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자기 것은 죽도록 사랑하지만 자기 것이 아니면 무관심하기 십상이다. 자기 자식도 아니면서 자식 이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관계가 아닐 것이다. 내게 이런 사랑을 주는 분이 있어 나는 이것을 참사랑이라 생각하고, 이 기회에 그분에 대한 보답의 심정을 밝혀보고자 한다.
광복 이듬해에 태어난 나에게 열한 살짜리 막내 고모가 있었다. 그러니 딱 10년 차이다. 고모는 첫 조카인 나를 유난히 예뻐해 주셨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태어나고 곧이어 6.25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먹을 것이 없던 때니 아이 음식인들 뭐가 있었겠는가. 겨우 시장에서 팥 시루떡을 조금 사와 잘게 썰어 놋그릇에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었다가 먹였다고 한다. 우리 집은 대구 남산교회 뒤쪽이었는데 염매시장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떡 심부름을 고모가 했다고 한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고모는 심부름을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하며 '나도 떡 먹고 싶다. 좀 먹어보자.'라는 말을 할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할머님이 자주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인 아버지는 대학까지 보내면서 고모는 초등학교까지만 허락하셨다. 고모는 큰고모의 친구 미용실에서 일을 했다. 새벽에 가서 밤늦게야 오는 고된 일이지만, 기술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보수도 없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가끔 손님들이 빵이나 과자를 내놓으면 그것마저 먹지 않고 나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어미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 나는 모르지만 반복적으로 하시던 할머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고모가 하루 열몇 시간씩 일하고 받은 돈으로 그 당시 무척 귀했던 일본제 나일론 양말을 사다 주셨다. 색동무늬 양말은 색상도 눈부셨지만 보들보들한 촉감이 면양말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나일론 양말은 그동안 신었던 면양말과는 하늘과 땅이었다. 정말 선녀들이나 신던 양말이었다. 이튿날 교실에서 친구들이 내 예쁜 양말을 ‘한 번만 만져보자.’고 졸랐고, 나는 의자 위에 양말 신은 발을 올려놓아야 했다.
이 무렵, 엄마는 아버지 근무지인 지방에 계셨고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랑 살았다.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는 내 옷을 깨끗이 빨아 널었고 고모는 숙제를 도와주었다. 전쟁 후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꼬질꼬질했지만, 할머니와 고모 덕으로 나는 언제나 깨끗한 옷에 숙제는 물론 복습 예습까지 완벽하게 하는 모범생이 될 수 있었다.
내가 6학년이던 겨울 가장 춥다는 소한 날 고모는 시집을 가셨다. 그리고 서울로 터전을 옮기셨다. 고모가 보고 싶어 울기도 했다. 고모는 제기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지금 슬하에 손자 손녀가 여덟 명이나 되고 다복하시다.
나도 1972년에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부 초년생에게 또 결정적 도움을 주신 분이 고모님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모님께 도움을 청했고 고모님은 기꺼이 도와주셨다. 집장만 시 몇 날 며칠을 고모님과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고, 살림살이 장만은 물론 모자라는 돈도 흔쾌히 빌려 주셨다.
결혼 후 남편 첫 번째 생일은 대구 엄마를 대신해서 고모가 손수 챙겨주셨다. 지금까지 남편과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신다.
내가 불임으로 고생할 때도 용하다는 병원을 모두 고모님과 함께 다녔다. 고모부가 한약방을 하셨기에 귀한 약재를 구해다 한약을 계속 지어 주셨다. 미리내 성지에 있는 성스러운 잔디를 삶아 마시면 불임에 효험이 있다고 파란 잔디를 한 움큼 갖다 주신 일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6년 만에 임신을 확인하고 맨 먼저 엄마가 아닌 고모님께 전화를 했다.
"축하한다. 사실은 너 아기 갖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 기도 다녔다.
" 기쁨 반 고마움 반 울음이 절로 터졌다.
어렵게 큰아들이 태어나던 해 고모님이 김장을 해주셨는데, 절대 잊지 못하고 있다. 추운 날 경동시장에서 배추를 사다 절여 큰 비닐봉지에 양념까지 담아와 우리 집에서 버무려주셨다. 김장이 어디 보통 일인가. 김장은 자기 자식이 아니면 해줄 수 없는 힘든 일이다. 맛도 뛰어났던 그 김치를 나는 커가는 아들과 함께 꼬박꼬박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은 중년이 되었지만 그 김치 맛은 아직도 상큼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70년을, 그러니 지금도 나는 정신적 지주인 고모님 옆에서 살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빈자리도 고모님이 채워주신다.
고모님은 왜 자식도 아닌 나를 이렇게 자식 이상으로 생각해 주는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궁금하다. 그냥 고모와 질녀 사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 고모님이 지금 알츠하이머 증세로 치료를 받고 계시니 이제부터는 내가 고모님에게 해드릴 차례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밖에는 없다. 기도가 통한다면 밤낮으로 하고 싶다.
천주교 재단인 효성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신자가 된 고모님은 성당에서도 모범 신앙인이었다.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고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시며 주위에 덕을 쌓으셨다. 고모님이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고모님을 그냥 두지 않으실 것 같다.
첫댓글 인터넷 동호회의 활성화를 위해서 열심히 올려보겠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는 댓글 부탁드립니다.
옥덕님의 글을 읽으면 재미난 이야기 하나 들은 것 처럼 즐거워 지네요.
조카사랑이 남달랐던 훌륭하신 고모님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시다니 안타깝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28회 최숙희 바쁘신 언니, 댓글 고맙습니다.
댓글에 힘을 얻고 또 올릴 용기가 생깁니다.
감동적인 글을읽으니 얼마전에40년만에 만난 우리고모(77세)님이 생각나네요^^*
얼마나 멀리 사시기에 40년만에 만나셨나요?
고모님은 아버지를 대신한다고들 하잖아요.
얼마나 반가웠을꼬~ 고모님 살아계신 숙아우님 정말 좋겠네...
이제 내 위의 동기는 언니 한 분 뿐인데...
나도 고모생각이 난다 고모는 친정오빠의 첫 딸인 아우가 태어날 때 그 때 홀딱 반하셨다
나도 친정조카중에서 첫째한테는 그 느낌이 다르드라. 이 중에서도 그 고모님은 천사님이시다.
하느님은 힘껏 보호하실거라고 믿는다.
고모님은 천사님이 맞습니다.
지금은 딸들이 모두 효녀라 고모님을 잘 보살펴 드리고 있습니다.
옥덕아우 고모 사랑을 읽으니 참~좋은 고모님이시다 . 그 고모님이 알츠하이모를 앓으신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늙어까지 건강하게 계시면 맛난 음식 대접하고 가끔 찾아뵈도 보람될텐데 인생이 이렇습니다.
옥덕님 건강을 위해서도 글 많이 올려요.
언니 말씀대로 인생이 이렇게 마음같지 않네요.
인터넷 동호회 활성화를 위해서 그동안 써온 글들을 많이 올려보겠습니다.
옥덕님 글 읽으니 나도 고모님이 계실 때 무한한 사랑을 받은 기억나는데 정작 나는 우리 친정 질녀들 한테 그렇게
하지 못하니 죄스러울 뿐입니다.
고모님은 아주 특별하신 분입니다.
저도 조카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옥덕님을 살뜰이 챙겨주시던 고모님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다니 걱정이 됩니다.
그동안 받은 사랑 계실동안이라도 마음만으로도 갚으세요.
어머님 대신에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았을 터인데요......
며칠 전, 무릎수술을 하셨다고 합니다.
문병을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