통해서 달아지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사람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원한이 있고 슬픔이 있고 미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다른 것은 십자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니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빚을 졌는데 다른 사람에게 빚을 요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그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죄와 허물을 사함 받은 우리는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한 마음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나의 힘과 능으로는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면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용서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섬겨 주십시오. 아내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모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웃을 용서해 주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용서하는 그 마음이 주는 그 마음이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넓고 가장 넓은 것이 용서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팔을 끌어내서 용서해주고 안아주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라도 아버지께로 나오면 아버지가 뛰어나오셔서 우리를 얼싸안고 성경에 보면 탕자가 돌아올 때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송아지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다고 좋아한 것입니다. 용서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봐주시옵소서. 그때 아버지가 그 냄새나는 아들의 목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환영을 하고 제일 좋은 옷 갖다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아들 된 모습으로 가락지를 끼워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 먹고 즐기자. 용서입니다. 그런데 형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집을 안 떠나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던 형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 듣고서 밭에서 일하다가 나 집에 안 들어간다. 저 아버지의 재산을 기생들과 다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 먹도 못하고 살지 못하는 놈을 아버지가 받아줘? 저런 놈하고 나는 같이 안 산다. 나는 오늘 집에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와서 얘, 너는 오랫동안 나와 같이 있었으므로 이 집이 너의 것이고 이 재산이 다 너의 것이 아니냐. 동생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내가 저렇게 사랑하고 환영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같이 들어오너라. 안 들어가요. 못 들어가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천당도 안 들어갑니다. 천당에 아버지가 천당에 들어오너라. 너 들어오너라 해도 율법주의자들은 나는 의롭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았는데 왜 죄인들을 천당에 데리고 옵니까? 죄인들 있는데 나 안 들어갑니다. 죄인은 오히려 용서받아 천당에 들어가는데 의인들은 천당에 안 들어온다고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심판을 하는 것은 참 비참한 것입니다. 남도 천당에 못 들어가게 하고 자기도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새출발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돼지요. 십자가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하는 마음을 갖자. 그러면 나도 편하고 이웃도 편하고 가정도 사회도 편해지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섬기면 얼마나 좋습니까?
2. 예수님을 섬기는 마리아의 모습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로 3절에“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리셨지 않습니까? 그 감격한 마음이 뿌리가 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특히 예수님을 경배하고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일주일전에 그들 집에 와서 대접을 받는데 마르다는 열심히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나드 한 근의 옥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옥합은 돌로써 만든 옥합인데 단단하고 거기에 나드 기름을 넣어서 밀랍으로 때웠기 때문에 그릇을 깨뜨려야 향유가 부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에서는 그것이 결혼할 때 지참물입니다. 시집 갈때 얼마나 나드 기름을 많이 가져왔냐에 따라서 시집에서 평가를 해주는 것인데 여기 시집 갈때 가져가려고 나드 기름을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기름을 모았습니다. 삼백데나리온이 얼마냐면 그 당시 노동자들이 일하는데 일 데나리온 받았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1년 내내 일해서 받은 돈을 가지고서 산 것이 바로 나드 기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서 감격해서 듣고 눈물을 흘리고 뛰어나가더니만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드 기름 받은 옥합을 가지고 나왔는데 탁 문지방에 때리니까 바싹 깨지니까 기름이 확 흐르는 것 예수님 머리에다가 바르고 예수님 발에다 붓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타올로 닦고 발을 닦은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채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니 나드 기름 향기가 온 집에 가득할 뿐 아니라 머리가 삼발이 되어가지고서 기름이 얼굴에 줄줄 흐르면서 삼발된 머리를 보고 예수님이 말씀 전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다 돌았구나 완전히 돌았구나. 보통 돈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굉장히 노했습니다. 그는 비난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로 8절에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유대 나라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다가 향유를 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일주일 후에 죽을 테니까 나의 시체에 미리 향유를 부은 것으로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내가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이 증거되리라. 제가 한 번 더 설교 할 시간이 있으면 하겠는데 예수님께서 이 마리아가 해 준 이 행동에 얼마나 마음에 위로를 받았던지 그 위로 때문에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위로가 필요해요.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도 아주 낙심되고 어려울 때 성도들이 제게 편지 보내주고 전화해주고 격려해 줄 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가슴에 상처가 나아요. 우리는 서로 위로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던 것은 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려서 기름을 머리에 발에 붓고 머리채로써 그를 닦아준 그 섬기는 마음이 위로가 되어서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었습니다. 