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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8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마태오 7,15-20
나의 열매가 좋은 열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거짓 예언자에게 속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자신과 일가족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이비와 같은 것에 빠지는 이들은 사실 외적으로 주어지는 다른 만족감에 도취하여 교주가 거짓 예언자인지, 제대로 된 예언자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잃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결국 자신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우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있기 전에 ‘황금률’ 이야기하셨고 ‘좁은 문’ 이야기하셨습니다. 황금률은 사랑하라는 것이고 좁은 문은 주님 뜻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주님의 뜻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JTBC ‘싱어게인’ 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이승윤’ 씨의 아버지 이재철 목사의 ‘눈물로 얼룩진 아내의 일기장’에 관한 내용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내가 어떻게 술주정뱅이 남편을 회개시켜 목사가 되게 하였는지, 이재철 목사의 간증을 있는 그대로 옮겨봅니다.
“아마 제 처는 제가 믿음이 좋은 집사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빨리 들어가면 술친구들 집에 데리고 들어갑니다.
제 처는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객기를 부리고 싶으면 아내를 불러 노래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성품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매사에 착한가 보다 하고 감사했습니다.
1984년 8월 2일 새벽 2시에 그날도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그날 우연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열쇠가 손에 잡히는 거예요. 저는 술을 먹고 아무리 늦게 집에 들어가도 꼭 벨을 눌렀습니다.
그래야 아내가 깨서 저녁 밥상을 차려주거든요.
저는 술집에서 아무리 술안주를 많이 먹어도 밥 배가 따로 있었습니다.
집에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새벽 1시든 2시든 벨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머니에 아파트 열쇠가 잡혀서 열고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들어갔는데 거실도 어머니 방도 캄캄해요. 부부방으로 들어갔더니 불은 다 꺼지고 방바닥에 작은 전등이 켜져 있는데 제 처가 저를 기다리다가 엎드려 잠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맡에 노트하나가 펼쳐져 있는데 노트에 물이 흘러서 얼룩이 져 있었습니다.
원래 그러지 않는데 왠지 그 노트의 글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는 제가 그 글을 읽었다는 것을 6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6년 뒤 쓰게 된 나의 고백이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아내는 제가 어떤 계기로 주님께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 노트의 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오늘도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니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제가 이 글을 읽는데, 제 마음과 귀에서 북소리가 풍풍 울리는데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북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교회 다니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사랑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 사랑은 성경에 문자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저는 그동안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아내는 분명 좋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그 열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결국엔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커다란 북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놀라움’입니다.
진정 자기 자신과 또 누군가에게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호두는 딱딱한 껍질에 쌓여 있습니다.
그 가녀린 새싹이 그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와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호두 열매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땅의 역할이 큽니다. 땅이 그 엄청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두 열매가 나무가 되는 그 신비한 장면을 보며 땅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열매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좋은 열매란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좋은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웁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한 과정에서 나도 놀라고 이웃도 놀랍니다.
모세가 본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나무인데 꺼지지 않는 불이 붙어 있어서 놀라워야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8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마태오 7,15-20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전부이고 요약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통 교리에 크게 벗어나는 이단이 속출하고 있는데, 한없이 부족한 인간이 한없이 심오한 하느님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대형사고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며 교회 정통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출몰해서 신자들을 대혼돈과 분열로 몰고 갔는데,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이레네오 성인은 이단과의 투쟁에 가장 앞장섰던 분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어색하고 황당한 논리와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과 강론을 많이 하셨는데,
이를 집대성한 자료가 '이단 논박' 혹은 '이단을 거슬러'라는 문헌입니다.
아직도 판을 치는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신념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결국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이비 교주들의 개인적 야욕과 사심, 과대망상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추종자들의 미성숙한 신앙, 식별력 부족도 사이비들이 활개치는 데 크게 한몫을 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이 이름처럼 공번되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느려 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활기차거나 신명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양한 신앙의 유산들,
보물들과 더불어 지극히 이성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의 생각은 얼마나 교회적이고 정통적인지 모릅니다.
그는 신앙의 규정이 사도신경과 성체와 일치에 있으며, 이는 복음 해석의 열쇠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도 전승은 하나이고 공적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기에 영적이므로 교회와 성령을 분리시킬 수 없음을 주장하며 사도 전승에서 많이 벗어난 영지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전부이고 요약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사고방식을 확인시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2023. 6. 28. 수)(마태 7,15-20)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거짓 예언들을 조심하여라.>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20).”
이 말씀을 바로 앞의 ‘좁은 문’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거짓 예언자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가라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왜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가? 이왕이면 좀 더 쉬운 길로 가라.”
같은 말들이 그런 유혹에 해당됩니다.
또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죄가 되는 일 같아서 망설이는데 옆에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경우도 유혹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어떤 문이 ‘좁은 문’이고 어떤 문이 ‘넓은 문’인지, 즉 어떤 문이 ‘생명의 문’이고 어떤 문이 ‘멸망의 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이론만 내세우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부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양의 옷차림’을 한다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속으로 악의를 품고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겠지만,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거짓 예언자인 줄 모르고 있거나,
또는, 자기는 진짜라고 믿고 있으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자들이 위험한 것입니다.
바로 뒤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이 나오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항의합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거짓 예언자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그자들이 ‘하는 일’만으로는 거짓 예언자인지 진짜 예언자인지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은 진짜일까?
진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진짜일까?
마귀들은 거짓 예언자의 명령을 듣고 쫓겨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도 19,14-16).
그러니 그 일은 진짜가 아니라 속임수일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진짜 기적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라는 말씀은, “속에 탐욕만 가득 들어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양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요한 10,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자들의 ‘행실’을 보면 식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행실’만으로 식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겸손하고, 선하고, 사랑을 잘 베푸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열매’는, 여기서는 ‘행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활동의 결과’를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갔는데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버렸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식별하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가 믿는 교리를 부정하거나 왜곡한다면, 또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면 거짓 예언자이고,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을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일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쁜 나무일 수 없다.”로
표현을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최종 결과에 대한 말씀이고, 중간 과정에서는 좋은 나무가 타락해서 나쁜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고, 나쁜 나무가 회개해서 좋은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원래는 좋은 나무였는데 변절해서 나쁜 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바오로 사도는 원래는 나쁜 나무, 즉 교회를 박해하던 박해자였는데, 주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좋은 나무로, 즉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지금 나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지금 나의 삶은 구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는 관심 없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
진실한 신앙인도 어느 순간에 변절하는 경우도 많고, 구제불능처럼 보였던 죄인들이 회개해서 성인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종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