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쌓은 탑 허무는 말실수… 대통령직 엄중함 되새겨야
한미동맹 업그레이드 文정권과 격세지감
외교성과, 국가정상화 성과 쌓아가면서도
말실수와 횟집도열 같은 부주의로 실점 거듭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 잊은 결과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이 보수·중도 진영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은 사례가 한 번 있었다.
2021년 5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대변신이었다. 4년간 친중 노선을 고집한 장본인 맞나 싶게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대만 쿼드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과 기조를 같이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물론 ‘싱가폴·판문점 선언’ 존중이라는 한마디를 공동성명에 넣을 수 있다면 뭐든지 내주겠다는 ‘대북관계 집착증’이 낳은 양보였지만 어쨌든 등 떠밀려 옳은 길로 처음 접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김정은의 무시로 남북관계가 전혀 안 풀리자 미국과의 약속도 뒷전으로 밀어버렸고 워싱턴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는 더 떨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어제 민주당은 “2021년 정상회담에서 진전된 게 없으며 기존의 미국의 핵우산 정책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의 외교안보 식견 수준을 보여주는 반응이다.
나토의 핵공유협의체인 핵기획그룹(NPG) 같은 형태를 당장 실현하는 게 불가능한 엄연한 현실에서 양자 차원의 첫 모델인 핵협의그룹(NCG)이 생긴 것은 내실 있는 핵협의 장치 마련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일부에선 NPT 재확약을 놓고 우려하지만, NPT 회원국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준수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전술핵 재배치나 핵잠수함 상시배치도 미국의 세계전략 상황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면 어차피 가능성 제로인 비현실적 옵션이었으므로 그런 현실 속에서 핵잠수함 수시 전개 등을 얻어낸 것은 의미가 크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타의에 의해 소원해진 절친이 다시 뭉치듯 동맹 업그레이드의 발판을 다졌고 남은 4년 외교 노선의 침로(針路)가 깔렸다.
하지만 그런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출국 전 인터뷰에서 불필요한 표현으로 이번에도 실점을 자초했다.
물론 말실수는 사소한 일이고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경우엔 다르다. 말실수로 인해 본질이 흐려지면, 정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지지율이 떨어진다. 그 결과 총선 결과가 달라져 수많은 민생 이념 안보 관련 법령들이 바뀌고, 그 결과 정권이 다시 포퓰리스트 세력에게 넘어가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윤 대통령의 말실수 반복은 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려 했을 것이다. “한국 내에는 일본이 무조건 무릎 꿇지 않는 한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켜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저는 대통령으로서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 정책을 펼 수는 없습니다”라고.
그러나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표현은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문법상으로도 어색하고, 사과 요구 자체에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이었다.
사전에 질문지를 받고 답변을 준비해서 진행되는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거친 발언이 나온 것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며 즉석에서 표현을 만들어 하다 말이 엉켰을 가능성이 크다.
배석한 참모진이 대통령의 발언을 현장에서 일부 수정, 보완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도 어이없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무능 탓도 있겠지만, 감히 대통령의 말에 보완이나 토를 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얼어붙은 커뮤니케이션 분위기의 산물일 것이다.
대통령이 즉석 발언을 즐긴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지만 정확히는 오만이다. UAE에서의 “이란이 적(敵)“ 발언도 장병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표현 하나하나를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다 빚어진 일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윤 대통령은 “UAE의 적은”까지 말하고는 멈칫한다. 의도치 않게 부적절한 표현이 나왔음을 인지한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라고 표현을 바꿔 말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대학이나 고시 공부 시절 김치찌개집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경청해주던 후배들, 검찰 특수부 시절 부하들은 때로 과장되거나 적확치 않은 비유를 해도, 즉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다르다. 특히 나무 밑은 말실수만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악어들이 드글댄다.
내가 다 안다는 자만심은 더 위험하다. 지지자들은 예민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이슈에 대해 툭툭 거친 표현들을 내던져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대통령을 보며 자리의 무게를 절실히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절제하고 신중히 행동하고 있는 건가 의구심을 품게 된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는 국가, 국민과 직결된다. 따라서 한숨 한 번 자기 맘대로 쉬어서는 안 된다. 말과 행동 모두 잣대로 재어 가면서 해야 한다. 통제되고 절제된 언어라야 한다. 한번 뱉으면 거둬들일 수가 없다. 역사에 기록되고 평가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물며 외교적 언어야 말할 나위 없다. 윤 대통령은 외교적 성취와 국가 정상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실언들 때문에 실언만 크게 부각돼 그 빛이 가려진다.
말실수뿐만 아니라 온갖 논란거리들 대부분이 정책 방향이 아니라 무신경, 부주의에서 비롯됐다. 부산 횟집 앞에 도열하는 것도 자리의 엄중함을 잊어서이고, 특별감찰관 임명을 회피하는 것도 직분의 엄중함을 잊어서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지적을 받으면 고친다. 하지만 실수가 되풀이된다면 이는 시스템상의 큰 허점을 뜻한다. 지적해주는 사람이 옆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듣기 싫은 소리를 안 들으려 한 결과다.
최근 윤 대통령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도층과 온건 보수들로 분석되는데 정책노선 방향 이념 때문이 아니다.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언행의 문제와 소통 부재가 쌓이고, 전당대회에서 반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것을 보고 당초 기대했던 공명정대·공정·당당함·올바름에 대한 갈망이 실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문 정권이 탈선시킨 국가 궤도를 공들여 바로잡아 가고 있으면서 왜 어이없는 자책골로 실점하나.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