어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느냐. 여기 주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나의 죽는 날을 위해서 미리 예비해 주었다고 그는 말했었습니다. 그러면 죽는 날은 뭡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것 아닙니까? 모두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외치고 그 제자들이 다 도망을 치고 베드로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이 살벌한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 위로가 되고 살아갈 용기와 힘, 십자가를 걸머질 힘이 생긴 것은 마리아의 생각인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예수님을 육적으로 사랑했다고 했는데 육적으로 사랑했으면 나쁠 것 뭐가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그가 예수님의 아들로써 사랑하다가 예수님은 남자고 마리아는 여자인데 육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지요. 못한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지요. 어떻게 사랑했든지 예수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어서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 것입니다. 섬길 때 이렇게 멋있게 섬기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마리아가 한 일이 기념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그 아들 외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꼭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굉장히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처럼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야 돼요. 내 마음에 귀한 것을 가지고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내가 좋은 것은 다 감춰 놓고 버릴 것 가지고 섬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 가지고 섬겨야지요. 가룟 유다가 욕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한 것은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낭비다. 이런 낭비가 어디 있느냐. 삼백 데나리온 가지고 가난한 사람 도와줄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내게 잘 해 주었다. 낭비가 두 가지 낭비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몹쓸 낭비가 있고 거룩한 낭비가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써도 좋습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쓴 낭비는 낭비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교회를 짓기 위해서 재산 다 드렸는데 낭비냐. 낭비 아닙니다. 내 청춘을 다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보냈는데 낭비냐. 그것 왜 청춘을 낭비하느냐. 그것 낭비 아닙니다. 거룩한 섬김인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갖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오늘날에도 가득해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도 그 향유 냄새가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었는데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낭비는 영원히 칭찬 받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
예수님께서 얼마나 감동을 느꼈는지 그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라고 하는 헌신에 큰 힘을 얻어서 우리의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위로입니다. 위로를 받으면 힘이 생겨요. 우리 가만 보면 남여선교회 회원 여러분이 열심히 봉사합니다. 새벽에 제가 아침 5시에 나오면 그때부터 벌써 길거리에 서서 안내를 하고 있어요. 이 추운데 돈을 받습니까? 선물을 받습니까? 그냥 열심히 주님을 사랑해서 섬깁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여러분 말 한마디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압니까? 아이구 고맙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돌봐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짠해져요. 내가 더 섬겨야 되겠다. 말 한마디가 천냥빚을 갚는다고... 제가 이번에 인도에 가서 무더운데 복음을 증거하니까 그 인도 사람들이 날 찾아와서 우리 인도를 잊지 않고 찾아와서 복음을 증거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 말하는데 마음이 뜨거워지는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내가 젊음이 더 있으면 더 인도를 위해서 섬겨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로의 힘입니다. 부인보고서 남편이 여보, 집에서 얼마나 수고를 하오. 내가 호강 못시켜줘서 죄송하기 짝이 없는데 지금이라도 벌면 호강시켜 줄게. 더 못벌것 알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그 말이 얼마나 찡합니까? 위로가 되고 섬기겠다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한가지에요. 생존경쟁에 어렵고 가족들을 돌봐야 되겠다고 애를 쓰고 힘을 쓰는데 자꾸 다른 사람 비교해서 내 친구의 남편은 이렇게 잘 버는데 당신은 뭐냐. 이 졸자 같은 당신에게 시집와 가지고서 신세 망쳤다. 그렇게 말하면 집을 나가고 싶고 자살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때문에 고생을 하고 애쓰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위로의 말이나 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뭘 그래. 괜찮아. 다들 하는 고생인데 뭘 나라고 그렇게 하나 그러면서도 야~ 마누라 하나 잘 뒀다. 정말 고맙다. 마음에 용기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위로, 이것 잊지 마십시오. 적은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뭐 내가 말 한마디 하는 것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 한마디에 효과가 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예수님조차 위로 받았는데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예수님, 창조주 그가 마리아의 헌신적인 섬김에 위로를 받아서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위로가 얼마나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배워야 할 일
우리들이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일은 나의 삶의 죄와 허물을 피로 씻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더러운 발을 씻긴 것은 바로 내 인생을 씻겨준 상징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로 9절에“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섬겨 주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대한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먼저 섬겨 주었으니 나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그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나가면 여러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칭찬해 주니 감사합니다. 욕을 얻어먹으니 감사합니다. 감사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마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발란스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로 32절에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참 힘들지 않습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는 안돼요. 절대로 여러분 힘으로 원수를 사랑하느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느냐. 선대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사람 콱 죽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같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이 어떻게 달아졌습니까?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서 물이 달아진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우리 미워하는 마음이 달아지고 불쌍한 마음이 생겨나고 위로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가 그 마음이 생겨날 때 항상 보태야 할 것은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환경이 굉장히 어려울 때 마음이 바로 안 잡힐 때 뭐가 마음을 바로 잡는지 압니까? 그저 감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쳐올라오고 기도가 안 나올때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가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혁명을 가져오는 능력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삶을 여러분 속에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 사람하고 특별히 수양과 도덕으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전심을 다하여서 십자가를 안고 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서 우리도 이웃을 섬기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를 항상 씻어 주십니다. 회개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발을 씻어주십시오. 아낌없이 주님께 내어놓고 헌신하면 그 향기가 천국에 사무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이웃이 기뻐하고 화목하게 되는데 그 섬기는 삶을 어떻게 사느냐. 십자가를 끌어안지 않고는 섬기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섬기는 삶을 안 살면 어떻습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은 섬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섬기는 삶을 삽니까? 십자가를 끌어안고 나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와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여러분 집에 돌아가면서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남편 바라보고 아내 바라보고 자식 바라보고 부모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이상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생각, 사랑하는 생각, 도와줄 생각, 칭찬할 생각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 삶에 가장 위대한 삶이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제나 원망스럽고 부족한 점이 늘 눈에 보이지만 섬기는 삶을 살면 만족합니다. 내가 주를 섬기면 하나님이 나를 더욱 섬겨 주시기 때문에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가장 민감한 사랑
요 13:1-7, 12-14 / 이정익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은 인류가 최초로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고 정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노래도 연속극도 주제가 사랑이 아니면 소재가 성립이 안 됩니다. 삶의 이야기도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각종 사건도 싸움도 행복도 모두 사랑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 세계에도 너무 일찍 이 사랑이 찾아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여자 아이들의 수가 적어 남자아이들이 짝을 찾지 못해 야단입니다. 짝을 찾은 아이들은 좋아하고 짝을 찾지 못한 남자 아이들은 우울해 합니다. 5살짜리 여자아이와 7살짜리 남자 아이가 놀다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여자아이가 갑자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정색을 합니다. 그러자 남자이이가 “왜 이래 어린애도 아닌데“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과장된 듯한 느낌은 들지만 오늘 아이들 세계에도 이 정도로 발전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이렇게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사랑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랑은 있는데 그 사랑에 부작용이 심각한 것입니다.
본문은 진정한 사랑을 제시하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왔습니다. 그때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진정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로만 아니고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
무조건적 요소
이 세상은 매사가 조건부입니다. 무조건적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 가장 가까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넓다고 칭송합니다. 그런 부모의 사랑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자식을 버릴 때는 거기에 무슨 조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어떤 가치가 주어져 있는 아이였다면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에는 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후에는 겟세마네 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밤새도록 피땀을 흘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 밤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발은 가장 부정한 지체입니다. 그래서 가장 부정한 남의 발을 씻어주려면 먼저 내 마음에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익어 있어야 가능합니다. 가식으로 또는 연극으로 발을 씻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래 못가고 자주 변합니다. 죽더라도 함께 하겠다고 말하고 뜨겁게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어떤 분은 60세가 넘었는데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울며 같이 죽겠다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신히 말렸습니다. 마지막에는 노래나 한곡 부르겠다고 하더니 “한 많은 이 세상”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6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립스틱 짙게 바른 여자를 데려오더라고 합니다. 어느 남편은 부인에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술주정을 하고 아내 속을 무던히 썩이고 구타를 일삼았습니다. 온 동네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관식을 할 때 그 남편이 나도 같이 묻히겠다고 울며불며 뛰어 들어갈 것 같이 날뛰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이 “나를 말리지 말라, 나도 같이 묻히겠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하관식 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목사님이 “그럼 같이 묻히라”고 구덩이로 떼밀었습니다. 그러니까 구덩이에 떨어진 남편이 곧 바로 뛰어올라오더라고 합니다. 인간의 사랑의 한계는 너무 깊이가 얕습니다. 그나마 또 계산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사랑을 봅니다.
상대 배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중에는 가룟유다도 있습니다. 유다는 지금 예수를 배반하려는 계획을 다 짜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손이 덜덜덜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유다의 발을 다른 제자들처럼 다 씻겨 주셨습니다. 그때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발을 척 내 맡기는 유다를 볼 때 속에서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눈치 채지 않게 초연하게 다 씻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으면 무례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고 막말을 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배려를 하게 되면 말도 행동도 처신도 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배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피해를 입히고 무례하고 감정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말을 무례하게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들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문화를 무시하거나 박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개성을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형편도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르고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나님은 오셔서 당장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벌하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인정하시고 참으시고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 배려하는 마음이 더 강해지면 상대방에게 민감해지게 됩니다. 민감하다는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는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고 가꿉니까. 돈을 많이 들여 가꿉니다. 얼굴뿐 아니고 손톱에도 발톱에도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을 가꾸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에게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간까지 유다를 기다리셨습니다. 발을 씻겨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천연스럽게 행동하며 회개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를 지적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그의 영혼을 사랑하셨고 그의 내면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내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 두려운 만큼 네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적하여 주신 것입니다. 멸망의 길을 가는 유다를 배려한다고 끝까지 말을 안 하신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돌이키지 않는 유다를 보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냥 놔두면 유다가 멸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외면하고 모른척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에 민감하게 되면 그런 염려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민감하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유리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아이들 누군가 다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유리조각들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치웠다고 선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내 행위에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누군가를 위해서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민감한 사랑입니다. 지구 반대편 어떤 나라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 북녘땅에 있는 백성들이 지금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뉴스를 들을 때 마다 밥을 먹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사랑의 마음이 밖으로 탈출되고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민감한 사랑입니다. 민감하지 않으면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무감각해집니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언덕을 땀을 흘리며 힘겹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내가 조금 도와주었더니 그가 아주 쉽게 올라갔습니다. 시골 노모가 서울에 올라와서 길을 헤매다가 내게 길을 물어 가르쳐 주다 보니까 아무래도 시골 노모가 길을 찾지 못할 것 같아 아예 그 노모를 모시고 그 집까지 모시고 갔습니다. 그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민감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목숨을 바치고 집을 팔고 피를 흘려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민감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작가 펄벅이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중국과 가까운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살다가 마침내 한국을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쓰면서 서설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과 같은 나라다.” 1960년10월 한국을 방문해서 자동차를 타고 안동에 갑니다. 가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밖의 신비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밖에 지게를 진 농부가 소를 끌고 같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보는 광경인데 이 이국인 펄벅은 그 모습이 진풍경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지게를 진 농부가 자기 지게에 볏단을 지고 소는 그냥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신비롭게 보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같았으면 소가 밭을 갈고 힘들건 말건 지게도 볏단도 사람까지 소 등에 올라타고 갈 것인데 한국의 농부는 소의 짐을 덜어주고 자기가 볏단을 지고 그 소와 함께 걸어가는 그 모습에서 짐승을 배려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민감한 사랑입니다.
옛날 동네에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아버지가 아파서 누웠습니다. 겨울이 되었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자 그 모습을 누군가가 눈치 채자 그 이야기가 온 동네에 파져나갔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 한 짐씩 해서 그 집의 텅 빈 광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이고 민감한 사랑입니다. 그 때는 먹을 것이 없었던 때인데도 감나무 가지에 감 열매 몇 개는 남겨두어 누구든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배려이고 사랑이고 예민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한 국민의 마음에서 펄벅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은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아주 민감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것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습니다. 초월하려면 두 가지를 선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내 안에 쳐 놓은 울타리를 걷어내는 일”입니다. 내가 스승인데, 내가 어른인데, 내가 선배인데 하는 이 마음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울타리를 치고 살아갑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사마리아인은 상대하면 안 된다는 장벽과 울타리를 굳게 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화도 그 땅을 지나가는 일도 거부했습니다. 그 땅에도 성결한 사람, 자기들보다 훨씬 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울타리를 쳐 놓으니까 그들과 대화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사람들은 “세리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는 마음에 줄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세리를 만나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 중에도 양심적인 세리들이 없었겠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한 것은 “떼먹은 것 4배를 갚겠습니다”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부정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는 떼먹은 놈이라고 인정했지만 나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4배를 갚겠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마음에 이런 편견이나 줄을 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를 그대로 보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배려도 민감함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마음에 집착을 버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되면 다른 것은 눈에 안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녀의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어떤 상대에게 집착을 하게 되면 결혼을 하겠다고 우깁니다. 주변에서 볼 때 그리고 부모가 볼 때는 그 아이는 짝이 아닙니다. 얼마 못가서 깨질 것이 분명합니다.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집착하게 되면 눈이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여자 친구가 눈이 애꾸였습니다. 아들은 우기며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아니 눈이 애꾸인 것이 안 보이느냐,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니 “그 애꾸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집착을 버릴 때 객관적인 눈이 뜨이고 거기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집착하고 우길 때는 자꾸 반대하면 안 되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객관적인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내 마음속에 처 놓은 이 집착을 버려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라는 마음의 장애물을 치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배반하려는 제자의 발도 거리낌 없이 씻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야 예수의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분부를 존중해서 따라야 합니다.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누구의 발부터 씻어주어야 하는가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민족이고 그 다음이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이웃과 민족에 평화가 찾아와 주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요 13:1-17 / 서명성 목사
서점에 나오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할 때 종교서적이든 일반서적이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은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맡은 그룹이나 조직을 세울 수도 있고 허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리더 되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믿는 자로서 리더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겠고 믿는 자로서 따르는 자들도 올바른 따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분의 실천은 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나 삶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분주하지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고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맡겨진 일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섬김의 리더십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실행해야 할 제자도를 보여주십니다.
세족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
요한복음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의 표적이 언급됩니다. 13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을 본 제자들을 믿음으로 확실히 세우기 원하셔서 말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위로 제자들을 양육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행함을 본받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그 밤이 예수님에게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다락방에서 있던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종합해보면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아침에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삼 년을 한솥밥을 먹고 지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도 보아왔지만 아직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누가복음 22:24를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서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식사 중에 왜 일어나시는지 궁금해 하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립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은 직접 물을 떠다가 대야에 담으시고 가까이 앉아 있던 제자들부터 발을 씻기시고 씻긴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기의 발을 내맡기며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도,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할 일, 곧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인지라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고 나면 샌들을 신고 있는 발에 흙먼지가 덮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종이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침묵과 충격 속에 바라보던 베드로는 그 손길이 자신에게 이르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손까지 붙잡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높으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씻어주심이 없이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그 죄 씻음을 통하여 온전한 영적 연합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는 가운데 보여주는 사양은 겸손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이 됩니다. 주의 일을 맡겨도 부족함을 이유로 습관적으로 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일을 맡겨도 같은 이유로 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자꾸 사양만 한다면 도리어 불순종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문자적으로 ‘너는 일부분도 나와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말합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 하면서 손과 머리를 예수님께 내밀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의 대답이나 요청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의 반응은 충동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겸손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은혜를 거절했던 것이며, 손과 머리를 씻겨 달라는 것은 적극적인 신앙 같으나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옵니다. 그러니 몸은 이미 깨끗한 것이요 오는 동안에 발에 묻은 먼지만 잔치 집에서 씻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구속의 피로 목욕을 했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흙을 묻히며 살아갑니다. 마음으로 (시기, 질투, 욕심), 말로 (혈기, 비방, 거짓말), 행동으로 (폭력)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의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날마다 발 씻음, 곧 성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부분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사랑
세족을 통해 선생이 제자를 섬기는 겸손한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끝까지의 사랑’을 방해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격하며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향유에 젖은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최상의 헌신의 행위를 보여주는데도 가룟 유다는 옆에서 못 마땅해 합니다.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마리아에게 면박을 줍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회계를 맡았기에 마리아가 향유 판돈을 드렸다면 그 중의 얼마를 자기 수중에 넣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마리아에게 엉뚱하게 분풀이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도 정성껏 씻고 닦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지목하지 않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유다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충동질을 따라 예수님을 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6절에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유다에게 주시니”를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제공하신 포도주에 적신 한 조각의 떡은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을 상징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한 조각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이를 받아들고 배반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도 “비통히 여기시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표현 속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인간으로서 느끼신 배신감과 연민의 정을 모두 드러내십니다.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서 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면목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랑에 대해 무지한 것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룰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베드로가 실패할 것도 예고하십니다. 이곳에서 예고된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요한복음 후반부를 엮어가는 중요한 맥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실패는 21장의 디베랴 바닷가의 회복(21:15-19)을 통해 반전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에로의 초정에 베드로가 응함으로 회복을 경험하며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수행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합니까?
1) 주님처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은 말이 아닌 행위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중생의 죄 씻음 후에도 매일매일 저지르는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세족에는 “내가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다, 죄를 씻기 위해 세상에 왔다, 너희의 어떤 허물도 용서하고 씻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발을 씻는 제자들과 깊은 사귐을 가지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족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며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은 ‘디아코노스’ 곧 ‘섬기는 자’로서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닦는 행위를 통하여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4절의 겉옷을 ‘벗고’에 쓰인 단어와 10:11절에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세족의 행위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족 사건은 예수님의 살과 제자들의 살이 맞닿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며 깨끗함과 회복됨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기억하며 더 겸손히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도도 말로만 하고, 사랑도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말로만 가르치게 됩니다. 자기 몸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 행하는 겸손이나 섬김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을 정결케 하셨다는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섬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제자들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예비하신 상급을 받게 됩니다.
3) 주님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이 힘써 행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제자의 사랑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섬김을 받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사랑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 주고도 아쉬워하는 사랑입니다. 머리로만 사랑이 아니라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자기의 지갑을 여는 사랑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이고, 그 때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김의 현장(가정, 이웃, 학교, 직장 등)으로 부르십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상처들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이웃에게서, 사업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로는 남들에게 털어놓기 거북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몸까지 쇠약해집니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가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치료함을 받았다면 우리들은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 들이 되어 상처를 가진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은 후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 사람들에 전도하러 뛰어갔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고 주변의 핍박 속에서도 주여 내가 믿나이다 담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함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의 찬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자들이 팔로마 한인 교우들의 간증과 섬김을 통하여 치료함 받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예수님의 권면을 좇아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섬김의 자세를 가질 때 저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고 삶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함을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알고 행하는 자의 복’을 소개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곧 겸손한 섬김이 복이란 뜻입니다. 복이 되는 겸손은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성숙된 제자들이라면 서로 발을 씻기며 남들을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 이끄는 자나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는 그룹이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 섬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들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들이 삶의 현장에서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섬김
요 13:1-20 / 이동휘 목사
1. 삶에 주어진 시간이 딱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을 남기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 팔려는 생각을 아시면서 그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겉으로 표현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배신을 두고 견딜 수없는 괴로움을 안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수차례에 걸쳐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끝까지 숨기고 뻔뻔하게 자신의 발을 예수께 내밀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일이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자세입니다. 스승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낮고 천한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제자들, 인간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므로 겸손의 극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복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겸손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룩하셨습니다.
빌립보서2:5-8을 보겠습니다.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 즉 하나님이시었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표현이 바로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친히 그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겸손을 기도와 신앙과 훈련의 목표물로 삼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 겸손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끊임없이 훈련하신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40여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8:1-3을 보겠습니다.
(신8:1-3)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고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여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여 다시 한 번 겸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명기8:11-18입니다.
(신8:11-18)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만약 겸손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겸손하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8:4-10입니다.
(신8:4-10)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겸손의 훈련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항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배워 사랑으로 섬김는 삶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은 십자가의 죽음, 곧 자아부정(自我否定self-denial)을 말합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이처럼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곧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그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끝까지 따라 가는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부정하고 사는 삶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지난날의 자신의 모든 삶과 사랑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간 지니고 누리고 있던 세상적인 찬란한 ‘스펙’을 모두 다 배설물로 여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깨닫고 그간 지니고 살았던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는데 그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요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의 고백, 빌립보서3:3-12입니다.
(빌3:3-12)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롬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롬8:18)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는 바울은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이제 오직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유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지식과, 그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요,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거기서 겸손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겸손의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이 가장 낮은 골짜기를 찾아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 낮은데 처해 있는 피조물을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채워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아 그의 영광과 그의 능력을 부어 그를 높이기도 하며 축복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큰 은혜를 갈급해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일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는 일을 항상 즐겨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항상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생활을 통해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리스도의 정신과 행동이라야 말로 참된 겸손의 가치, 사랑으로 섬김의 가치를 깨우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1)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멸시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자 하면 성도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과 말썽거리가 생기는 원인은 겸손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3:1-2)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교만은 자신과 아울러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이 유대인들과 그 사회에 고통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결국 겸손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2)겸손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가장 거룩한 자처럼 여겼으나 회개가 없는 가장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습니다.
(눅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겸손한 사람은 이처럼 구원받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극한 겸손은 일상적인 범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뇌리(腦裡)에서 떠날 수 없는 심각한 죄의식에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떠한 죄인이었나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죄의식에서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죄의식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성직자인 제레미 테일러는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회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시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참회라는 사람을 멸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사람을 더럽다고 하여 멀리 하지 않으시고 죄악을 도말하여 정결케 하시며 더욱 더 가까이 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유쾌해지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다윗 왕은 지은 죄를 두고 즉시 회개하므로 성령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지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회개하지 못하고 변명을 일삼고 그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 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졌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망하게 됩니다. 이 나라 민족과 지도자들이 엄청난 죄를 짓고도 멀쩡하다고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로 망할 날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회개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가져오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3)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입니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입니다. 겸손한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사랑의 섬김은 서로를 가까이 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사랑의 섬기는 생활로써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다시 빌립보서 2장을 보겠습니다.
(빌2:6-11)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천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매우 부유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최고급이 아니면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공자 중의 귀공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으로 그의 영혼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달려 교외로 나갔습니다. 그가 말을 달리고 있는 길에 한 사람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온 몸이 문드러지고 있어 몸서리날 만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까다로운 성미의 프랜시스였던고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일그러지고 소름끼치는 이 문둥이를 보고는 무서워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 그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두 팔로 그 문둥병자를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가 그 문둥병자를 사랑으로 껴안는 순간, 문둥이는 예수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겼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껴안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할 때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괴로움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가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것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만큼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습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생활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분의 겸손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뿌리를 바로 이 겸손에 두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며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게 되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사역이 예수님의 겸손으로 시작하여 겸손으로 마침을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겸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0:26)...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곧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하여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겸손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발 씻기시는 예수님
사 57:15, 벧전 5:6, 요한복음 13:1-15 / 인명진 목사
우리 몸의 여러 부분 중에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몸의 맨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은 다 하지만 영광은커녕 관심조차도 받지 못하는 것이 ‘발’입니다. 입이나 코나 귀나 눈은 우리 얼굴에 모여 있고 다른 사람이 보는 부분이기 때문에 귀걸이도 하고, 립스틱도 바르고 눈 화장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도 세우고 아무튼 많이 꾸밉니다. 그런데 발은 그렇지 못합니다. 손하고 비교해도 손에는 예쁜 매니큐어도 하지만 발은 한다고 해도 손만큼은 신경을 안 씁니다. 손은 다른 사람이 꼭 잡아주기라도 하지만 발을 꼭 잡아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발목을 잡혔다’고 합니다. 손목을 잡혔다고 해도 될 것을 왜 발목을 잡혔다고 합니까? 이래저래 발은 고생만 하고 대우를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도 요즈음에는 발이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해진다면서 발, 발목 전문 의사까지 등장해서 발의 위상이 다소 높아진 느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준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부부끼리, 부모님의, 자녀들의 발을 씻겨준 경험이 있습니까? 사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주님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의 특별한 안목이 돋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고난주간 목요일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 하였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5-20). 다시 말하면 성만찬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성만찬이 아니라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족식은 요한만이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성만찬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3:1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남은 사랑의 불꽃을 유감없이 태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가 사랑을 불태운 것일까요 사랑이 예수를 불태운 것일까요?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박한 사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애를 태워도 더 태우고, 발을 씻겨도 먼저 씻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발을 씻어주는 부모는 있지만, 부모들의 발을 씻어주는 자녀는 아마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의 발은커녕 손도 씻겨드린 적이 없습니다. 옛 부터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의 효성보다는 더 깊고 절박한 것입니다.
오늘이 마침 어린이날이고, 어린이주일입니다. 부모 되신 여러분, 할 수 있다면 자녀들의 발을 한번 씻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혹은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 순간이 자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녀 되신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이 어버이날인데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은 굳게 결심을 한 후, 이건 보통 결심으로는 안 될 일이긴 하지만 정말 굳게 결심한 후 부모님들의 발을 씻겨 드리십시오. 어쩌면 “얘가 못 먹을 것을 먹었나?” 하실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감격과 보람의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분들이라고 서운해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주위를 돌아보시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 내가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발을 씻긴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발을 씻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부모의 자녀 사랑에는 미치지 못하듯이, 내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감히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왜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참으신 것입니까? 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까?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성품을 닮아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발까지라도 씻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둘째로 세족식은 주님처럼 우리도 겸손으로 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목사고 전도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고 따라가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닮아 있습니까?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위해 왔다.”(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서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의 도로는 포장된 길이 아니라, 흙과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형편없는 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구두나 운동화를 신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이 나오는 샌들을 신었습니다. 운송수단은 차가 아니라, 말이나 나귀나 낙타였습니다. 흙과 모래와 진흙에 동물들의 배설물이 뒤섞여 반죽이 된 길을 슬리퍼만 신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을 때, 그 발의 상태가 어떠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지금 우리들처럼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으니 그 발의 위치가 어디쯤 있었을지도 상상해 보면 … 속이 좀 불편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집에 식사를 하러 가게 되면 그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집에 종이 없었던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누구나 자신이 그 일을 하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독한 냄새가 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전을 피우면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중 아무도 자신이 그렇게 천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어정쩡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주님이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허리를 숙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는 표현이 섬김이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를 벗었다는 것입니다.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는 것은 겸손한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셨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벗고 겸손과 섬김으로 육신을 입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발뿐만 아니라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했던 베드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베드로전서 5:5절에서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두르신 수건은 바로 겸손과 섬김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에서 나왔듯이 그리스도인의 권위도 섬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아집과 독선과 자랑과 교만의 겉옷을 벗고, 겸손과 섬김의 수건을 허리에 둘러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서로 누가 큰 자인지, 누가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이며 천국의 시민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 아이는 인원수를 계수할 때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약자였으며, 자신의 뜻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작은 자요 낮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의(義)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밖에 바랄 수 없는 겸손한 약자에게 허락된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 의에 충만하여 자고하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부디 여기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겸손의 수건을 허리에 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서신서 베드로전서 5:5-6절의 말씀입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구약 이사야 57:15절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동양의 현인인 노자의 글에 보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물과 같은 분이 아니셨는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서 사람이 되셨고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만인과 만물을 이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낮아지시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물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낮은 곳으로 가서 거기에 처하면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겸손과 섬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즈음만큼 설교하기가 힘이 든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이 사랑과 섬김보다 무익한 욕망과 명예를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조차도 세상의 풍조를 따라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본질보다는 형식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기본과 원칙보다는 편법과 효율성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기본적인 덕목이요 지켜야 할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세족식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 그 겸손이 바로 우리의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만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영성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 중에 헨리 나우웬(1932-1996)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나우웬은 예일과 하바드에서 가르친 학자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남미 페루의 빈민가에서 빈민들과 그리고 캐나다의 지체 장애인 공동체(L’Arche Daybreak)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았던 기독교 영성의 실천가로 더 기억되는 분입니다.
나우웬의 책 중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에서부터 매료되어 단숨에 읽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 예수님의 선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예수님의 섬기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 속에서 읽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과 인격과 향기를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와 안락함을 초연히 버리고 고통 받는 민초 속으로, 장애인들 속으로 들어가 살기를 소원했던 나우웬, 그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어떤 신분으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게 되고, 세상이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